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방송국을 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그의 새 보금자리는 이진의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했다. 찬우에게 이 말을 하니 동네 친구라며 방긋 웃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찬우의 방은 같은 동네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좁았다. 들인 가구도 몇 개 없었지만, 작은 침대와 냉장고, 옷 몇 벌이 걸린 행거만으로도 들어설 공간이 없이 빠듯했다.
이진은 정부 지원을 받아 소득 대비 쾌적한 살림을 꾸리기라도 했지 찬우의 집은 고시원보다 조금 큰 정도로 원룸들 중에서도 많이 작은 편이었다.
“거기 침대에 앉아.”
“응.”
찬우가 가리킨 침대에 앉자마자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들렸다.
‘둘이 앉으면 망가지는 거 아닌가.’
괜한 걱정을 하는 사이 찬우가 노트북을 모니터에 연결하고 달칵이며 영화를 재생시켰다. 이진은 침대에 너무 많은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불편하게 앉은 채로 멀뚱멀뚱 방 안을 구경했다. 아직은 찬우의 손길이 닿지 않아 딱히 구경할 거리도 없었다.
“이거 뭔 내용인지 알아? 별로면 다른 걸로 틀려고.”
“영화는 잘 몰라서. 잔인한 것만 아니면 그냥 보자.”
“좋아! 그럼 내가 설명해 줄게.”
영화가 재생되고 어딘지 익숙한 영화사의 로고가 나오고 있을 때, 찬우가 두 발자국 옆에 놓인 냉장고에서 군것질 거리를 꺼냈다. 조그만 냉장고를 붙들고 한참 씨름한다 싶었는데, 잠시 후 손에 닭 가슴살 샐러드와 바나나, 고구마, 그리고 무언가의 과일 주스가 들려 있었다.
“바나나를 구겨 넣었더니 안 빠지는 거야.”
“송이채로 넣지 말고 분리해서 넣지 그랬어.”
“진짜, 그럴걸!”
꺼내 온 음식을 앉은뱅이책상 위로 내려놓은 찬우가 이진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무게 차이 때문인지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이진은 약간 비스듬히 앉게 되었다.
찬우가 선택한 영화는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히어로 영화로 상영 성적이 부진해 VOD가 일찍 풀렸다고 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위대한 영웅의 몰락과 지구 멸망을 지켜본 주인공이 우연히 영웅의 능력을 이어받게 된다. 그 능력은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 주인공은 시간을 평화로웠던 시절로 되돌리고 과거의 영웅을 찾아가 능력을 돌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영웅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어떻게든 예정된 멸망을 막아야만 하는데, 하필 과거의 영웅이 주인공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 버린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얼렁뚱땅 히어로 활동과 연애를 동시에 시작하게 되어 버렸는데…….
“하암.”
그러나 중반이 넘어갈 때까지 액션다운 액션도 안 나오고 로맨스에는 뚜렷한 진전도 없으니 점차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액션 영화치고는 로맨스의 비중도 많은 편인데. 이진은 이 영화가 왜 망했는지 슬슬 감이 왔다.
“졸려?”
“좀 피곤하네.”
“하긴 오늘 촬영이 좀 빡세긴 했지.”
찬우는 이진의 피로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도 촬영이지만 승현과의 말싸움이야말로 피로의 주범이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화를 내?
-이럴 거면 헤어져!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영화 속 연인은 정말 쉴 틈 없이 싸웠다. 그도 그럴게 주인공은 얼른 능력을 돌려주는 방법을 찾고 히어로 활동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데 그 애인의 머릿속엔 온통 연애 생각뿐이니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게다가 주인공은 자신이 영웅이라 밝히지도 못했다. 당연히 애인은 주인공의 고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서로의 입장 차이는 자꾸만 싸움으로 불거졌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었다.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며 제발 능력을 도로 가져가 달라고 애원한다.
시간을 돌린다는 능력은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신체 능력이 괴물처럼 강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지닌 무기는 오직 특별한 물질로 만들어진 검뿐으로 그는 자신이 이길 때까지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나도 나한테 왜 이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시간을 돌리는 게 전부인데…….
주인공은 악당과 싸워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그림자 속에 숨긴 채 가로등 밑에 선 상대에게 외쳤다. 눈물과 피를 뚝뚝 흘리며 방황하는 주인공은 상당히 애처로웠다.
싸움에서 이기고 질 때마다 언론에선 가면 밑에 숨겨진 주인공 정체를 파헤치려 했고, 시민들은 악당이 입힌 피해를 주인공에게 전가하며 매 전투를 평가했다. 그런 정신적 압박은 한때 그들처럼 시민 중 하나였을 뿐인 주인공에겐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이 능력의 원래 주인은 너잖아. 제발 가져가! 난 너무 지쳤어.
-혼자 힘들게 해서 미안해.
옆에서 찬우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바나나를 챱챱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 어쩌면 네가 ‘그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위로하듯 다정한 말투를 듣고 있으니 이진은 갑자기 삐죽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불현듯 주인공에게 이입이 되고 만 탓이다. 게다가 한번 연관 짓기 시작했더니 승현이 매섭게 이진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넌 내가 말하지 않은 많은 걸 알고 있었지.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내가 어디에 살고, 내 가족이 누구인지도.
-그건…….
-하하. 내 성격이라면 능력을 얻고 모두가 떠받드는 영웅이 되었을 때 정체를 감추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연예인처럼 굴었겠지.
그가 자조적으로 웃자 주인공도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그때의 넌 정말 멋졌어.’ 중얼거림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주인공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터벅터벅 그림자 속으로 걸어가 주인공을 꼭 껴안아 주었다.
-네가 알던 영웅은 더 이상 없지만, 아무 능력이 없더라도 내가 너와 함께 싸울게. 둘이라면 혼자보단 나을 거야. 그러니 제발 울지 마.
-난 널 이용하려고 접근했을 뿐인데……. 아무 힘이 없는 널 원망하기도 했는데,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거야?
-중요한 건 지금의 우리잖아. 네가 어떤 과거를 지녔든 어떤 생각을 했든 상관없어. 지금의 나는 너를 사랑해. 이곳이 우리의 현실이야.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기 시작하자 찬우가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으……. 유치하고 귀여워.”
그러나 찬우가 유치하다 평한 대사는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할 적 이진이 승현에게 바랐던 대답이었다. 급격한 감정이입에 결국 이진도 또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진아, 너 울어?”
“아, 아니.”
“너는 무슨 액션 영화를 보다가 우냐.”
찬우가 먹던 바나나를 내려놓고 이진을 달랬다. “그렇지만 액션 영화치고는 별로 안 싸우잖아…….” 이진이 변명했지만 찬우는 듣는 둥 마는 둥 가만 등을 두들겼다. 이진은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냈다. 미리 스페이스바를 눌러 둔 상태라 화면 속 인물들은 격렬히 키스하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영화에 감동받아서 우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찬우는 결국 조심스럽게 ‘영화 보다가 울 정도로 생각나는 이진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보이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이진아, 승현이랑 연애가 잘 안 풀려?”
“뭐?”
“걔가 못살게 굴면 내가 혼내 줄게. 말해 봐.”
닦아 내도 자꾸만 새어 나오던 눈물이 순식간에 메말랐다. 사귀냐는 물음도 아니었다. 아예 질문 자체가 승현과 이진이 평범한 사이가 아님을 상정하고 있었다. 놀라 크게 뜨인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마주 본 찬우가 당황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비밀이었어? 야, 근데 너희 너무 티 나.”
대체 무슨 티가 난다는 걸까. 이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찬우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최근 들어 승현이 굉장히 복잡 미묘한 문장으로 자신을 쥐락펴락 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기억에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진이 형을 보면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형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싫어하면 상처받아요…….’
이진은 환청을 떨쳐 내기 위해 두 손으로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여태껏 어떻게 홀라당 까먹고 지냈나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렬한 기억들이었다.
‘차라리 형이 남자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사귀자고 고백하면 될 텐데.’
펑, 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진은 그제야 자각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자주 오고 가던 비밀 얘기, 둘만이 주고받던 은밀한 대화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수줍게 웃던…… 선승현.
‘나 혹시, 설마 그날에……. 아냐, 아니겠지. 과대망상이야.’
그러나 상대의 마음은 둘째치더라도 이진은 어땠던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자신은 승현이 마주칠 수 있게 손바닥을 쫙 펼치고 있었나? 이진은 제 행동을 돌이켜봤다. 그리고 아주 쉽게 고민의 결론을 내렸다.
왜 승현에게 그토록 자신의 회귀 사실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을까. 미열이나 찬우에게는 털어놓을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승현이 거부감을 보이는걸 알면서도 굳이 고백을 번복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지척의 사건만 떠올려 봐도 답이 나왔다.
‘손바닥을 펼쳐서 갖다 대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나게 휘두르고 있었구나.’
문제라면 승현과 이진이 손뼉을 휘두르는 방향이 서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소리가 난 곳은 마주친 손이 아니라 대충 승현의 뺨이나 이진의 등짝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그럼 승현과 연인 관계가 되고 싶은가? 자문해 봤을 때 대답은 ‘아니’였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속속들이 관찰하고 있다거나 독점하고 싶다거나 미래를 함께 계획하게 된다거나…… 하는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얼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쨌든 평범한 친구와는 다소 거리가 멀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선은 부정하고 싶었기에 이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랑 승현이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럼 갑자기 영화 보다가 왜 운 거야? 다른 힘든 일 있어?”
이진은 걱정 섞인 물음에 우물쭈물 할 말을 찾았다. 하품을 뻐끔대며 졸던 모습을 보였으니 영화에 감동받아서 그렇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