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이진은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미친 듯이 팔다리가 떨려 왔다. 승현에게 인정받느니 뭐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
“응. 뭐 음료수라도 사 올까?”
미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진은 자신의 불안을 멤버들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연습실을 나와 머리를 식힐 만한 곳으로 향했다.
때마침 근처에 휴게용으로 사용되는 작은 테라스가 있었다. 흡연 구역이라 조금 냄새가 나고 더럽긴 하지만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기엔 좋은 장소였다. 방송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 구역은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뒀다 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날 걱정도 덜 수 있었다.
“……다 오해라니까.”
그러나 홀로 바람을 쐴 수 있으리란 이진의 기대가 무색하게, 테라스에 가까워질수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온 손님이 있는 것이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이진은 몸이 보이지 않도록 코너에 등을 기대고 열린 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맞기로 했다. 남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것은 미안하지만 이진은 자신의 사정이 더 급했다.
“증거는 무슨 증거.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잠자코 진정하고 있으려니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처음에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누가 들을까 의식한 탓에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승현의 목소리였다.
오늘 올라온 기사로 인해 누군가에게 닦달을 당하고 있는지 연신 짜증을 내며 몇 번이고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답답한 심정이 벽 너머에 있는 이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고 테라스를 훔쳐봤다. 난간에 기대어 전화를 하는 기다란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안심이 됐다. 숙소에 제작진이 설치한 게 아닌 카메라가 있었다고,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안한 속마음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었다. 이기적인 생각이란 건 이진도 잘 알았다. 하지만 당장 믿고 기댈 수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꾸 승현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 날카로운 목소리가 발끝을 잡아챘다.
“선수빈, 쓸데없는 말하지 마. 형이랑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 아버지한테 말해서 어쩔 건데?”
승현을 곤란하게 만들던 상대방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이진은 그제야 승현의 뒤에 버티고 선 가족들을 떠올렸다. 혼자인 이진과 달리 그에겐 해명해야 할 상대가 많았다. 특히 동생이 윈올을 열심히 본다고 하니 충격받을 만도 했다.
“이진이 형 그런 사람 아니야. 나도 오해한 거야.”
거기까지 듣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는데도 기척이 느껴졌는지 승현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잠깐만…….” 하며 말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도망치듯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자신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승현의 여동생과 수줍게 호감을 표현하던 남동생이 떠올랐다. 생전 처음 받는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애정에 그가 세웠던 단단한 벽은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손쉽게 허물어져 녹아내렸었다.
그래서 그날 이진은 승현과 잘 지내보자고,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게 혼자만의 다짐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진은 단 한 번도 승현에게 무엇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승현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했다. 쉽게 해선 안 될 말들도 했다.
이진이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 왜 변하게 되었는지 승현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갑자기 진지하게 나오는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이제 어떡하지.’
정신이 멍했다. 이진은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다가왔다가 제멋대로 실망한 채 떠나 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팬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들도 이젠 떠나갈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게 너무도 막막해졌다. 그리고 승현처럼 오해를 해명할 수 있는 상대가 자신에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슬펐다. 아주 오랜만에 그와 자신의 격차가 선명히 보였다.
무작정 걷다 보니 연습용으로 제공된 장소를 벗어나 다른 예능 촬영을 준비 중인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방송국 스태프들이 내부 세트장을 설치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문 앞을 막듯이 서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이진을 다른 이들도 알아보았다.
하루 종일 연예인을 보는 게 업인 사람들인지라 갑자기 나타난 이진을 보고 놀라진 않았지만, ‘네가 왜 여기 있어?’ 하고 눈빛으로 물어왔다. 각자 할 일에 바쁜 와중에도 불청객을 바라보듯 향해 오는 시선이 당황스러웠다.
“어? 유이진 씨?”
그때 누군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진은 바짝 긴장한 채로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아, 저기 사용 중이라더니 윈올 촬영 중이였구나.”
“어떡해, 3라운드 우승했나 봐요! 스포당했네!”
거기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미소 짓고 있었다. 3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척 봐도 남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이진은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익숙했다.
빌리빌런즈. 이진이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의 원곡 가수로 이곳은 SSTV 인기 예능 프로 ‘악녀들의 빌리지’의 촬영 현장이었다.
“헉, 안녕하세요.”
“헉. 유이진이 헉 했어!”
“우와. 안녕하세요.”
그들은 놀랄 만큼 반갑게 인사를 해 주었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다섯 쌍의 눈동자가 이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미진, 경선, 지희, 세라, 화은……. 얼굴과 한 번에 매치되지는 않지만 익숙한 이름들이 그들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진은 제 발이 저려 저도 모르게 변명을 주절거렸다. 얼른 사과하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죄송해요. 제가 방해했네요. 그, 길을 잃어버려서.”
“길을 잃어버려요? 여기서?”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만난 김에 잠깐 카메라에 얼굴 좀 비추고 가요.”
그러나 숙련된 중견 예능인들은 시청률을 화끈 올릴 법한 화제의 인물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가장 연차가 오래된 코미디언이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살가운 태도로 팔을 꽉 잡아당기는 통에 이진은 도망가지도 못했다.
‘아직 세트장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디를 간다는 거지?’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하며 떠올린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됐다. 맞은편 출연진 대기실에선 이미 사전 촬영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어? 떡볶이 사 오신다는 분들이 어디서 남자를 데려오셨어요?”
“유이진 씨네? 뭐야. 왜 윈올 멤버를 데려오고 그래요?”
대기실 문을 열자 보이는 얼굴들은 이진에게도 익숙했다. 윈올의 멘토이자 사회자로 여러 번 얼굴을 비췄던 홍서와 그가 속한 아이돌 그룹 ‘시티 로열’ 멤버들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던 것이다.
갑작스런 이진의 등장에 시티 로열 멤버들은 놀랍고 신기해했다. 당연히 이진은 그 다섯 명이 놀란 것을 합친 만큼이나 놀랐다. 평소 호감을 가지고 응원하던 그룹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에 대한 악의적 기사가 올라온 날에.
“이진 씨,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그나마 안면이 있는 홍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진은 그의 배려에 감사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시티 로열의 리더이자 최고 연장자 해인도 이진을 아는 듯 몹시 반가워했다.
“이게 무슨 인연이에요? 오디션에서 빌리빌런즈 노래 불렀었죠? 우리 조만간에 있을 자선 콘서트에서 빌리빌런즈 분들이랑 무대하기로 해서 모인 거거든요. 딱 다섯 명씩이니까 파트너로 춤추고, ‘이별이야’ 부르면서.”
“형, ‘이별이야’는 우리 노래고 빌리빌런즈 노래는 ‘이별이란’이에요.”
해인은 홍서가 실수를 지적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빌리빌런즈 멤버들에게 사과했다. 카메라 앞의 과장된 행동임을 알아도 가벼운 실수에 쩔쩔 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다들 깔깔 웃어 댔다. 이진도 우울한 기분을 잊고 입꼬리에 살포시 미소를 띠웠다.
“어, 웃었다. 웃으니까 더 잘생겼네요.”
허허 웃으며 계속 굽신대던 해인이 이진의 표정을 힐끗 살피곤 툭 내뱉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상한 말이 나온 것 같은데? 이진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이분 멘트 치는 게 수준급인데? 또 누굴 홀리시려고!”
“이진 씨, 정신 차려요!”
이진과 가까이 있던 미진과 경선이 어깨를 잡고 상체를 흔들었다. 이진은 한 발 늦게 해인의 예능 캐릭터가 아무에게나 설레는 말을 일삼는 카사노바, 즉 바람둥이임을 깨달았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 반응 진짜 신선하다. 일반인보다 더 일반인 같아요.”
“그러게. 신선하고 귀엽네.”
“형, 제발! 형이랑 여섯 살 차이 난다고요!”
“아니, 그 전에 남자거든요? 이상하게 편견이 없으시네!”
아무 말 못하고 굳은 이진을 보며 방송 경력 최소 7년 차들이 즐거워했다. 자신을 두고 벌어지는 콩트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동안 한마디도 안 하고 잠자코 있던 유성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집중을 끌었다. 그는 시티 로열의 메인 보컬이자 이진이 평소 동경했던 인물로, 두 살 연상이었다.
“그런데 저 질문 있어요.”
“유성 씨, 제발 이상한 말만 하지 마세요.”
“아, 그럼 안 할게요.”
미진의 경고에 유성이 손을 슬쩍 내렸다. 다시 한바탕 기계적인 웃음이 지나가고, 유성에게 발언권이 돌아갔다. 이진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서 귀를 기울였다.
“윈올 하차하면 우리 소속사 안 올래요? 어차피 선승현 씨랑 한 내기에 승산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 대표님이 이진 씨 좋아해요.”
그러나 유성은 태연한 얼굴로 화기애애한 대기실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것도 우연히 함께하게 된 특별 게스트 이진을 겨냥해서. 당연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행히 MC들이 그간 온갖 무례한 말을 처리해 본 노하우로 쓱싹 정리해 주긴 했지만, 이진은 갑자기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