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과해야 할 것이 있고 사과받아야 할 게 있는데, 승현과의 관계는 매번 이런 식으로 엇갈릴 뿐이었다. 무엇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미련만 켜켜이 쌓여 갔다.
이번에도 또 이렇게 되어 버린다면 이진은 정말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제일 화나는 점은 선승현이 이 말을 하면서 조금도 아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단 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진의 말을 듣고 잠깐 굳어 있다 이내 아주 살짝이지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뭘 쪼개.’
이진은 분노에 차 생각했다. 목이 콱 막혀 있지만 않았다면 그의 웃는 얼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터다.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현은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예능은 역할극이에요.”
“어쩌라고.”
“그냥 우리 둘이 사이 나쁜 척만 하면 된다는 거죠. 어차피 알아서 라이벌처럼 편집해 준다고 했잖아요.”
승현이 산뜻하게 말했다. 이진은 그의 말에 쉬이 공감하지 못했다. 편집으로 얼버무린다는 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대놓고 지금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시청자들에게 이게 모두 연출된 상황인걸 알려 주는 게 중요해요. 진짜 같아 보이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가짜도 섞여 있다고. 우리가 싸웠던 것도 어쩌면 연출일지 모른다고.”
카메라 앞에선 안 좋은 사이를 들통 난 척 연기하지만 뒤에선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인다. 이러한 온도 차를 이용해 시청자들에게 의심을 심어 준다.
한번 의심이 시작되면 그 뒤로는 더 바람을 불어넣을 것도 없다. 간단한 편집으로 화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조작될 수 있는지는 시청자들이 더 잘 안다. 그래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갈등을 수면 위에서 다룬다면 화해도 대놓고 해 버리면 그만이에요. 우리는 분명 싸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해서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다는 정도는 충분히 방송 스토리적으로 나쁘지 않고 스타 팩트의 요구 사항과도 어긋나지 않잖아요.”
참가자의 사생활을 마구잡이로 침범하는 리얼리티 쇼 특성을 살려서 화해 과정도 방송에 담아 버리면 된다. 이 프로그램은 아주 편리하게도 참가자들의 내면을 듣는 개인 인터뷰를 따로 촬영한다. 그때 참가자들은 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진심을 내비칠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친한 척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 ‘들키고 말아서 죄송하지만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나오다가 적당한 계기를 만들어 화해를 한다면, 둘 중 하나는 하차해야 한다는 내기를 자연스럽게 무효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더 자연스럽다 생각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진짜 관계를 상상하겠죠.”
“너무 무모해. 시청자들을 바보로 아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사람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여 주자고.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 주는 게 왜 안 돼요?”
안 되는 이유는 많았다. 우선 지금도 SNS까지 단속하는 제작진이다. 독단으로 일을 벌인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일반인 참가자를 밀어 준다 한들 이진과 승현의 투표수가 충분히 나오지 않는 이상 설득되지도 않을 것이다.
스타 팩트도 마찬가지다. 불법 경로로 유출된 영상을 풀어 가면서까지 덤벼들었는데 고작 캐릭터의 역할극 따위에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합숙에 들어가면 카메라가 사방에서 24시간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때에 따라 태도를 달리 한다는 건 사실상 촬영 중엔 그대로 절교하자는 얘기였다.
또 아무리 연기라 해도 서로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으면 결국엔 감정이 상할 것이다. 당장은 그러지 않을 확신이 있어도 그때 가면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정말로 시청자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진은 그 이유들 중 무엇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승현의 말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한 말에서 허점을 찾아낼수록 자신도 함께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자 승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와 이진의 어깨에 양팔을 걸었다.
“앞에서 싸우고 뒤에선 친한 척하는 거, 뭐 생각나지 않아요?”
이진이 눈을 크게 떴다. 곧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내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상황은 꼭 방송 초반 두 사람이 맺은 협정과도 꼭 닮아 있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정반대로 꼭 닮은 상황에 이진이 찌푸린 미간을 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진이 웃자 승현도 마주 보고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승현이 기분 좋은 모습을 봐도 이진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는 지금까지 프로그램이 정해 준 규격 내에서 움직였다. 아주 열심히 했지만, 사실은 수동적이었다. 프로그램 밖에서 인지도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아주 뒤늦게서야 미열이 만들어 준 SNS 계정을 서투르게 운영해 본 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분량을 얻고자 카메라를 보며 춤을 추고 웃긴 표정을 짓고 혼잣말을 하는 참가자들이 쌔고 쌨지만, 이진은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수세에 몰렸다. 비록 다소 잠잠해졌다고는 해도 승현과 이진의 내기는 시청자들에게, 특히 적극적으로 투표를 하던 팬 층에게 큰 충격을 입혔다. 두 사람을 한 그룹으로 데뷔시키려던 움직임이 컸던 만큼 충격은 더했다.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고루한 신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단 걸 이진도 알았다.
지금도 활발히 3라운드 투표가 진행 중이었다. 상위권 멤버들의 투표수가 주춤하는 만큼 하위권 멤버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선 21명 안에 들어야만 한다.
이진은 상위권 멤버들 중 개인 투표수의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정말 운이 좋지 않으면 이번에 잃어버린 화력이 돌아오지 않아 마지막 라운드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몰랐다.
“음…….”
이진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싫고 말고를 떠나서 정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큭큭, 입 안으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이 침묵하는 사이, 승현은 아무 말 없이 고민하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사실을 깊은 상념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끈질긴 시선을 자각하고 나자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친한 척이야 아니면 정말 친하게 지내자는 거야?’
이제 이진은 승현이 남긴 여지가 신경 쓰였다. 지금 당장은 서로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카메라 앞과 뒤에서 행동이 달라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둘 중 본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승현이 이진에게 보통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앞선 다툼으로 감정의 골이 해소가 되지 않은 지금,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무대 장치의 기계음, 요란한 공연 소리. 그런 것들에게서 단둘만이 유리된 듯 소음들은 전등과 함께 암전되고, 오직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와 은은한 달빛만이 남았다.
‘내가 미쳤나. 진짜 왜 이러지?’
아차, 싶었을 땐 이미 거센 물살에 휩쓸려 현실 감각이 마비되고 온통 혼탁한 기운이 스며들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진이 제 어깨에 둘러진 팔을 붙잡았다. 초여름의 꿉꿉하고 후끈한 공기가 숨통을 틀어막은 듯 서로의 호흡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마구 뛰어 대는 심장이 이진을 충동질했다. 비정상적이었다.
“승현아.”
이진은 자꾸만 가빠지려는 숨을 붙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이진은 더운 숨과 함께 그동안 꼭꼭 가둬 뒀던 말을 내뱉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요?”
“너는 왜.”
이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토해 낼까 말까, 결정적인 기로에 선 채 고민했다. 이 문장을 완성하고 나면, 다시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서 기인한 불안함이 이진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야, 선승현!”
그 순간,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투명한 유리 막처럼 이진을 둘러싼 꿈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현실은 잠깐의 머뭇거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가차 없이 밀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손으로 입을 막았더니 이진을 감싸고 있던 승현의 팔도 스르륵 풀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승현, 유이진! 너희 여기 있냐? 차 출발하겠다. 빨리 들어와!”
그들을 찾으러 온 미열의 목소리가 고작 몇 발자국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진은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심장을 잡기 위해 두 손을 입과 가슴으로 가져갔다. 승현은 슬쩍 눈을 내려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미열이 있을 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어, 금방 갈게!”
승현이 이진 대신 답했다. 미열이 무어라 구시렁거리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후 뱉어 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는데요.”
“그러게…….”
승현은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이진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으나 이미 깨져 버린 분위기를 도로 수습할 방법은 없었다. 아쉬우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순간의 충동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터벅터벅, 대기실이 있는 건물까지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였는데 이상하게 발이 느렸다. 앞에 걸어가는 승현도 이진에게 맞춰 천천히 걷는 건지, 아니면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흘러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진은 문득 발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고개를 들자 멀어져 가는 승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득 ‘놓친다’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 메우며 사고를 지배했다. 세상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승현이 두 눈에 담기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단 확신이 생겼다.
이진은 빠른 걸음으로 승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