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97화 (97/173)

97화

아무런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의심의 시작은 복도를 걸으며 오늘 처음 승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근 일주일가량을 서먹하게 지내던 터라 이제 이진은 가볍게 눈이 마주친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승현은 아무렇지 않게 이진을 무시했고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승현이 수상하게 눈을 피한 것이다. 무시하는 것과 수상하게 눈을 피하는 것에 차이를 설명하긴 어려웠다. 이건 순전히 직감이 보내는 신호였으니까.

‘선승현 저 자식 조금 수상한데.’

분명 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던 놈이 갑자기 오늘따라 수상하게 군다. 그 말인즉, 바로 오늘 승현에게 켕기는 구석이 생겼다는 뜻이다.

오늘 있던 사건을 주르륵 떠올려 봤다. 무대 리허설, 무대 의상 피팅, 서포트 인증 촬영 말고는 기념할 만큼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앞의 두 경우도 딱히 승현과 얽히지 않았으니…… 의심 갈 만한 건 마지막, 이진의 서포트였다.

범위가 좁혀지고 나니 추리 과정은 간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진이 서포트를 받으며 석연찮게 느끼던 구석이 있었다. 바로 초기 계획과는 차원이 다르게 값비싸진 서포트 용품들이다. 그걸 구매하기 위한 돈이 다 어디서 왔을까?

‘선승현이 남아도는 돈이 좀 있는 것 같았지.’

이진의 팬 사이트에서 한창 서포트 모금을 받을 때, 승현은 그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고 그 뒤로도 둘 사이는 한동안 아주 좋은 편이었다. 선승현이 이진에게 은혜를 갚겠답시고 서포트 모금에 거액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너무 과대망상일까.

“형, 무대 설명이요.”

“아. 미안.”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승현의 컨셉 설명이 끝난 모양이었다. 세 사람의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는 영상이라 다시 승현이 카메라를 보고 대사를 쳤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보여 드릴 곡 ‘너와 첫 데이트’는 이번 라운드의 주제인 첫사랑을 설렘으로 표현한 곡입니다. 무대를 감상하시는 분들이 첫사랑의 설렘을 함께 느끼실 수 있도록 준비해 봤는데요.”

승현이 거기까지 말하고 이진을 흘끔 바라봤다. 마치 음악 방송 MC들처럼 문장을 이어받으라는 신호였다. 즉석에서 나온 것치곤 나쁘지 않은 멘트였지만 사전에 합의도 없이 뒤를 이으려니 이진에겐 제법 난이도가 높았다.

“아, 그러셨군요.”

“풉.”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이진 때문에 우진의 웃음보가 터졌다.

“아니, 네. 맞습니다. 저희가 그랬죠.”

“네. 저희가 그랬어요.”

이미 한번 NG를 낸 적 있는 이진은 자신의 헛소리를 황급히 수습했다. 승현도 한마디 거들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뮤직비디오에서 전달된 설레는 첫 데이트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무대만의 매력을 보여 드리고자 동선 수정에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간신히 대사를 치자마자 미열이 깐족거리며 끼어들었다. 이진은 순간 미열의 얄미운 입을 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이다음에 뜬금없이 웃긴 일화를 말해야 하는 고충을 생각하며 화를 참았다.

“여러분. 방금 첫사랑이 어쩌고 설렘이 어쩌고 했던 이 두 사람은 사실 모태 솔로입니다. 믿지 마세요! 자세한 건 본방 사수!”

“악!”

“……백미열. 네 과거사도 다 털어 줘?”

갑작스럽게 이어진 미열의 폭로에 현기가 익룡 소리를 내며 빵 터지고 승현이 화난 척 농담을 받았다. 그러나 이진은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어퍼컷에 그저 입만 쩍 벌리고 뺨 위에 양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흡사 뭉크의 절규 같았다.

***

대망의 무대 당일이 밝았다. 오늘은 공방날이자 3라운드의 첫 번째 방영일로 오늘부터 다시 인터넷 투표가 열린다. 이제 시작인 시청자들과 달리 참가자들은 3라운드가 방영되는 2주 동안 투표가 종료되기만을 기다린다.

28명만이 이번 라운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번 무대에서 제대로 매력을 발산해 시청자들을 홀려 내지 못하면 아웅다웅 30위권에 머무르던 참가자들은 미래가 불확실해진다. 방송 초반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인기 멤버들도 슬슬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음 라운드에서 보자.”

무대 뒤에서 승현이 손바닥을 펼쳐 들며 말했다. 눈앞에는 환한 조명이 켜진 무대와 그들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등 뒤로는 무대를 준비한 스태프들과 언제나 그들을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있었다.

몇 번에 걸친 리허설도 완벽했고 대기 중 연습 과정 자료 화면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남은 건 2주간 준비한 무대를 모자람 없이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멤버들은 무대를 등지고 선 승현과 짝 소리 나게 손을 마주치고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갔다.

“형, 수고 많았어.”

“선승현 너도 상위권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다음 라운드에서 보자.”

보원과 현기가 차례로 말했다. 그들의 순위는 30위권대로 최소 다섯 계단 이상 순위가 상승하지 않으면 이번이 마지막 무대일 터였다.

“응! 우리 다 같이 다음 라운드 가자!”

“실수 없이 할게요. 화이팅!”

이변이 없는 한 28명 안에는 무조건 들 수 있는 우진과 리웨이는 활기차게 말하며 무대로 뛰어갔다. 다음은 미열이 손을 마주쳤다.

“너 진짜 많이 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난 정말…… 네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

첫 번째 라운드에서 승현을 불신했던 미열은 세 번째 라운드에 와서야 그의 숨겨진 노력을 체감한 듯 쓰게 웃었다.

“나는 늘 똑같았어.”

승현의 대답을 들은 미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이진이 앞으로 다가갔다. 카메라가 있으니 유별난 행동은 금물이었다. 이진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

“형, 다음 라운드에서 봐요.”

승현이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이진의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 얼결에 붙잡힌 이진이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지만 승현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갑시다.”

그리고 이진의 등을 툭 밀며 앞장세웠다. 담백한 시선이 서로 얽히고 승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둘은 눈앞에 펼쳐진 무대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꺄아아악! 유이진 사랑해!”

“우와아!”

“이진아, 꼭 데뷔하자!”

“ 잘생겼다, 선승현!”

“미열아! 여기 좀 봐 줘!”

이진이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아까의 수십 배에 달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진은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동료들이 있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끊임없이 애교를 보내거나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애쓰는 멤버들 곁에 선 이진은 자신이 누리게 된 행운에 대해 생각했다. 방을 가득 메운 선물 상자들과 공연을 기다리면서도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관객, 이진을 위해 준비된 무대와 그 위에 함께 선 동료들……. 그 모두가 너무도 크게 와닿았다.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건 뜻밖이지만 이곳에 설 수 있었던 건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야.’

이진은 같은 기회를 얻었지만 3라운드에 올라오지 못한 참가자들, 그리고 4라운드에 함께 하지 못할 동료들을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무대 뒤에서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팀원들은 다들 일사불란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랄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Beep, beep. D-day, Today는 바로 설레는 데이트 날.”

센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한쪽 다리만 세우고 주저앉은 이들 틈에서 우진이 잠에서 깨어난 시늉을 하며 일어났다. 다른 멤버들은 손가락으로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표현하며 천천히 일어나 각 위치로 흩어졌다.

“햇살이 기분 좋아.”

“왠지 모두 잘될 듯한 기분.”

‘준비 완료!’ 모두가 발랄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대형이 바뀌고 이진이 센터에 서자 관객석에서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시 센터가 바뀌고 이진은 왼쪽 끝으로 갔다가 중간으로 나오거나 하며 무대를 누볐다.

앞에서 뒤로, 좌에서 우로 움직일 때마다 무대 위에서 보는 광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의 등이 보이기도 하고 공연에 심취한 관객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설레는 오늘을 너와 함께 만들 거야.”

눈부신 결과만을 보고 부러워했고, 과정을 겪으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미래로 향하는 길이 아무리 가파르다 한들 길목마다 분명히 한숨 돌릴 곳을, 함께 걸어갈 동료를 찾을 수 있다. 삶에 천천히 스며들어 오는 애정들 덕분에 이진은 이 순간들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었다.

모든 무대가 끝나고 심사 위원 점수와 관객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발표했다. 슬슬 팀 점수가 개인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지만, 2주간의 성과가 드러나는 순간이기에 모두 조마조마하며 평가를 기다렸다. 물론 다음 주에 있을 음악 방송 무대의 출연권도 몹시 탐나는 상품이었다.

이진은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었다. 우승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3라운드 우승 팀은, 바로 ‘너와 첫 데이트’ 팀입니다!”

그건 그거고 잘한 건 잘한 거고.

이진이 속한 승현 팀은 여러 난관에도 기복 없이 탄탄한 실력과 완성도를 보여 주며 3라운드 1위를 차지하고 음악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점수를 확인해 보니 2위인 찬우 팀과 3위인 하늘 팀과는 근소한 차이였지만, 1점 차이든 100점 차이든 중요한 건 이진이 우승했다는 사실이었다.

“우와! 진짜 우리 팀이 우승이야?”

“저 1등 처음 해 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간결하게 소감을 마치고 내려오니 길고 길었던 3라운드가 이번에야말로 끝나 있었다.

“우리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팀 점수 비율 몇 퍼센트지? 제발 많아라, 제발!”

드디어 길고 긴 고생에 보답을 받은 멤버들은 각기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끌벅적했다. 이들뿐 아니라 아쉬운 성과를 낸 다른 팀에서도 밝은 분위기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묘하게 이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승현이 이진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이진은 섣부른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3라운드 종료를 참가자들만큼이나 기뻐해야 할 스태프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아직 일이 덜 끝났기 때문인지 3라운드 종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익숙한 얼굴의 VJ가 참가자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평소 이 팀 저 팀을 누비며 일상 인터뷰를 따 가던 제작진인데 지금은 어딘지 급해 보였다. 분신처럼 손에서 놓지 않던 카메라 역시 들고 있지 않았다.

“승현 씨, 이진 씨. 촬영 끝나고 미안하지만 잠깐 따라와 주시겠어요? 지금 바로요.”

예감이 적중한 듯 그는 승현과 이진에게 다가와 심각한 태도로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참가자들이 무대에 올라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어? 우리 회식은?”

“음방 끝나고 가지 뭐. 우리끼리라도 고기 먹자!”

본방을 보며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하던 현기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이진은 제작진을 따라가야 하나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다행히 미열이 현기를 달래며 멤버들을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채 갑자기 메인 피디의 호출이라……. 승현과 이진은 불길한 눈빛을 공유하며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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