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07화 (107/173)

107화

“잠깐만, 선승현. 나 지금 할 말이─”

그때, 퍼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아쉬운 생각이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찾아왔다.

“아, 불꽃놀이.”

이진을 돌아본 승현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림 같은 옆얼굴이 갖가지 빛에 따라 색색이 물들었다. 이진도 그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퍼엉! 타다닥. 커다란 불꽃들이 오색찬란하게 하늘을 수놓고, 지상으로 떨어지며 사그라드는 빛의 잔여물이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이 눈동자에 가득히 맺혔다.

“와, 여의도만큼 크게 하네요. 마저 보고 가면 좋을 텐데.”

짧게 감상을 남긴 승현이 시선을 다시 이진에게로 돌렸다. 그가 잡혔던 팔을 빼내어 다시 잡아올 때, 잠시 도망갔던 현실 감각이 되돌아왔다. 이진은 이 순간이 몹시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들어가요. 형.”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이 멀 듯 현란한 불빛을 뒤로했다. 그리고 승현의 뒤를 따라 머지않아 불꽃보다 화려하고 반드시 별보다 빛날 그의 현실로 돌아갔다.

***

자꾸만 선승현에게 홀리는 것 같다. 이진은 요즘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평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함께 불꽃놀이를 보던 날 밤, 두 번씩이나 승현을 붙잡고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려 했을 리 없었다.

‘너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그날 이진은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다.

진짜 미쳤던 걸까. 아무리 분위기에 취했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일전에 미열에게 들었던 자의식 과잉이란 말이 떠올랐다. 내심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이번에 그 일을 겪고 나니 자의식보다 더 큰 과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감정 과잉…….”

단어의 실체를 확인하듯 이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승현 앞에만 서면 평소의 침착하고 냉정하던 유이진이 힘을 잃고 맥을 못 춘다. 자꾸만 승현의 관심을 끌고 싶고, 또 충분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었다니.’

그와 나눈 대화, 그가 한 행동 하나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쉽사리 좌우된다. 아무리 무시하자고 다짐해도 선승현 조상님 영혼이 씌기라도 한 건지 그 자식 얼굴만 보면 마음이 물러져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차근히 나열한 이진은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승현에게 홀려 버린 것이라고.

하지만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좋은 해결책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고치고자 하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수동적인 태도는 버리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이진이 될 테니까!

‘미쳤어? 어쩌려고 이래. 정신 차려!’

한 톨 남은 이진의 이성이 혼자 달려나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정신이 들자 급격히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이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부끄러움을 중화시켰다.

그리고 이진은 이러한 과정을 벌써 몇 시간째 반복하는 중이었다.

‘너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전 형이 먼저 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그의 머릿속은 막힘없는 소설 공장이나 다름없었다. ‘만약에 승현에게 그 질문을 했더라면’ 이란 가정을 재료로 다양한 버전의 대답들을 무수히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들은 크게 희망 편과 절망 편, 그리고 현실 편으로 나뉘었는데, 희망 편을 떠올리면 자괴감이 들고, 절망 편을 떠올리면 우울해지며, 현실 편을 떠올릴 땐 갑자기 화가 났다 .

‘너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네? 형,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

이진의 머릿속에 사는 드래곤이 불을 뿜어 이번 소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선승현 이 자식은 상상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때 지잉.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방금까지 잔뜩 들떠 있던 이진은 찝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며칠 전 연습실에서 걸려 왔던 전화를 시작으로 이렇게 종종 전화가 오곤 했다. 기분 나쁜 것은 걸려 오는 전화가 모두 같은 번호라는 점이다.

‘번호가 유출된 건 아닌가 보지.’

이진은 아마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거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자주 연락하는 사람의 번호 대부분은 이미 전화번호부에 저장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수신 차단을 할까 싶어도 저번에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가 익숙한 탓에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연이 끊긴 친척일지도 모르니까. 아직 전화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뿐이지, 이진은 모든 인연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릴 작정은 아니었다.

‘너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형. 방 꼴이 이게 뭐예요. 고백이고 뭐고 더러워서 같이 살겠나.’

진지한 고민 중에도 불현듯 파고든 생각에 이진은 여태껏 빈둥대던 이불 위에서 일어나 누운 자리를 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 수치사 하느니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나았다.

오늘은 3라운드의 두 번째 편이 방송되고 딱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음방 무대를 마치고 휴가를 얻은 지는 나흘째로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휴일이기도 했다. 이진은 휴가 마지막 날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근데 내 방 별로 더럽지 않은데.’

빨래나 설거지는 그때그때 하고 빗자루질이나 걸레질도 주기적으로 한다. 조금 너저분해 보이는 건 방이 좁고 물건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바닥에 내려놔서 그런 건데……. 마음속으로 변명을 주절대던 이진은 발에 치이는 노트북과 겉옷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이진은 방을 청소하는 이유가 절대로 승현 때문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서포트 받은 물건들도 차곡차곡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까워서 손도 대지 못했지만 방송 중에 서포트 용품을 착용하면 좋아할 거라는 조언에 따라 이진은 다음 합숙에 들고 갈 옷과 신발을 따로 챙겨 뒀다.

적당히 손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마무리하려는 찰나, 지이잉 하고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진이 아까보다 조금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휴대폰을 노려봤다. 다행히 이번엔 모르는 번호가 아니라 주소록에 저장된 이름이 떠 있었다.

[유민주 작가님 윈올]

방송 초반에 얼렁뚱땅 저장한 번호들 중 하나였다. 초반에 방송에 대한 안내 사항을 듣거나 집합 장소에 대한 안내를 받을 때 외엔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 갑자기 온 연락이 생소하기만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진 씨. 혹시 따로 다니시는 샵 있으세요?]

“네? 아니요.”

굉장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이 치고 들어왔다. 이진은 걸레질하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잘됐네요. 지금 당장 시간 되시면 잠깐 강남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지금이요?”

[네. 숍에서 홍보 겸 협찬이 들어왔는데 일정이 꼬여서 원장님이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되신대요. 이쪽에서 딱 상위권 일반인 참가자분으로 콕 지목을 하셔가지고…….]

방송계에서 일정이 오락가락하는 일이야 허다하다. 이진은 마침 할 일이 없어 바닥이나 닦고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숍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카메라 앞에 서기 전, 평생 해 본 적 없는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게 되었다지만 숍이라는 건 조금 더 상위 차원의 이미지여서 적응이 필요했다.

“……누구랑 같이 촬영하나요?”

[우선 지금 가능하신 분이 승현 씨, 이제 연락드릴 분은 미열 씨랑 우진 씨예요.]

현재 남아 있는 인원 중 아예 소속사가 없는 참가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소속사의 존재감이 아주 흐린 참가자까지 포함하자면 여럿 있었지만 숍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꼭 맞는 참가자 명단은 몹시 짧았다.

[이 원장님 요즘 잘나가셔서 어지간한 신인 배우들도 제대로 약속 못 잡아요. 망설여지시더라도 스타일링 한번 받고나시면 오늘 나오신 거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솔직히 저희랑 계약한 코디들은 케어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봐 드리지도 못하니까…….]

“아,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승현 씨랑 같이 하는 게 좀 걸리시나요?]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저 지금 나갈게요.”

괜한 오해를 사기전에 이진은 얼른 확답을 주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정확한 장소와 시간이 적힌 문자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열에게도 연락이 왔다. 이진은 외출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미열을 적당히 무시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너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형이 너무 촌스러워서 제 급엔 맞지 않네요.’

머릿속으로 듣기 싫은 환청들이 들려왔다. 이진은 벌떡 일어나 짝! 소리 나게 제 양 뺨을 두드린 후 전투적으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강남에서도 유명한 동네에 자리한 숍, ‘뮤즈 드 라 뷰티’는 이웃에 위치한 유명 숍들에 비해 비교적 신생이었다. 주기적으로 거래하는 연예인들은 톱 급이 아니었고 그럭저럭한 위치에 만족하기엔 원장의 자존심이 셌다.

결국 어떻게든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원장이 스스로 발 벗고 나서 이곳저곳에 스타일링을 제안했는데, 제작비가 늘 부족한 드라마 업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뮤즈 드 라 뷰티’가 크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미운 백조 왕자’의 히트에서 시작된다. 드라마는 평범한 남자가 재벌 여자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스타일을 바꿔 나간다는 내용으로, 매 화마다 상황별 다양한 남성 패션으로 이목을 끌었다.

남자 주인공의 헤어, 메이크업을 전담한 뮤즈 드 라 뷰티는 이 드라마를 발판으로 실력을 입증했으나 대세 헤어 메이크업 숍으로써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선 다시 한번 화제몰이를 할 필요를 느꼈다.

윈올의 일반인 참가자들은 새로운 ‘미운 백조 왕자’였다. 비록 방송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꾸준히 관리를 받고 소속사에서 붙여 준 전담 스태프들이 따라다니며 사복까지 코디해 주는 대형 출신 참가자들에 비하면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본판 자체는 어지간한 배우들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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