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조차 귓가를 가득히 울릴 만큼 고요한 복도를 지나 웅성웅성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 건물 밖으로 이동하자 승현의 목소리는 한층 더 조용해졌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간단한 주의 문구만이 부착된 쇠 줄 너머에서 이곳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승현은 그들의 시선이 거슬리는지 다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그림을 기대하길래 저렇게 기웃대는 건지.”
“기대하긴 뭘 해. 그냥 TV 나오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한 거지.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며칠을 내리 가십에 휩싸인 탓인지 승현뿐 아니라 많은 멤버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거슬려 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예민해지는 이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진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진은 이곳이 아닌 외부인의 영역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시절의 자신이 얼마나 별 생각이 없었는지를 떠올리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면 제법 견딜 만했다.
“세상에 전부 형 같은 사람만 있으면 참 편할 텐데요. 그렇죠?”
승현이 불만스럽게 비꼬며 걸음을 멈췄다. 이진은 그의 뒤통수를 한 대만 때리고 싶었지만, 승현이 고개를 돌리고 마주 보는 바람에 덩달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코앞에는 무대 뒤에서 어슬렁대는 현장 스태프들이 있는데 갑자기 길 한복판에 멈춰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무언가 묘안을 떠올린 듯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원래 연예인이란 건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직업이잖아요.”
노래로 인정받고 돈까지 벌 생각뿐이었던 이진은 조금 생소한 눈빛으로 승현을 응시했다. 승현의 어깨 너머로 스태프들이 손짓하며 불러 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등 뒤로 찬우 일행이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도 들렸다.
이진은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까 안절부절못했으나, 승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는 외부 요소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계속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들은 우리가 친하길 바랄까요, 아니면 경쟁하길 바랄까요?”
“아마도 둘 다?”
이진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팬이라면 그들이 싸우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이 재미만을 쫓는 시청자라면 뭐라도 자극적인 전개를 환영하겠지. 불현듯 머릿속 한구석에서 해인의 충고가 떠올랐다.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세요.’
그가 말한 외부의 힘이 시청자를 말하는 거였나? 해인과 승현의 말이 겹쳐졌다. 차곡차곡 퍼즐이 맞춰지고 숨겨진 그림이 드러나듯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맞아요. 그러니까 아이돌 지망생으로서 우리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어때요?”
그러나 그에 이어진 결론은 이진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마 다 쌩 까고 좋을 대로 행동하자는 건 아니겠지.’ 하고 승현의 책임감에 대한 의심도 들었다. 문장만 놓고 봤을 땐 당연한 내용이었지만 상반된 욕구를 어떻게 동시에 충족시킨단 말인가. 이진은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무시로 일관한다면, 흥미가 식은 사람들에게서 더 말이 나오진 않겠죠. 당장은요.”
이진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여건 상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승현도 그 점이 신경 쓰이는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한 팔을 들어 이진의 어깨를 크게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왕이면 찝찝하게 뒤끝을 남기는 것보단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뭘, 이용해?”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이진이 조금 새된 소리를 냈으나 승현은 아랑곳 않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게끔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송국에선 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게 무슨…….”
“우리를 팔아넘긴 장본인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흠칫, 이진의 몸이 작게 튀었다. 승현의 팔 안에 갇혔기에 겉으로 티 나진 않았지만 승현에게는 이진의 당황이 또렷이 전해졌다.
“어휴.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합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행사 진행 봉사자들이 다 퇴근을 해 버려서요.”
길목 한가운데에 멈춰 있던 승현과 이진이 나란히 다가오자 초조하게 다리를 떨던 현장 스태프가 마중 나오듯 달려 나왔다. 무대 위에는 아직 제이슨 팀이 공연을 이어 가는 중이었는데, 그들의 무대가 끝나는 즉시 올라가게 될 예정이라 상당히 촉박한 기색이 느껴졌다.
“싸웠다더니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다 헛소문이에요. 스타 팩트 기사를 누가 믿어요.”
헛소문이라고 하기엔 유출 영상까지 증거가 빵빵한 기사가 버젓이 있었지만, 승현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예능 참가자들끼리의 다툼 같은 건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닌지, 스태프는 큰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진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고 죄다 튕겨져 나갔다.
‘팔아넘긴 장본인이라니 설마.’
정체불명의 카메라, 경로를 모르게 유출된 영상들. 얼마 전 느꼈던 형체 없는 오싹한 예감이 다시금 등을 타고 올라왔다.
‘방송국과 소속사, 언론사 사이의 기 싸움으로 만들지 마세요.’
해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분명히 보안 담당자도 현장 책임자도 있을 테지만 막상 일이 터지고 나자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함구했다. 애초에 누군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드디어 아귀가 맞았다.
참가자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여차하면 화제성을 위해 팔아먹기 위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선승현은 며칠 사이에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리고 제작진을 향한 불신은 승현을 향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이진도 해인에게 직접 도움을 구해 봤지만 이만큼 자세한 정보를 얻어 내지는 못했다.
이진은 눈을 들어 승현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진을 눈치챈 것 같았으나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미래에서도 방송국이 이런 수작을 벌였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대체 언제부터 제작진의 행각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슨 팀의 공연이 끝나고 1라운드 순위권 멤버들이 모두 모여 무대 위로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춤을 추느라 살짝 격해진 숨을 몰아쉬던 제이슨이 갑자기 우르르 나타나는 동료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전달받은 내용이 없는 터라 얼굴 근육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멤버들의 얼굴과 자신만을 잡아채는 손길에서 적당히 상황을 눈치챘는지 싫은 소리 없이 고분고분 따랐다.
“대전 시민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윈올 참가자 몇 분을 무대 위로 모셔 봤습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꺄아아!”
함성 소리에 담긴 열기가 피부로 닿아 왔다. 아이돌 지망생으로서의 무대 경험이 쌓인 이진이 느끼기로는 약간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곳곳에 원정 나온 팬들이 숨어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지역 축제다 보니 자식들의 재롱을 바라보듯 느긋하게 앉은 중노년 관객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장 존경하는 가수! 우리 젊은 친구들은 아는 트로트 가수 있어요?”
“어머니께서 강은실 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재롱 잔치 같은 장기 자랑의 행렬이 이어졌다.
“유이진 씨, 그게 굉장히 인기가 좋았어요. 노래방 애창곡 메들리! 한번 불러 주세요!”
체감상 한 백만 년쯤 전의 얘기를 꺼내니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이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다가 두어 소절 만에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요즘은 지역 축제도 촬영 영상을 실시간으로 송출해 준다. 무대 뒤 스크린에 붉게 달아오른 이진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 되고 사람들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다 같이 부릅시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관객들은 진행자의 손짓에 맞춰 이진과 함께 노래를 합창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이진이 노래방에선 듣기 힘든 고음을 시원하게 찍어 주자 관객석에서 만족스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감사함을 가득 담아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승현도 얼마 전 개사해서 불렀던 올드 팝송을 부르며 적당히 차례를 넘겼다. 승현이 노래를 부르자 상대적으로 젊은 목소리들이 꺄악 비명을 질렀다. 하여간에 요리조리 굴욕적인 상황을 잘도 피해 간다고, 이진은 속으로 불평했다.
사회자는 지역 축제의 유래와 역사, 의의 등을 소개하거나 윈올 참가자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해 가며 열심히 시간을 때웠다. 그들은 30분 즈음이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도착한 중견 가수에게 무사히 차례를 넘기고 내려올 수 있었다.
“넌 잠깐 나 좀 보자.”
“잠깐, 잠깐. 두 사람 여기서 이러는 건 아니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이진이 승현을 채 가려 하자 화들짝 놀란 강재규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적극적인 해명이 없었기에 같은 참가자들끼리도 루머를 진실로 믿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연히 재규도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고 알고 혹시나 벌어질 싸움을 말리기 위해 끼어든 것이었다.
“야, 야. 내버려 둬. 원래 이런 일에는 친구가 간섭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찬우는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핀트가 어긋난 소리를 하며 재규를 말리기 시작했다. 재규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찬우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 아니, 싸우는 건 말려야 할 거 아냐.”
“이런 싸움은 말린다고 되는 게 아니야. 더 타오를 뿐이지.”
“뭐래.”
이진은 찬우가 재규를 상대하는 사이에 얼른 승현을 끌고 대기실 근처로 나무 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순순히 끌려온 그를 나무에 밀어 붙이고 그 앞에 서서 다급하게 물었다.
“아까 한 말, 대체 무슨 뜻이야? 제작진이 우릴 팔아넘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