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하이라이트 대형에서 조화롭도록 멤버를 고르다 보니 리웨이와 미열, 우진이 옷을 갈아입었다. 최종 의상을 입인 상태로 팀별 단체 샷 촬영까지 마치고 나자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근데 우리 유니폼 때도 느꼈지만 이진이 너 흰 바지 진짜 잘 어울린다.”
“그래?”
“사진으로 남겨 놓자. 너 며칠 동안 계정 들어가 보지도 않은 것 같던데 이번에 하나 올리고.”
이진은 미열의 충고를 받아들여 핸드폰을 넘기고 엉거주춤 포즈를 잡았다. 개중 잘나온 사진 두 개를 골라 SNS에 업로드하니 순식간에 알림 창에 숫자가 번뜩였다. 다리가 길어 보이게 찍어 준다며 바닥에 드러누워 사진을 찍는 미열을 찍은 사진이 같은 시간에 미열의 계정에도 올라갔다.
[soyun.lim.o0o: 이진이 오빵ㅎㅎㅎㅎㅎㅎㅎ 오빠랑 눈 마주쳤다!ㅎㅎㅎㅎㅎ]
[LoveTHings.mj: AYEEEEEEE]
[wewe_bears: 선물은 아직?]
[chamsarang: 라방 함만 켜주라 제발]
[Omin.geegeegee: 헐. 이 시간까지 촬영 중?]
포스팅에 달리는 댓글들은 평소 이진이 찾아보던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묘하게 건성이랄까. 길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정도의 느낌이었다. 물론 개중에도 과한 표현으로 애정을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간결하게 이모티콘 몇 개나 감탄사 한마디를 남기고 가는 게 다였다.
[U2zin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내일 무대 많이 기대해 주세요*^^*]
이진은 트랜드를 따라 길게 남겼던 글을 간결하게 수정했다. 그러자 이진이 글을 수정한 것에 대한 반응도 올라왔다.
[qkqh321: 이진이 글 누가 다 먹었어?ㅠㅠ]
어떻게 이런 귀여운 문장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이진은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아기자기한 동물인 햄스터가, 줄줄이 늘어진 글자를 냠냠 갉아먹는 상상을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도 한 동안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관심을 만끽했다.
“저 형 왜 아이돌 하려는 건가 궁금했는데 역시 관심받는 거 좋아하는구나. 표정 봐.”
“저런 스펙에 이 정도 관종력은 양반이지.”
그런 이진을 보며 멤버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이진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하려 노력했던 미열도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한 스태프가 급하게 이진을 찾았다.
“이진 씨, 서포트 물품 도착했어요!”
반가운 소식에 대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진을 찾은 스태프의 뒤로 카메라맨과 함께 선물 박스를 한가득 안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바로 촬영을 할 모양인지 코앞에 곧장 카메라가 들이밀어졌다.
“서포트요? 저한테요?”
선물 상자들을 보고 나서야 기억에서 잊혔던 ‘서포트’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진은 우선 전혀 몰랐던 척을 하며 놀란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거대한 남색 곰돌이를 들고 온 제작진이 인형을 냅다 품에 안겨 줬다.
그리고 곰 인형을 시작으로 온갖 물건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왜 이렇게 많지?’
눈앞에 물건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진의 얼굴에는 진실된 의문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서포트 품목은 운동화와 트레이닝복 정도였고, 그것도 모금액이 목표 금액을 초과했을 시의 얘기이지 않았나.
대체 어쩌다가 운동화 한 켤레가 이렇게 불어나게 된 걸까. 이진의 인기가 상승한 덕이라 해도 어쩐지 석연찮았다.
물건은 차례차례 대기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직접 포장한 듯한 포장지에는 남색 리본과 금색 실링 왁스가 시그니처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자와 인형, 액세서리 케이스와 종이봉투에 달린 리본 끄트머리마다 작은 문구가 박혀 있었다.
[from. 유일이진]
언제였던가, 이진이 막 팬 카페를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을 무렵 한창 모금을 받던 바로 그 서포트가 맞았다.
“와, 운동화만 다섯 켤레. 이거 전부 최소 30만 원 넘는 것 같은데?”
“옷도 전부 뭐야. 백화점 명품관 브랜드야.”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안은 이진이 얼떨떨하게 굳어 있자 팀원들이 상자를 들춰보며 대신 선물의 가치를 평가해 줬다.
“……이 정도면 서포트 중에서도 역대급 아니야?”
누군가 조용히 흘린 감탄에 대기실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사실 서포트를 받은 참가자가 이진 뿐은 아니었다. 3라운드 무렵을 기점으로 어지간한 아이돌만큼의 인기를 누리는 상위권 참가자들에게 하나둘씩 서포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고 모델에 발탁되라는 큰 뜻을 담아 간식거리를 왕창 받은 정하늘부터 문제가 된 사복 센스로 명품 셔츠와 재킷을 선물 받은 허동규, 벌써부터 이니셜이 커스텀 된 마이크를 받은 박희영과 좋아하는 캐릭터 상품을 오십여 개나 받았다는 강재규까지.
물론 선물에 들인 금액으로 팬들의 화력과 애정도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전히 거대한 금액이 가져다주는 위압감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누가 얼마나 조공을 받았다더라. 그런 정보들은 알게 모르게 참가자들의 서열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이진이 받은 서포트 물품은 대형 기획사 출신의 쟁쟁한 참가자들보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뛰어났다.
“이진 씨, 한마디 하세요.”
“아, 네. 제가 너무 어…….”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이진은 선물 상자에 손을 대보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카메라맨이 말을 시키고 나서야 이게 방송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자각할 정도였다. 그는 우선 곰돌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카메라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곰 인형을 소파 위에 올려놓은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자를 하나씩 열어 봤다. 대기실에 모인 모두가 이진의 손끝만을 바라봤다.
[이진아, 새 신을 신고 훨훨 날아가자.]
달칵, 첫 번째 상자를 열었을 때 아기자기한 카드에 적힌 문구였다.
‘나한테 온 선물이 맞구나.’
이진은 카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차분히 다음 상자를 열었다.
운동화부터 트레이닝복, 일상복, 이어폰, 지갑, 향수에 팔찌까지……. 이진이 감히 금액을 가늠하지 못할 선물들이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상자에서는 한아름 꽃을 끌어안고 머리에 꽃잎을 단, 이번 뮤직비디오 속 이진이 인쇄된 작은 액자가 나왔다. 액자 속 이진은 어느 때보다 환히 웃고 있었다.
이진은 애틋한 손길로 액자를 쓰다듬다가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가 된 물건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많이 감동받으신 것 같아요. 소감이 어떠세요?”
카메라맨의 질문에 이진은 선물 더미 속에서 운동화 하나를 집어 들고 카메라를 바라봤다. 팬 카페에서 그가 직접 투표했던 디자인 운동화였다. 비싸다더니 손에 들었을 때도 너무 가벼워서 놀랐다.
“형, 웃어야지.”
“잠깐, 잠깐. 반응이 현장감 넘쳐서 좋은데 멘트는 끊고 다시 합시다. 이진 씨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못 건지겠어.”
이진은 멤버들의 반응에 그제야 자신이 울 것 같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감동적이었다. 그 이상 무어라 표현하지 못할 만큼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자신의 앞날을 축복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주는 울림은 상상 외로 깊었다.
잠깐 새 눈물을 쏙 말려 버린 이진은 멤버들의 훈수에 맞춰 한 손에는 곰돌이 인형, 다른 손에는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보내 주신 마음은 잘 받았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상투적인 멘트지만 이진의 진심을 그보다 더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이 없었다. 이진이 원체 말을 잘 꾸며 내지 못한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더 과한 반응을 요구하지 않았다. 촬영 팀은 만족할 만한 분량을 뽑았는지 선물들을 고스란히 두고 대기실을 나섰다.
“저번에 질문 읽기 할 땐 술술 잘만 말하더니.”
미열이 놀리듯 말을 걸었다. 이진이 승부욕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아는 멤버들이 모두 미열과 비슷한 눈초리로 이진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말해야 할 땐 장난치면 안 되지.”
그러나 이진은 그런 농담에 쉬이 어울려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답하자 이내 흥이 식었다는 듯 각자 흩어졌다.
“제길, 부럽다! 이게 다 얼마야?”
“근데 첫 조공인데 이렇게 많이 하나? 다른 팬덤은 막방까지 꾸준히 돈 모아서 막방 때 빵 터트리려고 하던데.”
현기와 미열이 한마디씩 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은 선물들을 상자 속에 다시 차곡차곡 집어넣기에 바빴다. 사실 선물 상자 같은 것은 어차피 집에 들고 가면 전부 재활용 쓰레기가 될 테지만 이들의 정성을 이진의 보금자리까지 고스란히 보존하고 싶었다.
다리를 다친 직후 팬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읽으며 이진은 팬이라는 존재에 작게 실망했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닌 사이이니 그들에게 진심을 바랄 순 없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진의 하차 루머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니 속이 상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를 생각해 주는 이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기회 덕분에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런데 선승현 너도 슬슬 서포트 얘기 나오지 않아?”
“나는 지하철 광고 먼저 한다는 것 같아.”
“아, 하긴 하늘이도 조공은 간소하게 하고 바로 지하철 광고 들어가려는 것 같더라. 찬우네도 광고용 영상 셀렉 중이던데.”
“와, 근데 그건 진짜 얼마야?”
이제 멤버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팬들이 얼만큼의 능력이 되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다들 자신의 팬 사이트를 열심히 염탐 중인 건지 제법 구체적이 계획들이 들려왔다.
이진은 사소한 정보들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한 귀로 흘리며 선물 상자들을 차곡차곡 모아 대기실 구석에 옮겨 뒀다. 마지막 상자를 옮길 때쯤, 스태프 한 명이 찾아와 컨셉 소개 영상 촬영을 위해 장소 이동을 지시했다.
“승현 씨가 리더니까 컨셉 먼저 설명하고, 이진 씨가 다음으로 무대 주안점 말하고, 미열 씨가 마지막으로 재미있던 일화 하나 말하는 걸로.”
스태프가 복도를 걸어가며 설명했다. 참가자들이 이번 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직접 들어 보는 영상으로 공연 사이사이 무대 준비 시간에 틀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대본은 없으니까 지금 적당히 생각해 두세요.”
“네?”
말하기 난이도가 제일 높은 미열이 놀라며 불만을 토했다. 막상 시키면 잘 하겠지만 주관식 서술형 문제를 맞닥뜨리면 거부감부터 들고 보는 주입식 교육 세대인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대본이 없다는 소리에 불안해진 이진도 승현과 미열을 번갈아 바라봤다.
갑자기 중책을 맡게 된 승현도 부담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진도 조금 어색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는 눈을 마주친 게 많이 당황스러운지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수상한데?’
문득 이진은 왠지 승현이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