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01화 (101/173)

101화

“이야, 유성 씨. 이건 진짜 소속사에서 예능 금지 먹을 만하다.”

“아니! 왜 우리 이진 씨한테 그러세요? 아주 고마우신 분이에요, 이분!”

젊은 MC인 세라와 화은이 이진을 두둔하고 나섰다. 시티 로열 멤버들도 조용히 유성을 한 대씩 때렸다.

“죄송해요. 별로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진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무례한 말에 물론 화가 났지만 왠지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뚱한 말투나 조용히 있다가 충격적인 말을 해 놓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사과하는 거 하며, 묘하게 주변에 녹아들지 못하고 붕 뜨는 점까지.

“이진 씨, 정말로 죄송해요. 사과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번호 좀.”

리더인 해인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시도를 했다. 이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가리켜 연습하러 돌아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들 보내 주려고 인사를 하는데, 해인이 이진을 붙잡더니 정말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순진한 이진 씨 꼬드기지 말아요!”

“아하하하! 제가 이진 씨한테 나쁜 물 들이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이진은 우선 전화번호를 찍어서 넘겨주고 대기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경선이 나서서 그를 붙잡았다. 마땅히 분량도 뽑아 주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시킨 게 미안했는지 경선은 마지막으로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반주도 없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은 곤란했지만, 얼굴을 비칠 기회가 절실한 신인에게는 상당히 큰 배려였다. 이진은 그녀의 배려를 받아들여 빌리빌런즈의 이별이란을 가볍게 부르고 대기실을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간 이진이 연습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승현도 돌아와 짐을 챙기고 있었다. 벽면 거울에 비치는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침울했다.

아까 전 엿들었던 통화가 생각났다. 고작 몇십 분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소용돌이치던 복잡한 감정도 어느새 잠잠해져 차분한 사고가 가능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제 어떤 해명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진과 승현 중 누구의 순위가 더 높은지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좋아하던 사람들은 흩어질 것이고 여태까지의 언행이 재평가 받을 것이다.

“미안한데,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조용히 짐을 챙긴 승현이 그렇게 말하고 곧장 연습실을 떠났다. 뚜벅뚜벅, 복도를 걷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조용히 눈치를 보던 멤버들이 슬금슬금 이진의 곁으로 모였다. 이진은 호기심 가득한 그들의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그만둘 생각이었어?”

“저게 언제야?”

“대체 왜 싸웠어? 승현이가 형한테 잘해 주잖아.”

그들은 궁금한 걸 우르르 쏟아 내며 이진을 닦달했다. 예상이 갔던 질문이었으나 하나같이 답하기 곤란했다. 이진은 피곤함을 숨기지 않으며 투덜대듯 말했다.

“승현이는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난 발뺌하려고 했지.”

“유이진 완전 얍삽한데?”

미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연히 내가 이길 생각이었지.’ 따위의 답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다들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진은 꼬이고 못된 심보를 가졌다. 재수 없는 선승현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라면 얍삽한 짓거리를 못할 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내가 못돼서 그렇지 뭐.”

“네가 뭐가? 너 정도면 엄청 순진하지.”

이진이 우울하게 구시렁거리자 궁금함을 해소하고자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던 놈들이 조금 기가 죽어 서로의 눈치만 봤다.

“아니야. 너희가 몰라서 그래. 그리고 그때는 욱해서 그런 거고 나중에 무르기로 했어. 우리 화해했단 말이야.”

“……싸웠단 게 너무 놀라워서.”

우진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미열은 두 사람의 불화를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화목한 한 팀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진의 긴 한숨을 마지막으로 승현이 없는 반쪽짜리 해명이 끝났다.

“그런데 선승현도 의외로 유치하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금은 카메라도 없는데 뭐 어때.”

현기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운을 띠웠다.

“솔직히 걔 그런 거 있잖아. 중립충 같은 거. 리더로서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결벽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좀 껄끄럽고 그랬지?”

“뭐야? 지금 카메라 없다고 뒷담 까는 거야?”

“이게 무슨 뒷담이야. 그냥 그렇단 거지.”

현기는 자신의 말에 아무도, 심지어 친하게 지내는 보원조차 동조하지 않자 끝에 가서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지긋지긋하다…….’

이진은 승현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일찍 귀가한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꾸역꾸역 남아 있었다. 솔직히 뒤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지 두렵기도 했다. 욕먹는 건 익숙하지만 이미 친해져 버린 상대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분간 인터넷 보지 마.”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미열이 충고했다. 그러나 이미 이진은 몇 시간 전부터 야금야금 SNS를 보며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올라온 서포트 인증 포스팅 밑으로 진실을 묻는 댓글들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제작진이 대응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진은 그 댓글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답을 남겼을 것이다.

그때 이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잉, 아주 오랜만에 진동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어딘지 눈에 익은 번호였다. 이진이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 미열이 손을 휘저으며 만류했다.

“번호 털린 거 아니야? 받지 마.”

“나도 방송 나오고 이상한 전화 많이 와.”

시티 로열의 리더인 해인에게 번호를 준 사실이 기억났지만, 그가 걸었다고 하기엔 아직 촬영 중일 테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이진은 약간의 찝찝함을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진이니?

그러나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이진은 깜짝 놀라 전화를 끊어 버렸다.

‘누구지?’

오늘 들었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전화번호처럼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사실이 이진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어떻게 유출되었는지 알 수 없는 영상들.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연이어 윈올 상위권 멤버 불화설이 터졌다. 이번에도 3라운드 펜션 배경의 파파라치 샷으로 제이슨이 진영의 캐리어를 발로 차고 밀어 넘어뜨리는 등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이번 사진은 폭력 범죄와도 연관되었기에 승현과 이진의 경우보다 여론이 많이 나빴다. 해외 촬영을 간 진영이 기사가 뜨자마자 곧바로 나서서 제이슨을 옹호해 주었기에 더 큰 이슈가 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사자 중 하나가 제작진의 제지를 받지 않는 진영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스타 팩트의 칼끝이 승현과 이진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안 참가자들은 뒤늦게 언제 어떻게 자신의 사생활이 폭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꽤 큰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팬 사이트나 SNS에 글을 올리는 것조차 보안 강화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어떤 불안 속에 살아가든 대부분의 대중은 ‘스타 팩트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며 일련의 사태를 흥미롭게만 바라봤다.

‘찔리는 게 있으니까 과민 반응 하는 거 아니야?’ 악의가 섞인 농담도 장난처럼 오고 갔다. 입 밖으로 말을 뱉는 건 늘 쉬웠다. 내 일이 아닌 이상 이슈에 한마디씩 보태는 건 너무도 가볍고 흔한 일이었다.

여론이 이렇게 안 좋은데도 참가자들의 스케줄은 일주일 내리 자잘한 행사들로 가득 찼다. 대학교 축제 시즌이라 기존 연예인들의 섭외가 어려워진 틈을 타 이리저리 돌려 대려는 심보였다. 덕분에 오전엔 연습, 오후엔 촬영, 저녁엔 행사를 다녔다.

쓸데없는 생각을 덜하게 된 건 좋았지만 운동량이 줄어들지 않으니 다리의 상처가 나을 틈도 없었다. 이진은 진통제를 먹어도 잊을 만하면 아파 오는 다리가 괜히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그 즈음, 시티 로열 리더 해인에게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시티 로열 강해인입니다~! 저희 멤버의 무신경한 언행을 사과드리고자 연락드립니다. 그와는 별개로 이진 씨같이 재능 있는 아티스트와 친분을 쌓고 싶기도 합니다. 부담 갖지 않고 편하게 연락 주세요:D]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지만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결국 잠시 답장을 보류하고 더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이진은 연습실 바닥에서 피곤에 전 표정으로 근육을 늘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승현에게 다가갔다.

“승현아, 혹시 가족들이 많이 걱정하셔? 별일 아니었다고 설명드리고 싶은데.”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저 또 쫓겨나서.”

“뭐? 또?”

승현이 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은 자식을 뭐 이렇게 수시로 내쫓는단 말인가. 이진은 조금 화가 나서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곳은 있어?”

“어제는 그냥 모텔로 갔어요.”

미열에게라도 신세를 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현은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린 이진을 보더니 작게 덧붙였다.

“다른 애들한텐 비밀이에요.”

이진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너그럽게 웃으며 다시 방구석을 내줘야 할까? 하지만 승현이 원치 않을 것 같았다.

승현은 지금 외에도 한 번씩 이렇게 이진에게만 비밀을 털어놓곤 하지만, 이진이 그 이상 개입하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승현이 이진의 가족사를 눈치채고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것처럼 그에게도 그런 조용함을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해요.”

그때, 승현이 돌연 사과했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렇게 자주 싸우고 자주 화해했으니 당연했다. 이보다 더 싸우다가 주고받는 진심들에 무감각해질까 걱정이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거 말고요. 가족 일로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요.”

그러고는 수그렸던 몸을 일으켜 벽에 상체를 기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이 그를 따라 벽에 기대었다. 그 역시 이 상황이 힘들고 두려웠지만, 승현은 고작 이틀 만에 많이 지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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