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사과할게요. 인기와 친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오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상황은 아니죠. 그냥 이진 씨 반응을 좀 떠본 거예요.”
상냥한 척 남을 시험하다니, 험한 연예계에서 살아남은 만큼 해인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진은 시험당했다는 생각에 불쾌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제시해 줄 해답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동경하던 아이돌의 인간적인 이면에 실망할 틈도 없었다.
이진의 희망을 담은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며 대답을 구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되죠?”
“아, 그 전에.”
해인이 손짓을 하며 질문을 막았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더 흥미가 돋은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우선 내가 왜 이진 씨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했는지부터 밝힐게요.”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단순히 이진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얼굴을 맞댄 지 고작 10분도 안 됐는데 번호를 따 가고, 갑작스런 부탁에도 흔쾌히 만나자고 찾아온다? 진심이라 믿기엔 너무도 작위적이었다.
“제가 올해로 딱 데뷔 7년 차예요. 나이로는 이제 막 서른 살에 접어들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아직 아이돌로도 한창 때라고 생각하지만 슬슬 새로운 분야로 손을 뻗어야 할 때가 온 건 사실이죠.”
짤막하게 프로필을 읊은 해인이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진의 고민 상담은 핑계고, 바로 이게 그의 본론이었다.
“지금 계획은 프로듀싱 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거예요. 회사에서 프로젝트 몇 개도 기획 중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전 이진 씨가 가진 재능이 참 탐이 나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아직 개인 활동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알아요. 이제 겨우 3라운드 끝났는걸요. 하지만 그룹 활동을 하면서 개인 활동이 불가능한건 아니잖아요. 미리 포석을 깔아 놓고 싶었어요. 이진 씨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저였으면 하네요.”
그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날렸다. 이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무릎 위로 고정했다. 옆에서 ‘장난 정말 안 받아주네…….’ 하고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이었다.
해인은 이진의 굳은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잠깐의 만남으로 이진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방송에선 마냥 순해 보였지만, 눈빛엔 제법 독기가 서렸고 하는 말들도 강단이 있었다.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세요. 방송국과 소속사, 언론사 사이의 기 싸움으로 만들지 마세요. 일을 이진 씨가 바라는 대로 해결할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어렵사리 들은 해인의 조언은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그 이상 귀찮게 굴 순 없었다. 어차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사람은 해인이 아니라 이진 자신이었다. 이진은 작은 힌트를 얻은 것으로도 감사했다.
무엇보다 연예계에 깊숙한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부터 들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는 말이 큰 위안이 됐다.
***
음방 하루 전엔 대전으로 공연을 갔다. 연속으로 살인적인 행사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던 터라 차에 실린 참가자들은 다들 기진맥진했다.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해인에게 조언을 들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참가자들이 공격을 받았다. 가장 큰 사건은 허동규가 고등학교 동창과 4년째 비밀리에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거였다. 그는 1라운드 합숙 중 밤늦게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달콤한 밀담을 나눴다. 그로 인해 데뷔도 전부터 연애라며 팬들로부터 많은 공분을 샀다.
정하늘을 비롯한 바비 엔터 출신 참가자들이 얼마 전 연습생 재계약을 했다는 사실도 까발려졌다. 사실상 윈올 데뷔 멤버가 되더라도 개인 활동에 더 주력하겠다는 신호였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분열되지 않는 온전한 한 그룹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자잘한 폭로가 있었으나 그들의 인지도가 낮은 탓인지 앞선 사건 만큼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이진과 승현의 다툼은 연이은 큰 폭로에 묻혀 흐릿해지는 듯했다.
“엄마!”
늦은 시각, 대전 축제에서의 무대가 끝나고 대기실로 찬우의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마침 나란히 팀 순위 1위, 2위여서 같은 대기실을 쓰고 있던 이진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우리 찬우랑 같은 방 쓰는 친구들 맞죠?”
덥석, 찬우의 어머니에게 손을 붙잡혔다. 찬우와 많이 닮았구나. 이진은 놀란 가슴을 누르며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이진은 찬우가 어머니에게 애틋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나 엄마랑 사진 찍을래. 한찬우 전용 찍사 어디 있죠?”
“누가 니 전용 찍사야!”
“히히, 월급 줄게. 빨리 찍어 봐!”
엄마를 번쩍 들어 올린 찬우가 쿵쿵 뛰어 대며 사진을 찍어 달라 안달 냈다. 오랜만에 엄마를 봐서 기쁜 마음은 알겠지만 아픈 분을 저렇게 들고 뛰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됐다.
“찍는다! 하나, 둘, 셋!”
“셀카 모드 누구야?”
찬우가 누구를 지목했는지는 몰라도 대기실에 모인 모두가 핸드폰을 꺼내 모자의 화목한 사진을 찍어 댔다. 장난기 많은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걸쳐서 사진을 찍었는데, 씩씩 장난스럽게 화를 내는 찬우를 보며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이좋은 모자는 전체적인 이목구비와 체형이 많이 닮아 나란히 서니 꼭 도플갱어 같았다.
“잘생긴 친구들, 우리 찬우 잘 부탁해요. 대전 놀러 오면 꼭 연락하고.”
오랜만의 재회에도 불구하고 찬우의 어머니는 밖에서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며 일찍 돌아가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애써 웃으며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온 찬우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게 마음을 아프게 해, 이진은 제 곁에 털썩 주저앉은 그를 위로하고자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어머니랑 사이가 좋네.”
“당연하지. 우리 엄만데. 이진이 너는 엄마랑 사이 안 좋아?”
“글쎄. 별로였지.”
이진이 과거를 회상하듯 말해도 찬우는 짧은 말에 담긴 속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위로하려던 시도가 갑자기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냥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픈 부분을 쿡 찌르는 바람에 이진은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후회하며 도로 입을 다물었다.
“맞다. 그래서 이진이 너 승현이랑은 화해했어?”
“……아니.”
찬우가 이진과 함께 영화를 봤던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왠지 그때 이진의 표정이 좋았던 것 같았기 때문에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진은 공방 무대가 끝나기 전까진 승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집중력이 흩어질까 걱정한 탓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무대를 무사히 끝내고 내려왔을 땐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이 폭로된 뒤였다. 이후로 일방적인 사과를 받기는 했으나 한번 벌려진 거리감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승현이 눈에 띄게 기분이 나빠 보이니 차마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다시 되새겨 보니 모든 게 이진의 잘못 같았다. 그냥 처음부터 편견을 갖지 말걸. 아니면 아예 미열과도 친해지지 말걸. 예민하게 굴지 말걸. 화내지 말걸. 그 내기에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말걸.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다.
“하아.”
이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오자 눈치가 조금 부족한 찬우도 자신이 주제를 잘못 택했단 걸 알아차렸는지 허둥거렸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최대한 심사숙고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 다리는 괜찮아? 난 팔에 딱지 생긴 거 간지러워 죽겠다.”
“아직 덜 나은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찬우는 그쯤에서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떤 화제로 말을 걸어도 끝이 없는 늪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멍한 웃음을 지은 채 굳은 찬우가 ‘역시 유이진이랑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선승현 정도뿐인가.’ 하고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은 줄도 모르고, 이진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걸 보니 엄마 생각이 덜 나나 보네.’ 하고 답지 않게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점점 수습하기 어려워질 즈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승현이 들어왔다.
“형, 우리 잠깐 다시 무대 올라가야 한 대요.”
“나?”
승현보다 연상이지만 한 번도 제대로 형 취급을 받은 적 없는 찬우가 먼저 대답했다. 그러나 역시나 돌아오는 건 차디찬 시선뿐이었다.
“당연히 이진이 형이지.”
“승현아, 너무하다.”
찬우가 서운한 티를 내자 승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야. 둘 다 가야 돼. 근데 찬우 형은 옆방에서 강재규랑 제이슨 데리고 같이 와.”
감히 형을 시켜먹는다고 투덜대는 찬우를 뒤로하고 이진은 승현과 함께 대기실 복도를 걸었다. 축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무대 자체의 시설은 좋아 깔끔한 환경에도 대기실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이진은 아닌 척 승현을 흘끔거리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오늘은 농담도 하고. 기분 좀 풀렸나?’
승현은 며칠 전부터 계속 기분이 안 좋았다. 노골적으로 티를 낸 건 아니었지만 줄곧 찌푸린 표정에 안 그래도 적은 말수가 소멸할 만큼 적어졌다. 그뿐 아니라 시시때때로 한숨을 푹푹 내쉬니 모를 수가 없었다. 연달아 일이 터진 탓에 승현같이 죽상을 하고 다니는 참가자가 많아서 유별나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희 올라가서 아마 무대 인사 같은 거 할 거예요. 다음 팀이 지각을 해서 한 30분 정도 시간을 때워야 한대요.”
“그렇구나.”
“행사니까 불편한 질문은 안 나오겠지만 오늘 사진이 찍혀서 시청자들이 우리 사이를 유추할 수는 있겠죠. 목격담도 많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