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도착한 곳은 외지고 어두침침한 회의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동그란 타원형 테이블에 여러 제작진들이 모여 있었다. 몇은 서 있고 몇은 앉아 있는 게 정식 회의는 아닌 모양새였다.
“어, 왔어?”
그들의 중심엔 메인 피디가 있었다. 그는 매 촬영마다 제작진과 참가자를 통솔했지만 막상 사소하게 부딪힐 일이 없어 멀게만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간단한 의사 전달도 스태프를 통했기 때문에 이진은 그가 권위적일 것 같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불려 와서 당황스럽지. 우선 앉아.”
“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사용했다. 이진은 슬쩍 눈치를 보며 승현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프로그램의 핵심이자 주축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진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하는 듯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몇 분 전에 기사가 떴어요.”
“아니, 그 전에. 우리 촬영분이 유출이 됐어. 범인은 수색 중이지만 내부 소행이라고 보는데 증거는 없고.”
이진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제작진, 조연출이 태블릿을 내밀며 말했다. 메인 피디는 조연출의 말을 끊고 앞선 상황을 설명했지만 승현이 태블릿을 가져가 확인하는 걸 막지는 않았다.
“이건…….”
“기자한테 연락이 오긴 했는데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 더 곤란해. 그쪽은 자기들이 쓴 소설을 특종을 잡은 것처럼 말을 맞춰 주길 바라거든.”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액정을 바라보며 기사를 읽던 승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진은 피디의 말이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이곳에 불려 온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우리가 말을 맞춰 주지 않으면 유출된 미공개 영상을 인터넷에 풀 거라는 뜻이지.”
“형, 우선 이것부터 읽어 봐요.”
승현이 이진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노골적으로 관심을 끌기 위한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제목 바로 밑에는 밤에 찍은 듯 어두운 사진이 여러 장 첨부되어 있었다.
[단독] “윈올 유이진, 선승현 불화” 상위권의 내분? 탈락자曰, 모두 알면서 숨겨 주던 것…….
[star fact=김준형 기자] ;“사이좋던 것은 가식. 가면 뒤 숨겨진 진실은…… 절교 선언”
SSTV의 인기 예능 Winner Takse All(이하 윈올)의 인기 출연진 유이진과 선승현의 언쟁이 포착됐다. 일주일 전, 경기도의 한 펜션 타운에서 윈올 촬영 진행 중 두 사람이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제보를 입수했다.
(사진=스타팩트 DB)
한밤중 두 사람이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해 비밀리에 언쟁을 벌였다는 것. 두 사람은 평소 깊은 동료애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으나 전부 방송에서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고 실제로는 “함께 데뷔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원수”라는 것이다.
이에 스타팩트는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취재에 착수했다. 윈올의 참가자들에겐 기자의 접근이 불허됐지만 2라운드 탈락자를 만나 인터뷰를 받았다.
탈락자 A씨는 “그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으며 수시로 싸움을 했다. 출연자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유이진이 선승현을 구하다 부상을 입었다고 했으나 그것은 핑계일 뿐 악화된 관계에서 벌어진 몸싸움의 결과인 것 같다.”고 하며 윈올 세트장 사고의 진위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했다.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스타 팩트는 제보자를 통해 윈올의 미방영 촬영분 일부를 확보했으며 조만간 제보의 진실 여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형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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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첨부된 사진은 3라운드 촬영 중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승현과 이진이었다. 여러 장의 사진에는 승현이 이진을 뿌리치고 떠나는 장면까지 빠짐없이 찍혀 있었다. 어두운 사진을 보정해 화질이 좋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인지 쉬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무슨……”
“문제는 얼마만큼의 분량이 유출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무시로 일관하기에는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고.”
파파라치. 그때 파파라치가 숨어서 이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전부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이진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기사에서 말하는 걸로 봐서는 두 사람의 사적인 대화가 담긴 영상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때 단독 행동하고 싸우다가 이런 모습 찍힌 것도 두 사람한테 어느 정도 책임이 있고.”
선명한 악의가 이진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이들은 지금 촬영본이 유출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승현과 이진을 불렀다. 정확히는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 위한 희생양으로 두 사람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이진의 상상으로는 구체적인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지만, 조금의 유감도 표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서 본능적인 역겨움이 밀려왔다. 이진이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승현이 가볍게 책상을 치며 말을 꺼냈다.
“그때 분명 카메라 꺼진 걸 확인했는데 이 장면이 유출됐단 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건…….”
“1라운드 무대 끝나고 우리 방은 촬영 중이 아니었어요. 애초에 유출될 파일이 없을 텐데 어떻게 사적인 대화 내용을 알 수가 있죠?”
“……정확히 어떤 경로로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는 우리도 몰라요.”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보안을 그리 철저히 한다면서 막상 유출 사고가 생겼을 때 유출 경로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그 후폭풍을 참가자에게 지우려는 속셈이 이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인해 뒷목에서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이진은 흥분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벌써부터 주먹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좋게 생각하면 두 사람한테 쏠리는 화제성은 지금의 몇 배 이상일거야. 이번 기회만 잘 잡으면 정하늘도 누를 수 있지. 둘을 라이벌 구도로다가 잘 해 가지고, 응? 제대로 편집해 줄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피디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피했다. 옆에 선 조연출이 진정시키고자 무어라 말했지만 이진은 오히려 벌떡 일어나 피디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라이벌 같은 소리 말고 똑바로 책임져 주셔야죠. 적어도 저랑 얘가 싸우다가 다친 건 아니잖아요. 누가 이런 소문을 내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믿고 여기서 더 촬영을 하라는 거예요?”
“이봐요, 유이진 씨. 지금 하차 가지고 나 협박해? 지금 유출된 게 내 탓이야?!”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저나 얘가 아니라 당연히 피디님이죠. 그러라고 있는 책임자 자리잖아요.”
이진이 기세에 눌리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자 뒤에 도열해 있던 사람 중 누군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
“당돌하네. 쉽게쉽게 못 가겠구만. 누가 적당히 회유하면 될 거라고 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미열과 이진을 캐스팅했던 남자였다. 여태까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는 현장에 발걸음을 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인 걸로 보였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방송에서 볼 땐 순하더니만 보기보다 성격이 세네.”
“협상을 하려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도 제시하셔야 하는데, 이건 뭐 덤터기 쓰기나 다름없으니 화나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승현까지 일어나자 여태까지 앉아 있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참가자와 제작진, 기묘한 대치 상황에 결국 메인 피디가 박수를 짝짝 치며 주목을 끌었다.
“우선 그쪽이랑 조금 더 소통을 해 볼 테니 경과를 지켜보자고. 두 사람도 그 전까지 허튼짓하지 마시고.”
그러나 다음 날이 되어도 상황은 더 악화되어만 갔다.
대체 어떻게 얘기가 오고 간 건지, 스타팩트 측에서 새로운 기사와 함께 교묘하게 편집된 영상을 올린 것이다.
-나는 가까이 지낼 생각 없었어. 그럴 여유 없어.
-너랑은 잘 맞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널 좋게 볼 이유도 딱히 없지 않았니?
-미안하지만 너랑 같이 있는 매 순간이 스트레스였어.
-불편해.
영상은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지만 이진의 목소리만은 아주 선명하게 울렸다. 이진의 평소 말투가 느긋하고 차분했기에 영상 속에서 이진이 얼마나 날을 세우고 쏘아붙이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면 하나 내기해요.
-내기?
-만약 우리가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아서 같이 데뷔를 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팀을 떠나는 걸로.
-떠나는 사람은 어떻게 정할 건데?
-공평하게 순위가 낮은 쪽이 떠나면 되겠죠.
영상은 이진이 승현의 내기에 응하는 부분에서 끝났다. 연습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팀원들은 음방 무대를 대비해 자발적으로 연습실에 모였으나 모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뜬 기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동료들의 사적인 대화가 강제로 들춰져 온 천하에 퍼졌다. 당황스럽고 민망했지만 가장 곤란해할 피해자 둘이 코앞에 있으니 이렇다 할 티도 내지 못하고 고생이었다.
게다가 그저 사이가 좋은 줄로만 알았던 이진과 승현 사이에 저런 대화가 오갔으리라고는 감히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 속내는 모른다지만, 거의 24시간을 붙어 있던 이들이 뒤에선 그런 내기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약간의 배신감도 들었다.
이진은 동료들의 미묘한 기류 속에서 홀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승현은 기사가 뜨자마자 어디론가 전화를 걸러 나가 버려서 이진은 정말로 혼자였다. 홀로 연습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기사의 반응을 읽었다. 그런데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twe******
2016. 5. 22. 11:03:27
아니 근데 저건 대체 무슨 카메라임? 여태까지 방송 전부 씨씨티비 샷이었는데 왜 저것만 다른 카메라야? 옆에서 누가 찍고 있는 것처럼?;;;
이진도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영상을 다시 돌려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랬다. 참가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기숙사 내부 카메라는 모두 천장에 붙어 있었는데, 기사에 첨부된 영상은 사람의 눈높이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시점에서 촬영된 것이다.
당황한 이진이 몇 번이고 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원인을 찾을 때, 미열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이진아, 그만 우울해해. 이것도 그만 보고.”
“그게 아니라…… 영상이 조금 이상해서.”
“조작 같다는 거야?”
처음 소식을 들은 미열은 어떻게 이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수 있냐며 승현에게 화를 냈지만, 다행히 이진에게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말없이 심란한 얼굴로 연습실 안을 서성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혼자 구석에 쭈그려 앉아 동영상만 보고 있자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이진이 미열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영상 각도가 이상해. 원래 카메라 위치에서는 이런 각도가 안 나올 텐데.”
“어, 듣고 보니까 그러네.”
혹시 댓글을 보고 자신이 지나친 생각을 한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미열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표정을 싹 굳힌 미열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거 설마…… 우리 모르게 다른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던 건가?”
정체불명의 카메라, 경로를 모르게 유출된 영상들. 이진의 뇌리로 오싹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