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말 그대로예요. 안전사고로 욕도 먹고 슬슬 소재의 참신함도 떨어져 가는 것 같으니 제작진 측에서 무리수를 둔 거죠.”
“증거는? 심증 말고 물증이 있어?”
승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논리적 함정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프로그램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제작진에 대한 신뢰를 잃기엔 충분하다.
‘이 상황으로 이득을 보는 제3 세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참가자들의 신뢰를 잃더라도 그로 인해 볼 득이 더 클 거라 계산한 건지.’
이진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승현은 이진을 설득하고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물증은 찾아보기 시작하면 금방 나올 거예요.”
확신이 가득한 말투였다. 이진은 순간 그가 부모님의 재력을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래만 준다면, 제 힘을 믿고 까불던 오만한 이들을 더 큰 힘으로 눌러 줄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도 거대한 세력의 보호를 받은 적 없는 이진에게 작은 열망이 일었다.
그러나 이어진 승현의 말은 이진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지 못했다.
“문제는 지금 고발해 봤자 프로그램만 날아가고 우리에겐 득이 될게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따지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다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요. 당장 말해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이진의 전신에서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뿜어져 나왔다. 잘못한 사람이 있고 증거도 찾을 수 있지만, 그런다 한들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원통했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한다면 승현의 말이 맞았다. 제작진의 만행이 알려져 봤자 참가자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정의구현의 쾌감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프로그램이 중간에 망해 버리면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였던 참가자들은, 그리고 프로그램이 만들어 낸 형상의 참가자들을 좋아했던 시청자들의 관심은 여지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방송국과 참가자는 적보다는 동지와 가깝다. 한쪽이 진흙을 던졌다고 마주 서서 엿을 날릴 순 없는 것이다.
“그러면, 계속 이렇게 있어? 아까 이용하니 뭐니 말했던 건 뭐야?”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잡힐 듯 말 듯 눈앞에서 아른대기만 하는 게 답답했다. 승현이 분한 듯 숨을 씩씩 내쉬는 이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물론 당하고만 있자는 건 아니에요.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죠.”
“어떻게? 이젠 동정표 얻기도 글렀잖아.”
“우리는 처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돼요.”
처음의 제안. 폭로전의 시작이었던 승현과 이진의 싸움을 수면 위로 드러내 스타 팩트 측 비위를 맞추면서도 화제성을 높이자는 제안이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그건, 우리가 한 내기에 시청자들도 참가하게 될 뿐이잖아.”
“당연히 그걸 노리는 거죠.”
물론 사이좋아 보이던 동료의 물밑 신경전에, 둘 중 하나만 데뷔할 수 있다는 자극적인 내용이 방송 전면에 걸리게 된다면 인지도가 대폭 상승하긴 할 것이다. 평소 방송에 관심이 없던 일반인들도 장난 삼아 투표를 할 테니까. 이번 일로 마음이 상한 팬을 잠시나마 더 붙잡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진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우리 이후로 공격받은 애들의 공통점을 보세요. 제이슨을 제외하고는 전부 3대 기획사 출신이에요. 그 외에는 인지도가 낮아서 어차피 이번 라운드에 떨어질 애들이거나요.”
강재규, 허동규, 정하늘. 각자 루키, 피치, 바비 엔터 출신으로 2라운드에서 7위 내에 안착한 인기 멤버이긴 했다. 그러나 이진은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조회 수를 올리고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유명한 사람을 엮어 기사를 내는 게 이 바닥이다. 하물며 억지로 엮어 댄 것도 아니고, 유명인 본인에 대한 극비 정보가 있어서 사용을 했다는데 이게 대체 무엇을 증명한다는 걸까.
승현도 이진의 표정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이미지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제작진들은 처음부터 대형 출신 참가자들을 데뷔시킬 생각이 없었어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명함을 나눠 주던 남자. 무작위로 나뉜 포지션. 확연하게 차이나는 참가자들 간의 실력. 이진은 당연히 일반인 출신이 대형 출신을 빛내기 위한 들러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승현은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가능하면 일반인 출신, 연습생 경력이 있더라도 힘없는 기획사 출신으로 데뷔하기 적당한 참가자 목록을 추려 놨을 거예요.”
“대체 왜? 인기를 생각하면, 하늘이나 재규가 빠져야 할 이유가 없잖아.”
“걔네가 자기 기획사 애들로 멤버를 채워 버렸을 때 이득이 없으니까요.”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그룹은 이익 관계에 따라 대략 세 곳과 지분을 나누게 된다. 첫 번째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방송국. 이들은 음원 저작권료부터 시작해 각종 그룹 활동 수익의 일정 퍼센트를 가져간다.
두 번째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선택하게 될 기획사로 그룹 활동의 구체적인 기획을 함께하게 된다.
세 번째는 참가자가 본래 소속되어 있던 소속사로 각자의 계약에 따라 개인 몫으로 떨어진 정산금을 일정 분 나누어 갖거나 개인 활동을 주관하여 수익을 얻는다. 물론 이전에 소속된 곳이 없었다면 정산금은 온전히 개인에게 떨어진다.
이렇다 보니 데뷔 후에도 세 회사의 힘겨루기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방송국에선 차후 벌어질 파워 게임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기 위해 미리 대형 기획사의 손발을 묶어 두려는 것이다.
유명한 연습생 이미지를 빨아서 화제성은 얻되 그들을 끝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다. 이게 방송국의 입장이었다.
“이상하게 우리한테 편집이 관대하다 느낀 적 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꼭 우리한테만 그런 건 아니었잖아.”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붙여 주면서까지 띄워 주려 노력한 건 몇 안 돼요.”
승현의 시니컬한 말에 이진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이진은 첫 방송을 보고 자신이 남들 눈에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조금은 긍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사랑스러운 이진은 모두 편집의 힘으로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이건 선승현 뇌피셜인 걸로 하자.’
승현은 이진을 잘 알지만 제작진은 고작해야 카메라로 관찰한 게 전부다. 그들이 느끼는 이미지대로 편집 좀 잘 해 줬다고 편애라고 할 것까지야. 좀 과하게 순수하고 속 깊은 모습으로 나오긴 했지만 이진은 원래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다.
“잠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표정이 그래요?”
“내가 뭐? 내 표정이 어떻다고?”
“완전 불만 있는 표정이잖아요.”
“아닌데? 완전 아니거든?”
“형 안 믿어요. 지금 발뺌하고 나중에 가서 또 뭐라고 할 거잖아요.”
승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실직고하라 달달 볶아 댔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운 기억을 어떻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이진은 입을 굳게 다물고 승현이 기대어 있는 나무를 발로 뻥 찼다.
“입 좀 다물어 봐.”
“다리 다친 사람이 이렇게 발로 폭력 쓰면 안 되죠.”
이진은 “주먹맛 좀 보여 줘?” 하고 말하려다가 대사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승현은 뒷목을 긁적이다가 한숨을 쉬며 저 멀리 무대 반대 방향을 바라봤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슬슬 일행에게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처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건 무슨 의미야?”
“어차피 제작진이 원하는 건 일반인 참가자들이 입지를 굳히고 대형 출신 세력을 약화시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용당한 거고.”
이제야 작금의 상황이 또렷이 이해됐다. 뿌연 안개가 걷히고 막연히 추측만 하던 것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끝에 이진이 마주한 것은 돈과 권력을 둘러싼 추한 욕망의 덩어리였다.
“그러니까, 우선은 제작진의 뜻대로 행동하자고요. 방송 이미지, 캐릭터, 분량. 뭐 하나 소홀하지 않게 잘 챙겨 줄 테니까. 우리한테는 그게 이득이잖아요.”
당연히 이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새우 입장에선 옳은 대처 요령이었고,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동료를 위해서도 이게 나았다. 적어도 승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계속 싸우고 화해도 못한 채로 이러고 지내란 말이야? 같이 데뷔도 못 하고?”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승현은 제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눈가는 버석하게 메말랐어도 이진의 목소리가 꼭 울 것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더없이 이성적이던 사고 회로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는 바짝 굳어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형…….”
“왜 불러.”
부끄럽게도 이진의 목소리는 본인이 듣기에도 몹시 울적하게 들렸다. 그리고 실제로 우울한 게 맞았다. 마치 사방이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함께 데뷔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은 둘째 치고 방송이 끝날 때까지 컨셉을 위해 다툼을 가장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 왔다.
이진도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지금, 승현과의 우정이니 뭐니를 따지며 한가하게 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화해는커녕 계속 오해가 쌓인 채로 마음 편히 말 한 번 걸지도 못할 거고, 당연히 지금처럼 사소한 일상을 공유할 수도 없다. 대화를 하려면 이렇게 구석진 곳을 찾아야 할 테니까. 마치 모르는 동네에 혼자 남겨진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답답하긴. 꽉 막힌 자식. 그냥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좀 해 보지.’
그의 탓이 아니지만 괜한 원망이 들었다. 여태까지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울컥 터져 나와 눈이 화끈거리고 목도 꽉 메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