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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93화 (93/173)

93화

승현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더니 이진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량한 자세로 혼자 팔짱을 꼈다.

“그래서 뭐?”

“형이 한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거죠.”

승현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하듯 말했다. 이진은 발끈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뭐? 주식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거지. 고작 이틀 봐 놓고 무슨 소리야?”

“이거 상장 폐지 되게 생겼어요.”

그러나 승현의 단호한 대답에 이진은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상장 폐지. 주식이 휴지조각이 될 위기다. 남의 돈이지만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가 아는 미래에서 잘나갈 예정이던 회사가 지금은 망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온다 한들 승현이 기대했을 법한 반응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회사가 망하든 말든 이진이 과거로 돌아온 건 진실인데 어쩔 텐가.

게다가 제시한 증거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진을 믿지 않고자 한다면 승현은 어떻게든 믿지 않는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증거까지 찾아내서 들이밀 만큼 날 믿기 싫다는 뜻이겠지…….’

또 속상한 생각이 들어 이진은 괜한 감정 소모를 피하고자 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제 그만하자. 네가 왜 이 주식에 집착하면서 내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희가 팅톡 광고를 찍었단 건 변하지 않아. 정 부족하면 어떤 광고를 찍었는지도 쭉 나열해 줄까?”

차분하고 똑 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승현이 어떤 대답을 하든 더 이상 반응하지 말자. 침착하고 냉정하게 굴자.’ 하고 되뇌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이진은 3초 전 결심을 도로 무를 수밖에 없었다.

“저 여기에 투자했어요.”

승현의 충격적인 고백에 이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쳤어?”

“형이 자기 말을 못 믿겠으면 형을 믿으라면서요.”

“야, 그렇다고 주식을 사?”

이진이 충격받은 만큼 승현도 답답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승현은 적절한 타이밍에 화해의 수단으로 내밀고자 주식을 샀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기에 기업에 대해 조사는 하지 않았지만, 고작 몇 만 원으로 자신의 진심이 증명될 것 같지 않아 이진을 향한 진심만큼 돈을 넣었다.

다소 충동적이긴 했지만 허공에 돈을 뿌릴 목적은 아니었다. 애초에 팅톡 주식은 이진이 말하기 직전까지 쭉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급락할 줄 승현이라고 알았겠는가.

그러나 승현의 의도고 나발이고 알바 아닌 이진은 놀라서 커다래진 눈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계속 물었다.

“얼마?”

“…….”

“대체 얼마를 넣었길래……! 너 진짜 미쳤어?”

승현이 침묵하자 이진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대체 얼마를 처넣었기에 떳떳이 밝히지도 못하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미래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이진을 위해 승현이 대신 돈을 투자하고 대신 망하는 것이?

이진이 과거로 돌아왔다 고백하자 묘하게 미래 정세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선승현이 안 어울리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너 돈 많아? 아니, 물론 많겠지!”

“당연히 형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려고 그랬죠. 저도 나름대로 형한테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아서, 형 말을 믿지는 못해도 저는 어쨌든 형이 좋으니까. 화 난 것 좀 풀리면 말하려고 했는데 이게 이틀 사이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요?”

“무슨 믿음을 돈으로 보여 줘!”

이진이 답답해서 팔짝 뛰고 빙글 돌아 버리려는 찰나, 승현이 어쩐지 엄마한테 억울하게 혼나서 분한 어린애 같은 말투로 말했다.

“정말 너무해요. 이 어플 유행한다고 호언장담한 건 형이면서 왜 자기가 화를 내요? 주식 조언 잘못하면 살인도 난다는데. 내가 돈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산 위에 올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갚아 주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따위의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그러다 한 대 치겠다?’와 유사한 시비조였다.

선승현은 유이진의 궁핍한 살림살이를 알았다. 그러니까 ‘돈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라는 사람 돌게 만드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진이 갚아 주고 싶어도 못 한다는 걸 아니까!

“야, 네가 멋대로 투자해 놓고 내가 돈을 왜 갚아? 게다가 너 지금 나 때문에 돈 날렸으니까 미안해해 달라는 거잖아!”

저열한 공격에 열받은 이진이 씩씩대며 소리치자 승현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곧바로 정색하고 역공격해 왔다.

“아니거든요? 그냥 거짓말인 것만 인정하라니까 왜 미안해하는 걸로도 생색내려고 해요?”

“거짓말한 적 없다고!”

미안해하는 걸로 생색내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장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대로 말도 안 나왔다. 저 자식이 주식을 사더니 뇌 기능이 변했나, 합리적 의심조차 들었다.

이진은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애썼다. 선승현과 같은 수준으로 놀아나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저 주둥아리를 다물게 하지 못하는 이상 마지막에 지는 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진은 주먹을 꽉 쥐고 한 차원 높은 공격을 감행했다.

“막말로 네 돈도 아니고 네 아버지 돈이면서 되게 쪼잔하게 군다, 너.”

그리고 그 공격은 정확히 먹혀 들어갔다. 얼굴에도 소리가 있다면 지금 승현의 표정에 딱 맞는 효과음은 쿠구궁이었다. 그는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방송이었다면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라는 자막이 붙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이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리던 승현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자꾸 제 말의 요지를 곡해하지 말아요. 돈 때문이 아니라 형 말이 거짓말이란 걸 인정하라는 거예요.”

“인정은 무슨……! 이게 대박을 치는지 안 치는지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지켜볼 거였어? 증권 정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그래프라도 확인 못 했으면 어쩔 뻔했니. 어플 다운로드 수 올라가는 거 하나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냐?”

이진의 반박에 승현이 꿀 먹은 곰탱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진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말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허점이 없었다. 그리고 승현의 행동은 그답지 않게 불합리했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안 믿으면 그만이잖아. 근데 왜 자꾸 인정하라고 우기는 거야?”

다그침에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승현이 동요하자 이 지지부진한 논쟁을 해결할 어렴풋한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진은 내친김에 그 실마리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아, 알았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내 말이 사실일까 봐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 대지 않으면 불안한 거잖아.”

이진의 도발에도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맞구나.’

처음에는 승현이 화난 이유가 이진이 그의 소문을 함부로 언급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소문을 핑계로 그를 밀어내려 한다고 오해했으니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그런 추측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승현아, 고집 부리지 말고 인정해.”

“인정해야 할 건 형이죠. 형이 무슨 말을 해도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나는 친구로서 형이 이상한 망상에서 헤어 나오도록 도와주려는 것뿐이에요.”

승현은 끝까지 이진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쯤 되면 한발 물러날 법도 한데 아주 꿋꿋했다. 하지만 성급한 태도에서 드러나는 조바심을 숨길 순 없었다. 자꾸만 반복되는 말다툼에 이진은 슬슬 신경질이 났다. 처음에 저자세로 나온 게 잘못이었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친구로서 나를 도와줘? 망상에 빠져?”

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자꾸 사람을 거짓말쟁이 취급하고 망상에 빠져 있다 매도하는 말이 거슬리지 않을 리 없었다.

“너 이딴 식으로 사람 무시하면서 친구라서 그런다니. 진짜 정이 들려다가도 떨어진다.”

”내가 형을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요.”

“지금 이러는 게 충분히 무시하는 거야.”

물론 이진은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툰 자신이 멀쩡하게 친구를 사귀고 사회생활을 하는 승현에게 감히 친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지적할 만한 입장이 아니란 건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행태를 따지고 들지 않고는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야. 말 나온 김에 까놓고 얘기하자. 너 저번에 나하고 잘해 보려고 노력 많이 했다고 그랬지?”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요?”

“근데 네가 노력한 게 뭐야. 심부름하겠다고 귀찮게 군 거 말고 한 거 있냐?”

그런데 이진의 지적이 의외로 유효 타를 먹였는지 승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짜고짜 우리 집 와서 살림살이가 더럽니 낡았니 하면서 새 걸로 바꿔 준 것도 포함해야 하나? 너 설마 진심으로 그게 잘해 보려는 노력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형은 진짜……”

“너도 잘한 거 없으니까 작작 거들먹거려!”

분노에 찬 이진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고요함 속에서 위잉, 기계음이 들려왔다. 복도를 거니는 사람들이 내는 잡음들 때문에 오히려 그곳과 이곳의 공간이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진은 흥분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욕을 들어먹은 승현은 의기소침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금 진정하고 나니 말이 너무 심했나 걱정이 됐지만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화난 이진의 눈치를 보던 승현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때였다.

“이진아, 내가 좀 늦었지? 가자!”

끼이이익! 무거운 철문이 열리며 찬우가 연습실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묵직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는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현이도 있었네? 나 지금 이진이랑 나의 뉴 스윗 홈에 갈 예정인데 같이 갈래?”

“……아니야. 다음에 갈게.”

한참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워서 그런지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를 냈음에도 단어 사이사이로 쇳소리가 섞여 들었다. 찬우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희 얘기하고 있었어? 나 좀 기다릴까?”

“다 끝났어. 그냥 가자.”

“그래? 어, 어……? 야, 이진아, 밀지 마!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그럼 승현아, 내일 보자!”

이진은 찬우의 등을 박박 떠밀어 연습실을 벗어났다. 혼자 남겨진 승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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