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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08화 (108/173)

108화

“어후, 원장님. 제 친구가 걔네 뮤비 촬영 때 코디였는데 실물 진짜 장난 아니래요.”

“몰래 관리받는 거 아닐까요? 요즘은 일반인들도 알아서 병원 다니는데.”

“그랬으면 벌써 소문났겠죠. 하여튼, 잘못 건드리면 우리 다 끝장이에요. 요즘 좀 시끄러워서 그렇지 원래 걔네 이미지 얼마나 좋은데요.”

업계에서도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그들은 전문가의 손길 없이도 참가자들 틈에서 빛을 뿜고 시청자의 마음을 훔치는 훌륭한 재료였다. 너무도 훌륭해서 잘못 건드리면 자리를 잡기는커녕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수준이라 이들을 무상으로 스타일링하겠다 결정한 것은 원장에게 있어 큰 도전이었다.

드라마 한 작품을 맡는 것과는 무게가 다르다. 드라마 한 작품 정도는 가볍게 말아먹어도 상관없는 중견 배우에게 배역에 어울리는 코디를 해 주는 것.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앞으로의 연예계 인생이 통째로 걸려 있는 인기 참가자들을 코디하는 것은 정말로 차원이 다른 부담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모 아니면 도다. 갑자기 내일부터 장기 출장이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더 제대로 준비를 했을 텐데. 원장은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쉬웠지만 이를 후회하는 대신 약속 시간에 맞춰 들이닥칠 카메라를 의식하며 직원들을 단단히 단속했다.

그때, 딸랑이는 벨 소리와 함께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녕하세요. 윈올입니다.”

가장 먼저 뛰어 들어온 남자가 원장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곧 참가자가 들어온다는 것 같아 다들 허리를 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자동문이 닫히고 카메라 한 대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남자가 마구 손짓하자 원장과 직원 일동은 카메라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띠며 꾸벅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뮤즈 드 라 뷰티입니다.”

참가자들이 나타난 것은 카메라가 구석으로 숨고, 자동문이 세 번째로 열렸을 때다. 카메라를 줄줄이 단 네 명의 길쭉한 청년들이 차례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화려한 가게 내부를 두리번대더니 입을 벌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연예계 초짜다운 촌티 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원장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도전 수준이 아니었다. 잘해 봐야 본전, 못 하면 쪽박이다.

“안녕하세요, 유이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원장도 많은 셀럽들을 만나 봤다. 해외에서 유학을 하며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미남미녀들을 경험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어지간한 유명인사는 어깨 너머로라도 만나 보았다. 스크린과 실물이 다른 만큼, 웬만큼 잘나가는 사람도 열띤 관리를 받아 미모를 완성시킨다. 즉, 처음부터 ‘백조 왕자’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원장의 바로 앞에 바로 그 멸종 위기종의 백조 왕자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뮤즈 드 라 뷰티 원장 최은수입니다.”

“뮤드르…… 음. 프랑스어죠?”

낯선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버벅이는 모습에도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뮤즈 드 라 뷰티요.”

“너 프랑스어 할 줄 알아?”

“설마요. 밖에 간판에 한글로 발음 써 있어요.”

원장은 이진의 뒤에 서 있던 승현이 말을 걸기 전까지 자신의 눈에 서서히 씌어 가던 콩깍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승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번개에 맞은 듯 황급히 놀라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장은 미리 준비된 상담실로 멤버들을 안내했다.

“그럼 잠시 보면서 끌리는 사진 몇 장 고르고 계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원장은 미리 준비한 음료와 스타일링 참고 이미지용 잡지를 건네준 뒤 복도로 나왔다. 속닥속닥 직원들이 복화술로 떠드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둘이 싸웠다더니 사이좋은데?”

“에이, 좋은 척하는 거겠죠.”

“장 선생님은 스타 팩트 찌라시를 아직도 믿어요?”

원장은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무조건 손본 듯 손보지 않은 컨셉으로 가야 해.”

“저 파란 머리 유이진 완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도 금발 선승현이요.”

직원들이 투덜대긴 했지만 그들도 참가자들의 실물을 보고 이미 납득한 뒤였다. 더 이상 상향시킬 구석이 안 보이는 외모에 괜히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엔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컸다.

“그럼 백미열 씨는요? 이분은 탈색 하고 싶다는 것 같은데.”

“본인이 하고 싶다는 것까지 막을 순 없지.”

직원들은 문 밖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척 서로 담당할 참가자를 정하기에 바빴다. 원장은 이마를 짚으며 부디 자신의 도전이 잘못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편 이진과 승현, 미열과 우진 네 사람은 카메라 두 대와 함께 상담실 안에 덩그러니 방치되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잡지를 팔락팔락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진은 건물이 주는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숍은 이쪽 업계에 일하면서 몇 가지 주위들은 게 다라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한계는 기껏해야 고급 미용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게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웬 궁전같이 휘황찬란한 금빛 인테리어들이 보이는 게 아닌가. 거기서 이미 기선 제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우진도 이진과 비슷하게 주눅 든 표정으로 조심조심 잡지를 넘겼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담실 문이 열리고 아까 전 인사를 나눴던 원장이 들어왔다.

“어디, 다들 맘에 드는 스타일은 고르셨어요?”

테이블 중앙에 강의를 하듯 선 원장을 향해 우진이 가장 먼저 맘에 드는 사진을 들이밀었다. 원장은 우진과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가장 먼저 원하는 이미지가 뭔지 물어봤다.

“딱히 없는데…… 지금이랑은 조금 달라 보이고 싶어요.”

“그럼 탈색 없이 가장 밝은 톤으로 염색하시면 어떨까요? 이 정도 컬러로도 충분히 이미지 변신이 가능하시거든요. 펌을 조금 넣으면 드라이만 가볍게 해도 그럴싸하고. 기장은 여기서 더 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아, 그런가요?”

우진은 원장의 처방이 맘에 드는 눈치였다. 미열은 머리를 기르고 탈색을 하고 싶다며 우선 희망사항을 밝혔다. 원장은 미열이 가리킨 사진 몇 장을 유심히 뜯어봤다. 사진 속 모델들은 공통적으로 잘 익은 벼와 비슷한 색을 한 머리를 단발 근처까지 기르고 있었다.

“음, 미열 씨가 부각하고 싶은 이미지는…….”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남자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이진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막히게 소리를 캐치한 미열이 한차례 이진을 노려봤다. 다행히 원장은 미열을 비웃거나 하지 않고 프로다운 미소를 띠운 채 진지하게 조언했다.

“탈색을 세네 번 해서 아예 색을 다 빼 버린 다음에 덮는 방법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신비로운 느낌은 확실히 갖고 가겠죠. 우선 이 사진은 탈색을 네 번쯤 한 거예요. 탈색을 한번이나 두 번만 하면 부드러워 보이긴 하는데, 어른스러운 느낌은 좀 덜 살 것 같네요.”

미열이 말할 땐 허황되고 우습게만 들렸으나, 원장이 한차례 설명을 거치고 나니 굉장히 믿음직스러워졌다. 이진은 미열과 함께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음 차례가 자신임을 깨닫고 허둥지둥 잡지를 내밀었다.

“전 머리 모양은 잘 몰라서요. 그냥 적당히 해 주시면.”

이진은 잡지를 덮어서 냈다. 과거 작곡가 활동 경험 덕에 이진은 뭐든지 적당히란 주문이 제일 어렵단 걸 알았다. 하지만 정말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이렇다 할 주장을 하기가 힘들었다. 숍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팬들이 바라는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검색해 봤는데도 그랬다.

또한 그는 아무리 팬을 위한다 할지라도 지금 갑자기 백발이나 파란 머리, 분홍 머리가 되는 것은 스스로 결정하기엔 너무 큰일처럼 느껴졌다.

“아, 그렇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진한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건 어떨까요? 이런 느낌인데.”

그러나 원장은 귀찮다는 기색 없이 오히려 잘됐다는 듯 환히 웃었다. 그리고 이진의 앞에 놓인 잡지를 휙 가져가 팔랑팔랑 넘기더니 사진 한 장을 딱 보여 줬다. 사진은 약간 퇴폐적인 분위기로 부스스하고 보들보들하게 세팅되었을 뿐 스타일 자체는 평범했다. 대신 밝은 부분의 머리카락이 짙은 남색과 보라색을 띄고 있어 마치 무대 조명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형이랑 잘 어울리겠네요.”

“그래?”

어느새 승현도 고개를 빼고 사진을 보고 있었다. 미열과 우진도 잘 어울린다며 한마디를 얹었다. 원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진에게 이 컬러를 적극 추천했다. 얼굴도 훨씬 환해 보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도는 데다 컬러 렌즈와도 찰떡같이 잘 어울리고, 아무것도 안 해도 꾸민 듯한 느낌이……. 원장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진의 마음도 점차 기울어졌다. 이 정도 변화라면 과하지 않고 만족스러웠다.

승현의 스타일까지 정한 뒤 네 사람은 곧바로 시술에 들어갔다. 번쩍이는 금빛 의자에 가운을 두르고 나란히 앉자 당장 뮤직비디오를 찍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났다.

“머리는 이 정도로만 다듬으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적당히 해 주세요.”

이진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차가운 가위가 머리 위를 몇 번 왔다갔다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서걱서걱, 경쾌하면서도 섬찟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머리를 다 다듬었을 즈음에는 승현도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쳐 가며 그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가볍게 정리만 한 머리에 짙은 색의 염색약이 발리기 시작했다.

“형 이마 깐 것도 잘 어울리네요.”

“승현 씨, 정면 보실게요.”

승현이 머리를 다듬던 중 이진에게 말을 걸었다가 혼났다. 이진은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짓다가 그를 따라 정면을 바라봤다. 염색약이 발린 앞머리가 모조리 뒤로 넘어가자 어색한 느낌이긴 했다.

이진은 섬세한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자신의 변화 과정을 거울 너머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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