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92화 (92/173)

92화

“선승현 쟤 이거 못 이기겠는데?”

“승현이 형, 발로 박수라도 치고 내려와!”

승현은 마지막 순서에 앞사람이 너무 잘했다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제이슨처럼 무난한 착지를 하려는 듯 몸을 앞뒤로 흔들어 반동을 줬다.

모두가 야유를 보내려던 그때, 승현의 몸이 철봉 위로 뱅그르르 돌았다.

“저 기술은?”

“놀이터에서 철봉 좀 잡아 봤나 본데!”

앞으로 세 바퀴 구른 승현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반동을 줘 뒤로도 휘리릭 돌아 댔다. 물 흐르듯 현란한 솜씨로 보아 한두 번 연습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장르가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멋지다!”

“어느 초등학교 출신이냐!”

철봉 위에서 앞뒤로 돌아 가며 묘기를 부려 댄 승현이 가볍게 뛰어내리자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저런 화려한 묘기를 부릴 줄 알았다니 새삼 다시 보였다.

“우승은 ‘너와 첫 데이트’ 팀입니다!”

승현은 당연하다는 듯 우드록에 인쇄된 ‘무대 순서 결정권’을 받아 들고 팀으로 돌아왔다. 예술 점수 때문에 앞에서 고생한 이들의 노력이 묻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애초에 다부지고 늠름한 육체를 어필하기 위한 코너였던 것 같으니 결과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촬영을 마친 뒤 다 같이 이른 점심을 먹었다. 스폰서 협찬을 받은 도시락이라 식사 시간에도 카메라가 돌아갔다. 참가자들은 체할 것 같다고 불평했지만 도시락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단련된 정신력 덕분에 고작 몇 대의 카메라로는 운동 후 찾아오는 식욕을 꺼트릴 수 없었다.

이후 팀별로 연습실에 모여 멘토링을 받았다. 멘토의 조언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실력이 공증된 멘토의 반응은 시청자들이 무대를 지루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는 재미 요소였기에 꼬박꼬박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센터 임팩트가 약하네요.”

“아, 그럼 어떻게 보완할까요?”

“그러게……. 확 치고 들어오는 게 없어서 어떡하지?”

멘토와의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가끔 열의가 넘치는 멘토는 동선이며 안무며 죄다 뜯어고치고 싶어 했지만 경연의 형평성 때문에 그런 일은 지양되었다. 자칫 과열된 경쟁의 불똥이 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그들도 몸을 사려야 했다.

멘토가 떠난 뒤로는 각자 연습하다가 제작진 호명에 따라 미니 코너를 촬영했다. 미니 코너는 시청자가 직접 작성한 질문지를 추첨해 답하는 소통형 게임이었다. 제한 시간 1분 내에 다섯 개 질문지를 읽고 대답하는 미션에 성공하면 추가 질문 세 개를 새로 뽑아 제한 시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다음. 이진 씨 질문 뽑으실게요.”

“아. 조금만 더 하면 다섯 개 채우는데!”

다섯 번째 질문을 답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끊긴 미열이 아쉬운 탄성을 내지르며 카메라 앞에서 나왔다.

“이진아, 세 개만 해라.”

“무슨 소리야. 나 보너스 질문까지 다 받을 거야.”

“음. 그래, 꿈은 크게 꾸라 했다.”

이진의 대답에 미열뿐 아니라 촬영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다. 모두 그 말에 동의한단 뜻이었다. 이진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목을 풀었다. 다들 그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진은 비공식 설문 조사에서 ‘팬서비스를 가장 어색해할 것 같은 멤버’ 1위로 뽑힐 만큼 누가 봐도 빈말에 취약했다. 특히 첫 화에서 승현의 칭찬을 하다가 삑사리를 냈던 장면 때문에 더더욱 입바른 소리는 못 하는 이미지가 공고해졌다.

그러니 대다수가 시청자들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고스란히 읽어 내야 하는 이번 미션에도 당연히 부끄러워하며 버벅일 것이라 생각하는 거였다.

“인사하고 바로 질문 뽑을게요.”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질문 뽑아 주세요.”

이진은 귀엽게 꾸며진 통에 손을 넣고 작게 뭉쳐진 쪽지를 한 장씩 총 다섯 장 꺼내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앞에 놓인 초시계의 붉은빛이 부담스럽게 번뜩였다.

쪽지 한 장을 당장에라도 펼칠 듯이 손에 쥔 이진의 표정이 평소답지 않게 몹시 긴장한 채라, 카메라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잔뜩 힘이 들어간 걸 보니 쪽지를 펼치자마자 곤란해할 모습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준비하시고, 시작!”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질문을 격파해 갔다.

“‘안녕하세요, 이진이 오빠. 오천만 명의 유이진 팬들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힘드시죠? 하느님은 대체 언제쯤 오빠한테 날개를 돌려주실까요? 제 마음을 훔쳐 간 죗값은 이미 충분히 치른 것 같은데!’ 그렇네요. 안 그래도 저도 말씀드려 봤는데 제 잘못이 크니 당분간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기쁨을 드리라고 하시네요. 그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속사포처럼 빠르게 지나간 말에 구경꾼들은 한발 늦게 반응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사람들이 웅성이며 서로의 청력을 걱정할 때, 이진은 재빨리 두 번째 질문지를 집어 들었다.

“‘안녕, 이진아. 솔직히 같이 데뷔하고 싶은 멤버 한 명만 말해 봐. 누나들이 걔만큼은 딱 캐리해 줄게. 누나 믿지?’ 누나, 걔 말고 저한테만 집중해 주세요.”

“유이진 미쳤어?!”

능청스러운 대답에 가장 놀란 건 촬영을 구경하던 미열이었다. 옆에 앉은 승현도 충격받은 것 같았지만 미열에 비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많이들 잊고 있었지만, 이진은 악의적이라 욕을 먹고 방송 수위 제재까지 당했던 첫 번째 라운드 게임, 포인트 벌이 노래방에서 최고 득점을 한 전적이 있었다. 그 무엇도 심지어는 본인의 이성조차도 승부욕에 불이 붙은 이진을 막을 수 없었다.

“‘유이진이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은? 유이진 너무 좋아. 완전 빛…소? 너 없인 밥도 못 먹어. 사랑한다.’ 비소는 독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치명적인가요?”

인터넷 용어를 잘 몰라 조금 삐끗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다섯 질문을 1분 내에 모두 답한 이진은 세 개의 추가 질문을 뽑을 수 있었다.

추가 질문은 이랬다. ‘훌륭한 이진’을 키워 내신 부모님의 교육 방침, 러브송을 부를 때면 떠오르는 이상형, 그리고 이름이 품은 뜻이 무엇이며 어떤 한자를 사용하는지. 이진은 천천히 듣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가볍게 답했다.

“한자는 기쁠 이, 진정할 진이에요. 뜻은 아마도 진정한 기쁨?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알아 올게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시청자 분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모두가 미니 코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자 공식적인 퇴근 시간이 되었다. 연습실에 남아서 개별 연습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촬영이 있었기에 다들 집에 가는 분위기였다.

이진도 연습실로 돌아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바로 어제 미열에게 연습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기가 쭉쭉 빠지는 촬영을 연달아 하고 나니 연습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아. 오늘 찬우네 가기로 했지.’

피로감에 어깨와 목을 주무르다 불현듯 오전의 약속을 떠올렸다.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고민하던 이진은 이내 약속을 미루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어깨를 잡았다.

“형, 아직 안 갔네요?”

덥석, 잠시 여행 나갔던 정신을 갑자기 현실로 잡아채는 손길에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이진은 화들짝 놀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승현이 서 있었다.

분명 열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무거운 연습실 문을 통과해서 한 발자국마다 요란한 울림을 내는 목재 바닥을 걸어왔을 텐데,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을까.

“너…… 왜 갑자기 말을 걸고 그래!”

“놀랐어요? 죄송해요.”

깜짝 놀란 이진이 성급하게 화를 내자 승현도 당황했는지 곧장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뭐 할 말 있어?”

그날 이후 첫 대화였다. 이진은 어색함을 피하고자 손을 휘휘 내저어 본론을 말하도록 시켰다. 승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입을 뗐다.

“할 말이 있기는 한데. 잠깐 시간 있어요?”

이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승현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태도로 보아 아직 심경의 변화도 없는 듯하니 괜한 소모적인 논쟁은 피하고 싶었다. 지금 이진에게는 그럴 체력도 정신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뭔데? 그냥 말해 봐.”

“여기선 좀 그래요.”

승현이 고갯짓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그러나 카메라를 피해서 갈 만한 장소도 마땅찮았다. 합숙소라면 차라리 한적한 복도 끄트머리라도 찾아갈 텐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이진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찬우에게 보내야 할 메시지는 아직 한 글자도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찬우야, 나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겨우겨우 메시지를 보냈다. 승현에겐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적당히 대화하다가 찬우가 들어오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원래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것도 선약이라면 선약이니까. 이진은 적당히 합리화를 시도했다.

“나 여기서 찬우랑 만나기로 해서. 그냥 간단히 말해 봐.”

“음……. 그럼, 이거 보세요.”

승현은 여전히 카메라가 신경 쓰이는지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이밀어 화면을 보여 줬다. 간단히 말하라고 했더니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승현에게 사소한 짜증을 느끼며, 이진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형이 말한 회사 주식이요.”

“뭐?”

당황스러운 대답에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팅톡 미디어 그룹. 이진이 조만간 유행한다 언급했던 어플을 만든 기업이었다.

이진은 주식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이 막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가의 하락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승현이 보여 준 화면 속 막대는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떨어져 오늘 날짜에는 막대 색도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그저께까지는 미미하게 상승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뚝뚝 떨어지고 있어요.”

어설프지만 이진이 유일하게 증거로 내밀었던 미래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승현은 말하고 있었다.

‘얘는 뭘 이런 것까지 기억해 뒀다 찾아보지? 대체 왜……?’

이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승현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속내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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