110화
세 번째 순위 발표식 날이 다가왔다. 순위 발표식 촬영은 매번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이뤄졌지만, 오늘은 다 같이 모여 본방송을 시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평소보다 이르게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덕분에 이진도 오랜만에 만원 지하철을 타고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방송에 출연하고 나서는 늘 출퇴근 시간을 피해 한적할 때에나 지하철을 타 한산했으나 오늘은 늦은 귀가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헉, 혹시 유이진?”
“이진아!”
그래서 그런지 모자에 마스크를 끼고서도 이진을 알아챈 사람들에게 두어 번 이름을 불렸다. 친근하게 불러 오는 목소리에 당황하긴 했으나 이진은 태연한 척 간단히 눈인사를 보냈다.
왼올이 승승장구하면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지하철이나 버스는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매 휴일마다 줄어만 가는 통장 잔고를 보면 아직 택시라는 사치를 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이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사람을 부담스럽다 하는 건 몹시 배부른 소리였다.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알리기 위해 길거리를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국이 아닌가.
그러나 한번 파파라치 사건을 겪고 나니 신경이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르는 이들의 시선을 참기 힘들고 괜한 사람들을 의심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핸드폰만 들고 있어도 파파라치가 아닐까 흠칫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걸 연예인 병이라고 하는 건가 봐.’
방송국 근처로 갈수록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연히 그들은 이진이 지나가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안도가 됐다.
방송국에 드나드는 유명인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유명 인사라도 된 듯 우쭐하다니. 이진은 제 뺨을 살짝 두드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현재 상위권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멤버였다. 다행히 아직 탈락할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상위권 참가자 대부분이 공격받은 지금, 굳건한 팬층 덕분에 안정적이던 그들의 순위가 어떻게 뒤집힐지는 이진과 제작진을 포함한, 왼올에 관련된 모두가 주목하는 이슈였다.
이진은 자신이 그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언제든지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위치. 그 자신마저 내딛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몰랐다. 운이 좋다면 연예계의 입구로 직행하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방송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그대로 방송 인생이 끝날지도 몰랐다.
‘걱정을 사서하지 말자. 여차하면 솔로 데뷔! 여차하면 솔로 데뷔…… 하아.’
이진은 자신의 일부 팬들이 염불을 외듯 외치는 말을 속으로 중얼댔다. 그들은 윈올보다는 ‘유이진’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이진이 방송 내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거나 모함을 받으면 ‘여차하면 솔로 데뷔!’를 외치며 탈주를 종용했다. 물론 그런 게시물이나 댓글은 발견되는 즉시 엄청난 욕을 먹으며 사라지곤 했지만, 이진은 그 극단적인 글을 보며 나름대로 위안을 얻었다.
“안녕하세요.”
“이진 씨 일찍 오셨네요. 유니폼 갈아입고 촬영 준비 먼저 하실게요. 이진 씨는 사이즈가…….”
대기실에 도착하자 명단을 든 스태프 한 명이 문 앞에서 새 유니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명단을 손으로 훑으며 이진의 옷 사이즈를 확인하더니 문 옆에 둔 종이 상자에서 새하얀 옷 뭉치를 꺼냈다.
“속에 입는 반팔 티는 개인 의상 입으셔도 돼요. 셔츠가 살짝 비치니까 아빠 러닝 같은 건 좀 피해 주세요. 바지는 이번 주만 입고 반납하셔야 해요. 촬영 끝나고 바로 안내드릴 건데, 오늘은 우선 오염만 주의해 주세요.”
“네.”
여전한 흰 반팔 셔츠 세 장에 내의로 입을 흰 반팔 티 세 장, 상아색 카디건 한 장. 그리고…… 바지 두 장? 하나씩 옷가지를 살펴보던 이진은 예상외의 구성에 살짝 놀랐다. 이번에는 제작진과 의상 팀 사이에 극적인 합의가 있었는지 바지가 남색이었다.
“바지가 남색이네요?”
“흰 바지에서 탈출해서 기쁘시죠?”
기쁘기보다는 어딘지 어색했다. 그러나 스태프는 흰 바지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오래 갈 건 아니고 4라운드 컨셉 때문에 그래요. 최종 무대에서는 원래 유니폼 입으실 거예요, 아마. 아직 내부에서도 유니폼으로 말이 많아서.”
잡일이나 하는 말단 스태프는 상사들의 탁상공론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이진에게 잠시 구시렁댔다. 그러나 한마디를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참가자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기에 이진은 그 틈을 타 스리슬쩍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으로 구역을 나눈 간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이진은, 대기실 한 면을 빼곡히 메운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구겨진 곳 없고, 잘못 접힌 곳도 없고. 옷이 꽉 끼지도 너무 남지도 않았다. 긴팔 유니폼과 길이나 재질만 다를 뿐 핏은 비슷했다.
그래도 역시 바지가 흰 색이 아니라 그런지 어느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교복 같았다. 옷매무새를 꼼꼼히 확인하고 카디건까지 걸치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제법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이진 씨, 옷 다 갈아입었으면 얼굴 좀만 만지고 가자.”
이진이 옷만 확인하고 곧장 나갈 것 같자 다른 참가자의 메이크업을 봐 주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그를 붙잡았다. 사실 참가자들 틈에 줄을 서서 화장해 달라 부탁하기가 멋쩍어서 일부러 나가는 척 관심을 끌어 본 것이지만, 이진은 들켰다는 듯 웃으며 먼저 자신을 불러 준 스타일리스트에게 다가갔다.
“어머, 염색했네? 주말에 미용실 다녀왔어요?”
스타일리스트는 곁눈질로 이진을 한번 살피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촬영으로 다녀왔어요.”
“아, 그거? 그러고 보니까 컨셉 사진 받은 것 같네.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니, 사진도 다 찍어 놓고서 옷만 갈아입고 쏙 나가려고 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장난스러운 타박에 이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몇 달이나 얼굴을 맞댔기에 스태프들은 점점 그를 편하게 대했지만 이진은 좀처럼 그들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들리는 게 있으니 그들의 이력이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이진은 자신에게 말을 건 이가 ‘한주희’이며 다른 스타일리스트들에 비해 경력과 나이가 많은 편이고, 지금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실장님’이라 불리 운다는 걸 알았다.
또한 그녀가 방송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송 업계에서 오랜 시간 일했고, 몇 년 전 SSTV 직원과 결혼을 했으며 직업 특성상 유명한 예능인과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알았다. 그러나 “안 불러 주셨으면 눈에 띌 때까지 선생님 주변에서 서성였을 거예요.” 같은 말을 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는 못했다.
이진이 영혼 없는 미소를 짓고 있자 먼저 화장을 받고 있던 참가자가 킥킥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누나가 행사 출장을 안 나가니까 몰라서 그래요. 이 형 염색한 지 3일은 지났는데 사흘 내내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가지고 놀렸다니까요? 다들 비슷한 시기에 스타일 변신했는데 이 형만 유독 놀림 받아서.”
뭘 하든 어색한 이진과 달리 무려 ‘누나’라는 호칭을 써 가며 친근하게 대화에 끼어든 이는 장조근이었다. 조근의 말대로 많은 이가 이번 휴가 기간에 스타일을 변신을 시도했다. 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조금씩 변화가 있었지만 이번엔 계절이 바뀔 무렵이라 그런지 유독 많은 이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 말을 꺼낸 조근만 해도 얼마 전에 머리카락을 주황색으로 염색했다.
“쉿. 입술 칠하자.”
그를 조용히 시킨 스타일리스트가 입술에 주황빛이 살짝 도는 틴트를 바른 뒤 브러시로 살살 문질렀다. 이어서 탈색으로 부스스해진 머리에 에센스를 듬뿍 발라 자연스러운 컬을 만들어 주자 조근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진 씨 헤어 컬러가 너무 잘 어울려서 한마디 안 하곤 못 베기겠다. 그치?”
“맞아요. 나도 이거 하고 싶었는데 저 다니는 숍 원장님이 이 색 요즘 촌스럽고 한 물 갔다고 엄청 말렸거든요. 형 티브이 나오면 원장님이 질투 나서 뒤집어지실 듯.”
조근이 앉았던 자리에 이진이 앉고 나서도 두 사람의 수다는 계속 됐다. 이진은 피부를 톡톡 간질이는 브러시를 견디며 눈을 꼭 감았다. 별로 친하지 않은 수다쟁이들 틈에 어설프게 끼어들면 나중에 괴로워지는 건 그였다. 처음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흐려야 했다.
그래서 이진은 ‘남색이 촌스럽다고 머리를 주황색으로 만들어 버린 미용실과는 연을 끊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그나저나 이진 씨. 저번에 시티 로열 만났다며? 얼마 전에 해인이가 자랑하더라.”
“헉, 시티 로열 선배님들이요?”
“아, 네. 우연히 방송국에서.”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진과 대화하던 두 사람의 입이 순간 다물렸다. 이진의 등 뒤에 선 인물을 보고 멈춘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승현 씨.”
아니나 다를까 승현이 나타났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흘끔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진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상이 공개된 뒤로부터 자그마치 열흘이 넘게 지났는데도 이런 태도라니. 이진이나 승현을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둘 사이의 일을 흥미로운 가십거리 취급한다는 증거였다.
“으음,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자꾸 이마 긁적거리지 말고!”
“안 그럴게요. 형, 촬영장에서 봐요.”
눈치를 보던 조근이 떠나 주변이 조용해진 것이 그나마 좋은 일이었다. 이진은 뺨에 그림자를 그려 넣는 손길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눈을 옆으로 굴리자 갈아입을 옷을 들고 커튼 뒤로 들어가는 승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진 씨, 눈 좀 다시 감아 볼래요?”
다시 눈을 감자 눈두덩이 위로 아이섀도가 올라왔다. 화면 너머로 보면 발랐는지 말았는지도 잘 구분되지 않을 만큼 연한 화장이지만 그 긴가민가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상당히 많은 공이 들어갔다.
결코 조용하지 않은 대기실 내에서 유일하게 이진의 주변만이 고요했다. 주희도 그 고요함을 의식했는지, 침묵을 가르고 부자연스러운 콧노래가 들려왔다.
주희는 연예인보다 좋은 체력으로 새벽 촬영을 준비 할 때에도 절대 입을 쉬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멈추고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무언가 있음을 깨달은 이진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다 됐다. 눈 떠도 돼요.”
그녀의 부자연스러움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선승현이 이진의 눈앞에 서서 화장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진은 천천히 눈을 뜨다가 도로 감아 버리고 싶어졌다. 대기실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승현은 벌써 옷까지 다 갈아입고 있었다.
‘누구는 이렇게 주변 눈치나 보고 있는데 저건 혼자 태평하게.’
눈앞을 기웃대는 그를 보니 화가 나는지 가슴이 아플 만큼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런 이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현은 자연스럽게 주희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와. 형 눈에 분홍색 잘 어울려요.”
“그렇죠? 승현 씨도 같은 색으로 해 줄까요?”
“그냥 어울리게 부탁드릴게요.”
다시 브러시가 눈 밑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승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아예 대놓고 이진의 얼굴을 관찰했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훑어 내리는 부담스러운 시선이 또렷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