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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95화 (95/173)

95화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승현이한테 털어놨는데…… 걔가 내 말을 듣더니 화를 내서.”

“너희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

찬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오해받기 좋은 문장이긴 했다. 그래도 이진은 자신에게 있어 승현이 특이할지는 몰라도 특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그뿐이 아님을 찬우와 이진 본인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이진은 황당해하는 찬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찬우야, 나 사실은 과거로 돌아왔어.”

“엥?”

“나는 원래 3년 후 사람이고 과거에선 윈올에 참가하지 않았어. 그리고 너랑 선승현이랑 백미열은 데뷔를 했는데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어.”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치곤 제법 깔끔하게 정리된 문장이었다. 역시 이런 것도 할수록 느는 법이었다.

“내가 승현이랑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내가 과거 일반인이던 시절에 걔를 엄청 싫어했어서 그래. 그때 감정이 아직도 해소가 안 돼. 나 악플만 안 썼지 거의 안티였거든!”

승현에게 가진 질척하고 음울한 감정의 근본을 명쾌하게 설명해 낸 것에 만족한 이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찬우가 어떻게 반응하든 그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선승현의 반응보다는 나을 테다.

그러나 찬우는 이진의 예상을 완전히 빗겨 간 반응을 보여 줬다.

“방송국 앞 떡볶이 맛집을 너 혼자 가서 승현이가 화냈다고……?”

마치 여태까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쌩뚱한 소리였다. 이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설명했다.

“아니, 내가 미래에서 왔다니까?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 분식? 그 사거리 신호등 앞에 있는 데 맞지?”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찬우는 이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 일부러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소리만 해 댔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에서 이진을 놀리려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찬우는 오히려 이진을 안쓰럽게 여겼다.

“너희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운다. 사실 이진이 넌 모르지만 승현이는 너랑 썸 타고 있는 거 아니야?”

눈치가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제법 예리한 추측에 슬쩍 눈을 돌렸다.

아니, 중요한 건 승현이 아니었다. 찬우에게 벌어진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진은 재차 대화를 시도했다.

“저 영화에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잖아.”

“응? 그렇지. 그게 능력이니까.”

“미래에서 과거로.”

“응. 그렇다니까? 능력 쓰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거야.”

이진은 천천히 찬우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영화 얘기까지는 평범한 대화가 가능했다.

“나도 그래. 나도 과거로 돌아왔어.”

하지만 이진이 영화 내용과 자신을 엮자마자 찬우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이진만을 남겨 두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멍한 눈동자에 왜곡되어 비치는 이진의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너도 능력자긴 하지.”

이진이 불가사의한 현상에 두려움을 집어먹을 즈음 찬우의 총기가 도로 돌아왔다. 영혼이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 같았다. 그는 어떠한 이변도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자진 하차하고 솔로해야 하는 사람은 진영이 형이 아니라 우리 유이진인데. 그치?”

찬우가 건치를 빛내며 씨익 웃었다. 이진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정보를 인식하지 못해.’

승현은 부정하긴 했지만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화를 냈겠지. 그러나 찬우는 이진의 그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코팅지 위에 물을 뿌린 것처럼 이진의 말은 찬우에게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표면을 따라 흘러내렸다.

불가사의한 현상에 바짝 몸이 경직됐다. 호흡도 절로 거칠어졌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서성였다. 불안함에 사지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벌벌 떨자 찬우가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러나 침대에 앉아서도 이진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거면 선승현이 발뺌하지 못하게 납득시킬 수 있어.’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서웠지만 동시에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음에 가슴이 떨렸다. 이진은 미치지 않았다. 그가 버텨 낸 지난 3년은 실재했다.

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미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야?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약간 숨이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은 자잘한 건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열아. 나 시간을 거슬러서 과거로 돌아왔어.”

-뭐라고?

“나는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고. 너랑 선승현이랑 한찬우가 데뷔했던 미래에서 지금으로 돌아왔어.”

찬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와중에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어 안절부절못하는 이진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진은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걸 막았다.

짧은 침묵 후, 얼떨떨한 미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어……. 야, 이진아. 감동적이다. 갑작스럽지만, 진짜…….

“내가 뭐라고 했는데?”

-나랑 평생 같은 팀 하고 싶다고. 야, 뭐야. 뭐 촬영 중이야?

역시나 미열도 완전 헛소리를 했다. 이진은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신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등을 토닥이는 찬우를 빤히 보다 그대로 끌어안았다.

“선승현 그 자식이 나더러 미친 것 같다고 해서, 정말 내가 미친 걸까 봐…….”

“승현이가 많이 고생시켰구나.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다.”

“이건 내 망상이 아니야. 여기가…… 현실이야.”

“연애란 게 즐겁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참 힘들어. 두 사람의 마음이 이어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특히 너희같이 진지한 성격들이면 더 그렇지.”

핀트가 어긋난 대화가 이어졌다. 이진은 찬우가 무슨 답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막아 뒀던 둑이 터진 듯 스스로도 언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만큼 많은 말을 쏟아 냈다.

그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외면했다. 의식하고 나면 그 막연하고 거대한 두려움에 잠식당할까 봐, 애써 이 상황에 대해 무신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한순간에 과거로 돌아왔기에 언제 다시 본래의 현실로 내쳐질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무시했다.

그러나 숨겨 둔 불안은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했고, 결국 이진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속하지 못한 채 한참을 방황했다.

“걱정 마. 전부 다 잘 될 거야.”

찬우의 속없는 소리가 오늘따라 위안이 됐다. 이진은 껴안고 있던 찬우를 밀어서 떼어 내고 영화를 재생했다. 한동안 키스 신에서 멈추어 있던 화면이 움직였다.

이날 이진은 영화의 끝을 봤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이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영화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이진이 친구와 함께 영화를 끝까지 봤다는 거였다.

이진은 그 사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

승현이 무시할 수 없는 증거를 발견했다 한들 ‘야 이거 봐라’ 하고 다짜고짜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선 대화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또 같은 화제로 대화를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본 무대가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 연습에서는 전날 들은 임팩트가 약하다는 멘토의 평에 맞춰 하이라이트 파트를 보완하기 위한 각종 노력이 총동원 되었다.

실제로 보강되느냐 마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피드백을 받았으면 어떻게든 발전하기 위한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여 줘야만 했기 때문에, 이진과 팀원들은 트레이너와 함께 머리를 싸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대형과 안무를 조정했다.

“우리 다 앉아 있고 가운데로 우진이가 뿅 튀어나오면 어때?”

“그거 저번 라운드에서 이진이 형이 먼저 했어.”

사실 센터인 우진의 춤 실력이 다른 팀원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임을 모두가 알았다. 본인 역시 알기에 우진은 미안한 듯 눈치를 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승현은 컨셉과 어울리지 않고 리웨이는 가사를 부담스러워하니 부상당한 이진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만고만한 실력이었다. 대안으로 어떻게든 기존보다 화려한 동선을 짜고 현란한 안무를 추가하다 보니 일주일이 뚝딱 사라졌다.

그사이, 예정일에 맞춰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뮤비 자체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좋았으나 이왕 찍을 거 영상 화보처럼 본격적인 연출 샷이 많았으면 좋았을 거란 의견도 많았다. 이진도 그 의견에 몹시 공감했다.

엔딩 신에서 머리 위에 꽃잎을 얹은 이진이 꽃다발을 안고 웃는 1초가량의 짧은 장면은 편집으로 길게 늘려 온갖 커뮤니티에 퍼 날라졌다. 이진은 평소 인터넷을 들락날락거리며 궁금했던 표현인 ‘프레임 단위로 핥는다’의 표본으로 자신이 등극하게 되자 기쁘면서도 민망해졌다.

“어때? 우리 조회 수 몇 위야? 떨려서 못 보겠어…….”

“야, 기다려 봐. 어디 보자.”

가장 담이 센 미열이 나서서 성적을 확인했다. 그에 각자 연습을 하던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퀄리티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전 초반 성적은 관심과 애정의 지표였다. 개인 인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후반 성적을 기대하며 태연하게 굴기는 어려웠다.

“조회 수순으로 정렬하면, 헉! 우리가 2위야. 1위는 정하늘네.”

“초반 성적에서 바비를 이기긴 힘들지. 우리 완전히 선방했네?”

“잠깐만. 베스트 댓글도 읽어 볼게! ……얘들아, 데이트 나가는 거 맞니? 너네끼리 데이트하는 것 같아. 뭐야, 이게.”

미열이 황당해하며 웃었다. 한껏 멋진 남자 친구 역을 연기했던 우진이 부랴부랴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직접 댓글을 읽었다.

“승현아, 이진이 좀 그만 쳐다봐. 형아 뒤통수 구멍 나겠다. 휴……. 내가 잘못한 건 아니구나.”

우진은 방금보다 황당한 댓글을 읽고는 제 연기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며 태평하게 웃었다. 음흉하게 웃는 현기와 보원에게 옆구리를 잔뜩 찔린 승현은 발끈하며 모두를 해산시켰다.

무대 바로 전날은 대대적으로 리허설을 가졌다. 앞서 겪었던 과정이지만 사람이 줄어든 것에 비해 무대 규모는 점점 커졌기에 리허설도 더 전문적으로 변했다. 이번엔 초대한 관객 수도 두 배로 늘었다.

참가자들은 아직 설치 중인 임시 무대에서 동선과 음향, 진행 순서를 확인하고 대기하는 틈틈이 무대 의상을 시착했다. 이진도 새로운 의상을 입어 봤다. 자유롭게 옷을 선택할 수 있었던 저번 라운드와 달리 이번엔 협찬 의상과 함께 전문 코디네이터 팀이 붙었다.

이진은 앞면이 분홍색, 뒷면이 흰색인 셔츠에 흰 면바지를 입고 어정쩡하게 서서 사진을 찍혔다.

“우리 이렇게 싹 핑크로 입어도 괜찮을까요?”

“알록달록한 것도 귀엽긴 한데 잘못하면 조잡스러우니까. 뮤비 의상은 협찬이기라도 했지.”

“선생님, 그래도 깔 맞춤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패션에 의견이 많은 멤버들이 코디들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멤버들은 모두 분홍과 흰색이 어우러진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각각 봤을 땐 깔끔하고 예뻤지만 다 같이 붙여 두면 이진이 보기에도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색도 섞으면 어때요? 연청색 진이랑 같이 매치하면 무난할 것 같은데.”

“그럼 청 입는 팀이랑 이미지가 겹치지 않나?”

토론 끝에 세 명만 청바지를 입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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