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02화 (102/173)

102화

“어제 수빈이랑 통화하던 거 들었죠?”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상하게 형한테만 자꾸 들키네요. 백미열도 이렇게 자세히는 모르거든요.”

사실 내 스토커 아니야? 승현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진은 굳이 반박하지 않고 그저 따라 웃었다.

“신발 잘 어울려요.”

승현이 이진의 새 신발을 눈짓하며 말했다. 팬에게 선물받은 새 신발이 더러워지는 게 아까워 연습할 때는 잘 착용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협찬 물품 홍보 촬영이 있는 날이어서 큰맘 먹고 신고 온 참이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승현은 촬영 전에 씻고 오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진은 그가 떠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조언을 구할 수 있을까요?]

***

강재규가 실내 흡연과 도를 넘는 수위의 욕설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 이쯤 되면 가장 먼저 터진 이진과 승현의 싸움은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연이은 악재에 촬영장 분위기가 우중충해진 건 당연지사였다.

루키 엔터는 제작진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제이슨 같은 경우 본인 행동 과실이 크기 때문에 소속사에서도 별말 없이 쉬쉬 했지만, 강재규의 논란은 애초에 영상 유출이 없었다면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수준이었기에 반발이 더 심했다.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지만 승현과 이진도 회의에 부름받았다.

“제작진에게 고의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고의성이라니요. 지금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어요? 누구 덕에 인지도를 얻었는데, 감히 어디다가 이래라저래라야?”

“계약서에 명시된 연습생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잖습니까!”

메인 피디와 루키 엔터 직원이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제이슨의 소속사인 비터리 엔터 직원은 질린 표정으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방송 내에서 악의적인 편집은 없었습니다.”

“유출된 영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접선하려고 계속 시도는 하고 있어요. 근데 저쪽에서 내건 조건이 말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끊이지 않는 언쟁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당사자가 부재한 회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적었다.

스타 팩트가 요구하는 조건은 간단했다. 하나, 여태까지 나간 기사 내용을 부정하지 않을 것. 둘, 스타 팩트가 후속 기사 취재를 요구할 시 최소 한 번은 응할 것. 셋, 윈올의 최종 데뷔 그룹의 정보를 한발 일찍 알려 줄 것.

그들은 자극적인 거짓 기사만 내놓는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 발버둥치는 듯했다. 그러나 다양한 기자들과 거래하는 방송국 입장에선 그들의 협박에 굴복해 공정한 정보 제공에 차등을 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하기엔 앞으로 어떤 악의적인 기사를 내놓을지 몰랐다. 자극적인 기사는 초반에 잠깐 시청률을 높일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심한 논란이 지속된다면 피로한 시청자들이 먼저 떨어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애초에 우리 연습생은 순전히 오해잖아요. 애가 금연 중이라 방 안에서 담배 좀 만지작거린 것 가지고.”

“카메라가 있는 데선 어떤 행동이든 조심해야죠. 그건 입소 서약서에도 적혀 있을 텐데요?”

“24시간을 한 달 내리 감시받는데 어떻게 사람이 매순간 긴장하고 있겠습니까? 애초에 보안 관리를 잘못한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다니요!”

결국 논란이 된 참가자는 다음 화가 방영될 때 개인 인터뷰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오해를 해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의 희생양이 누가 될지 모르는 판국이니 그다지 효과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나자 늦은 밤이었다. 제이슨과 재규는 소속사 차량을 얻어 타고 돌아가기로 했고, 남겨진 둘은 각자 택시를 탔다. 승현이 잡은 택시를 먼저 양보했기에 이진은 한발 먼저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약속 시간이 빠듯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진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집 앞 골목에 주차된 외제 차로 달려갔다. 차 내부는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절 이렇게 기다리게 한 사람은 이진 씨가 처음이에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홍서가 속한 그룹의 리더 강해인이었다. 이진이 조언을 부탁했을 때, 그는 메시지 유출을 우려하며 직접 만나자고 제안했다.

‘원래 우리들끼리 몰래 대화할 땐 다들 주차장에서 하고 그래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러더니 차가 없는 이진을 배려해 직접 운전까지 해 가며 낡은 집 앞으로 직접 차를 끌고 나왔다. 내심 부담스러웠지만 당장 급한 건 이쪽이었기에 그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조언이 무엇일지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어요. 혹시 우리 소속사에 관심 있어요? 역시 윈올 끝나고 솔로 준비하려고요?”

“네? 아뇨. 그런 문제 아니에요.”

“아, 아쉽네. 저희 대표님이 이진 씨 진짜 좋아하는데.”

해인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하는 말은 어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던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진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고 상황을 설명했다. 윈올 상위권 참가자 둘의 불화는 그간 연예계 뉴스에 여러 차례 보도되었던 터라 그 역시 대충 상황을 알고 있어 설명이 쉬웠다.

“한마디로 방송 화제성에 업혀 가면서 이미지 쇄신도 하고 싶다는 거네요.”

“네. 저랑 승현이는 이미 화해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둘 중 하나는 하차하게 생겼어요.”

“그러네요. 아무리 다음 주 방송에서 해명한다 해도 일이 커지니까 발뺌한다는 소리만 들을 테고, 두 사람이 쌓아 왔던 이미지가 회복되진 않겠죠.”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볍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네요. 확, 진짜 절교해 버려요!”

“네?”

“하하. 농담이에요.”

이진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해인은 이진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연예계 정상에서 7년간 버텨 온 짬이 있어서 그런가, 남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제멋대로인 성격이 오히려 자신감으로 비춰졌다. 묘한 매력이었다.

“뭐, 농담이긴 하지만 그게 진짜 해결책이기도 해요.”

웃음을 그친 해인이 진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이진은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이해가 잘 안 돼요. 전 승현이랑…….”

“이진 씨,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선택해야 해요.”

그러나 해인은 단호하게 이진의 말을 끊었다. 이진도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진 씨가 원하는 건 데뷔예요, 아니면 친구예요?”

딜레마. 어느 길을 선택해도 이진이 원하는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해인은 친절하게 현재 그들이 몰린 궁지를 깨우쳐 줬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방도가 있으리라 믿으며 나온 자리지만, 사실 이진도 알고 있었다. 양 갈래 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전 왜 이진 씨가 이 방송에 매달리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진 씨 정도 되는 실력이면 루머를 빌미로 자진 하차 하더라도 충분히 솔로로서 다시 설 능력이 있잖아요. 소속사에서도 어떻게든 좋은 조건으로 채가려고 난리일 텐데.”

모두 사실이었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는 그저 윈올에 참가할 수 있는 제2의 기회가 주어졌다고만 여겼다. 선승현을 이용해 더 위로 올라갈 생각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전부가 아닌 걸 안다. 윈올에서 데뷔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다. 굳이 이곳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데뷔하는 것보다 돈도 더 잘 받고 케어도 더 잘 받을 수 있어요. 작업들도 이진 씨 성향에 최대한 맞출 거고요. 이진 씨도 아이돌 노래 부르면서 아쉽지 않아요? 더 잘할 수 있잖아요.”

“……맞아요. 전 더 잘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보다 아마 혼자일 때 더.”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할 수 있다. 관객들의 함성도 나눌 필요 없다. 누가 더 잘났니 못났니 아군이어야 할 멤버들끼리의 신경전에 휘말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진은 한층 명확해진 시선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제 선택이니까 시작한 일은 제대로 끝내고 싶어서요.”

이진도 이미 여러 번 거듭해 고민했다. 제대로 된 출연료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릴 때, 팬들이 이진에게 바라는 모습이 실제 그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때, 진영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 떠났을 때.

그리고 승현과 싸우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할 때.

“데뷔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않아 깨질 팀 활동이에요. 보통 아이돌처럼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기획된 그룹은 아니니까요. 어차피 해야 할 솔로 활동을 조금 이르게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네, 알아요. 아이돌 활동이 끝난 뒤의 흐름에 별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매 순간 이진은 결국 윈올만큼은 분명한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선택의 기로를 맞닥뜨렸을 때 체념하고 포기하던 그는 이제 없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으니까.

이진은 처음으로 선택지를 쥐고 망설이고 있었다.

“언젠간 혼자가 된다고 해서 후회할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아요.”

후회가 모든 감정의 종착지가 아님을,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함을 배워 가고 있다. 이진은 더 나은 상황을 바랐기에 연예계 일에 더 노련한 해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흐음. 아직 어린데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네요.”

해인은 자세를 바꿔 팔짱을 끼고 좌석에 깊이 기댔다. 부끄러운 소리를 하느라 이진의 볼이 벌겋게 익었다. 분위기는 한결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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