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여러분 눈앞에 철봉을 보고 벌써 예상하셨다시피 오늘 진행할 게임은 ‘철봉 서바이벌’입니다.”
가볍게 나갈 장면인지 이번 진행은 메인 피디가 직접 맡았다. 게임의 구체적인 이해를 돕는 이미지가 거대한 스크린에 떠올랐다. 학창 시절 체력장처럼 턱걸이 자세로 철봉 오래 매달리기를 해 가장 오래 매달린 팀이 ‘무대 순서 결정권’을 가져가는 규칙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경기가 릴레이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이진은 검은 반팔 티를 입어 유독 피부색이 도드라지는 제 팔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열을 안쓰럽게 바라봤던 걸 잊고 슬쩍 주먹을 쥐고 근육이 올라오는 모양새를 관찰했다.
미열처럼 빈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년간의 고깃집 알바로 단련된 근육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절이라 그런지 적당히 보기 좋았다. 그러나 가뜩이나 촬영지가 서울이라 상대적으로 구경꾼이 많은데, 그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까 걱정됐다.
“무대 순서는 아무렇게나 하면 그만인걸. 노래 고를 땐 가위바위보 해 놓고 뭔 놈의 방송이 이러냐.”
“그렇다고 대충하기만 해 봐.”
투덜대는 미열에게 승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미열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윽!’ 소리를 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순서 결정권을 획득하면 다른 팀 순서도 마음대로 배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승부에 있어서 대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진도 말을 얹었다.
“딱 1분만 버텨.”
“말이 쉽지…….”
이내 참가자들은 제작진이 정해 준 순서대로 각자 철봉 앞에 줄을 섰다. 미열이 첫 번째, 이진은 다섯 번째 순서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체력이 약할수록 앞 순서인 듯 보였다. 마지막 순서는 리더들로 고정되어 찬우 팀과 동규 팀의 우승이 유력해 보였다.
승현이나 제이슨도 체격이 좋은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몸이 큰 참가자들 사이에 나란히 세워 놓고 경쟁시키기엔 체급이 다르다는 인상이 있었다. 이진은 역시 다섯 번째 순서인 자신이 최대한 오래 끌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앞 순서가 떨어지고 5초 안에 매달리셔야 인정됩니다!”
미열은 양손을 쥐락펴락하며 제법 비장하게 철봉 앞으로 걸어갔다. 앞에 나온 사람들을 보니 유난히 보컬 라인이 많았다.
삐이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맨 앞에 선 참가자들이 일제히 철봉 위로 뛰어올랐다.
“10초 안에 턱걸이 유지 못하면 탈락입니다!”
“끄아아악!”
곳곳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필사적으로 팔꿈치를 굽혀 철봉 위로 턱을 올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후들대는 팔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일찍 게임이 끝날 것 같았다.
“탈락!”
10초가 지나자마자 칼같이 두 명이 탈락했다. 미열은 아슬아슬하게 턱을 철봉 위로 걸쳤다. 첫 선수가 탈락한 팀에선 두 번째 선수가 5초 안에 철봉에 오르기 위해 재빨리 철봉을 잡았다.
“살려 줘!”
“형, 제발 좀만 더 버텨!”
바로 다음 순서인 현기가 애원했다. 그러나 미열은 간신히 55초를 채우고 미끄러졌다. 비록 1분은 채우지 못했지만 앞에 탈락자들이 세 명이나 있어 이 정도면 선방이라 할 수 있었다. 미열은 55초가 본인 인생의 신기록이자 영원한 최고 기록일 거라 중얼거렸다.
현기는 요란한 기합을 지르며 철봉에 매달렸다. 그리고 미열보다는 조금 빠르게 턱걸이에 성공했다. 몸이 덜덜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첫 선수가 버틴 팀이 하나, 나머지는 전부 두 번째 선수로 교체됐다. 상대적으로 일찍 투입된 팀은 벌써부터 고비가 보였다.
“끄허억!”
현기는 세 번째 순서로 툭 떨어졌다. 간신히 1분하고도 3초를 채운 수준이었다. 현기가 네발로 바닥을 기어 철봉 밑에서 탈출할 때, 다음 순서인 우진이 쏜살같이 철봉에 매달렸다. 몸의 반동을 이용해 가뿐하게 턱걸이를 성공하고 제법 안정적인 자세로 버텼다. 앞의 두 사람과 대비되게도 1분이 지나가도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짜 근력 운동 좀 해야겠다.”
바닥에 쓰러진 미열과 현기를 보고 보원이 한소리 했다. 그러나 이들과 비슷한 참가자들이 한둘이 아니라 둘 다 보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우진은 2분 36초를 버티고 내려왔다. 근력 부족보다는 몸에 힘을 주고 매달리다 보니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운 것 같았다.
“현기증 나…….”
“현기?”
“나한테 맡겨!”
현기가 자신의 이름으로 농담을 거는 중 리웨이가 씩씩하게 답하고 철봉으로 다가갔다. 우진보다 마른 체형에도 불구하고 팔에 힘을 주자마자 불끈 솟아오르는 근육이 선명했다. 리웨이는 턱걸이쯤은 거뜬한 듯 보였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철봉이 땀으로 미끄러운지 몇 번 손을 움직이며 건조한 자리를 찾았다.
순식간에 모든 팀이 네 번째 선수로 교체되고 한동안 버티기에 들어갔다. 슬슬 남은 순서가 몇 없어 역전의 기회가 적어진 만큼 다들 필사적이었다.
“자기야, 화이팅!”
……그러나 현기의 외침에 힘이 빠진 리웨이가 결국 첫 번째 탈락자가 되어 버렸다.
“아……! 형, 좀!”
“입방정아!”
곳곳에서 현기를 구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 차례인 이진도 현기를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벌써 5초가 카운트되기 시작했다. 후다닥 달려가 철봉에 매달렸다. 생각보다 철봉이 높아 가볍게 점프를 해야 봉을 잡을 수 있었다.
이진은 손바닥이 봉에 찰싹 달라붙자마자 팔을 굽혀 몸을 들어 올렸다. 중간까진 팔꿈치가 쉽게 굽어졌으나 몸을 본격적으로 들어 올리려니 보기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다.
“우오오! 유이진 야성미!”
“조용히 해……!”
미열이 목소리 높여 이진을 놀렸다. 그에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지만 오히려 이진을 놀리는 사람이 다섯 배로 늘어 버렸다.
1분도 안 되어 모두가 다섯 번째 선수로 교체됐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자 윌리엄과 진연이 같이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이진은 정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동안 안무 연습은 차곡차곡 쌓아 둔 체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육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 같았다.
참가자들이 얼마나 필사적인지와는 관계없이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점점 효력을 다하고 있었다.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긴박감으로 고조되어야 하는 분위기가 반대로 풀리기 시작하자 제작진들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자, 지금부터 1분 안에 턱걸이 다섯 개 실시합니다!”
“네?”
“차라리 죽이세요!”
사방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내면의 폭력성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아 내느라 몹시 고생했다.
그래도 다섯 개정도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이진은 큰 숨을 한번 쉬고 몸을 밑으로 내렸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듯 생전 달려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이 섬유질 모양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유이진 멋지다!”
“형, 무리하지 말아요!”
응원들 틈으로 무리하지 말라는 승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걱정되는 마음에 건넨 말이었겠지만 그게 오히려 이진의 오기를 자극했다.
‘삐돌이 주제에 위하는 척하기는!’
이진은 이를 아득 물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그러나 역시 유년기에 배를 곯은 탓인지, 젖 먹던 힘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이진은 가까스로 턱걸이 다섯 개를 채우고 힘이 빠져 추락해 버렸다.
“유이진, 탈락!”
철봉 밑에 두꺼운 매트가 깔려 있어 아프진 않았지만 다친 다리로 착지를 피하다 보니 추락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 다음 차례인 보원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진은 감각이 사라진 팔을 이용해 엉금엉금 기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살아남은 여러분, 1분 안에 턱걸이 열 개 실시합니다!”
이진을 포함해 절반이 넘게 탈락하자 즉시 더 가혹한 지시가 내려왔다. 지금 남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체력 상위권이었지만,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절망적인 표정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니! 이게 게임이야, 고문이야?”
“야, 김보원! 적당히 해. 내일이 무대다!”
체형으로 보자면 아이돌보다는 헬스장 트레이너에 가까운 보원은 괴물 같은 근력으로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턱걸이 열 번을 무사히 채웠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탈락하자 자진해서 손을 놓고 내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리더끼리의 대결이 되었다. 승현이 어깨와 목을 풀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동시에 팔을 쭉 뻗고 봉을 잡았다.
“가라, 선승현!”
미열의 외침과 함께 승현의 팔에서 근육이 불거지고 몸체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헬스 트레이너가 봤다면 완벽하다 칭찬했을 만큼 곧은 자세였다.
“야, 선승현 헬스 좀 했나 본데?”
승현이 철봉 위에 턱을 걸치고 중얼거렸다.
“……힘들어.”
“엄살 피우지 마, 짜샤!”
미열의 구박대로 승현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미열이나 현기처럼 10초 만에 온몸을 달달 떨지도 않았다.
제법 잘 버티고 있는 승현을 포함한 리더들은 의외로 엄살을 한껏 부렸다. 철봉을 한 열 개쯤 매달고 달려도 끄떡없을 것 같은 허동규조차 징징대기 바빴다. 이진은 이게 바로 신경전인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헉, 헉. 자존심이 있지, 흐억, 헉!”
“제발 조용히 하면 안 될까?”
동규의 요란한 외침에 하늘이 음산하게 답했다.
하늘은 2분 20초가 되자마자 탈락했다. 동규도 이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른 탈락을 맞았다. 턱걸이 열 개의 고난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한찬우와 선승현, 그리고 제이슨 리뿐이었다.
“생존자 분들 힘드시죠?”
“피디님, 얘네 진짜로 죽겠어요!”
미열이 승현을 대변했다. 이미 한차례 철봉의 두려움을 체험하고 내려온 다른 참가자들도 웅성이며 생존자들의 편을 들었다.
“여러분의 체력은 훌륭히 입증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이번엔 예술 점수를 보고자 합니다. 가장 예술적으로 착지하는 팀이 우승합니다!”
“갑자기 예술이요? 여태까지 체력장 해 놓고요?”
미열이 외쳤으나 PD는 깡그리 무시한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제이슨부터 착지를 지시했다.
제이슨은 정석대로 몸에 반동을 줘 날아가듯 착지한 뒤 양팔을 머리 높이로 올리는 포즈를 취했다. 솔직히 저것 외엔 멋있는 착지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기에 이진은 마지막까지 얼마나 꼿꼿이 서 있는지를 두고 점수를 나누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우끼!”
그러나 한찬우가 기행동을 벌이며 그러한 편견을 깨부쉈다. 다음 차례로 착지하게 된 찬우가 몸을 철봉에 쭈욱 늘어뜨린 뒤 대롱대롱 매달려 원숭이 흉내를 낸 것이다.
‘아참, 이거 예능이지.’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하자면, 어쨌든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프로그램 취지에 맞는 행동이 예능 점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
“우끼기긱!”
한 팔을 철봉에서 뗀 찬우가 몸을 뒤로 돌려 동료들에게 인사하고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착지했다. 마지막까지 컨셉을 잃지 않고 제이슨의 옆까지 원숭이처럼 뛰어가 쭈그려 앉은 포즈를 잡고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