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근육 파열이네요.”
“네?”
분명 전 병원에선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돌연 근육 파열 진단이 내려졌다.
“저번에 검사받았을 땐 별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요.”
“뭐, 놓쳤을 수도 있고 그때는 이상이 없었을 수도 있고…….”
이진을 따라온 스태프가 전 병원에서 진단을 실수한 건지 물었지만 의사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고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무리한 운동을 감행한 탓에 근육 파열로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니 이진으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병원에서 뭐래?
“그냥 쉬래……”
진단을 받은 당일만이라도 쉬라는 스태프의 권유에 이진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미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대하기 힘든 거야?
“어차피 2주쯤 되면 자연 치유 된대서 공방 때까진 괜찮을 것 같아.”
-진짜진짜 다행이다.
수화기 너머로 승현이 ‘뭐래?’하고 물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열은 조금 귀찮은 듯이 ‘오늘 안 온대’하고 답했다. 이진은 이를 모른 척했다.
바로 일주일 뒤가 공방이었다. 시청자들을 불러 무대를 선보이는 만큼 2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잡다한 촬영 스케줄까지 모두 소화하면 막상 연습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데 자꾸 이런저런 사정으로 빠지게 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이진은 성실해 보이던 보원과 현기의 연습량이 부족해진 것도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작은 구실 하나에도 한눈을 팔고 싶어지는 게 사람 아니던가. 그들은 현재 멤버 구성과 얼마 다르지 않은 팀으로 저번 라운드 팀별 순위 2위를 차지했으니 지금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쉽게 나태해질 만했다.
“내가 자꾸 빠지면 애들 사기도 저하될 텐데 역시 지금이라도 연습실로 갈까?”
-어디 전쟁 나가냐? 사기는 무슨. 어차피 내일 전체 촬영 있어서 빠지지도 못하니까 오늘 맛난 거 먹고 쉬어 두셔.
“그래도…….”
미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아 한마디를 더 붙이려고 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미열이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아, 그것도 자의식 과잉이다.
“그,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았다는 대답 외엔 할 수가 없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니……. 미열이는 나를 평소에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볼을 눌러 보았다. 다행히 열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럼 내일 보자.”
-아. 이진아, 잠깐만. 뭐라고?
민망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전화를 끊으려는데 미열이 이진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냐 물을 새도 없이 불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야. 선승현이 너 밥 못 먹고 굶을까 봐 먹을 거 사 간댄다.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난 됐으니까 연습이나 열심히 하라고 전해 줘.”
-이럴 거면 너희끼리 전화하든가…….
구시렁대는 미열과 조금 더 대화하고 전화를 끊었다. 숨을 후우 깊게 내쉬니 명치에 답답하게 얹혔던 시름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이진 씨, 통화 끝났어요?”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진이 통화하는 동안 흡연 구역을 어슬렁대던 스태프가 돌아왔다. 다친 이진과 처음 응급실에 동행했던 이로 자세한 업무 내용은 모르지만 제작 팀에 속해 있었다.
“집이 어느 쪽이에요? 데려다줄게요.”
“이 근처예요. 버스 타면 금방이라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이진이 지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쁜 사람을 더 이상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스태프는 일거리가 줄었다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안 돼요. 사진 찍히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요즘 기자들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완전 극성이에요. 대체 어디서 유출된 건지 이번에도 펜션까지 따라와 가지고 제작 팀에서 쫓아내느라 죽겠다고 막…….”
이진은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는 스태프와 타협해 결국 택시를 탔다. 어제 받은 교통비가 남아 있던 덕분에 지갑 사정이 조금 남아져서 찾을 수 있던 타협점이었다.
집에 가는 길, 택시 안에서 이진은 미열로부터 귀여운 문자를 받았다.
[짠! 우리 반팔 티 새로 받았지롱~ 이러다가 여름에 홀랑 벗겨지는 거 아닌가 몰라ㅋ 내일 너 오면 같이 찍으려고 업로드는 안 한다~ ㅋㅋ(사진)]
첨부된 사진은 반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미열의 셀카로 카메라에서 살짝 비껴 선 탓에 뒤로 승현과 찬우가 보였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 위에는 앙증맞은 동물 귀와 수염이 달려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이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 고마워. 내일 보자ㅎ]
간단히 답하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자 택시 기사가 백미러 너머로 이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쳐 어색한 미소를 짓는 이진에게 기사가 대뜸 물어 왔다.
“애인이에요?”
“아. 아뇨. 친구예요.”
“어휴, 활짝 웃고 있길래 난 또 애인인 줄 알았지! 훤칠한 청년이 아직 애인 없어요?”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사적인 질문에 잠깐 당황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런 악의 없는 무례함은 또 오랜만이었다.
“아니면 뭐 아직 사귀기 전 친구 단계인가?”
“아뇨, 그것도 아닌데…….”
이진이 꼬박꼬박 답하자 순진한 청년을 놀리는 기분에 흥이 나는지, 기사의 질문은 더 짓궂어졌다.
“짝사랑? 짝사랑인가 보네. 아이고, 얼굴이 아까워라. 왜 그러고 살아.”
“음.”
“아니면 아가씨가 엄청 잘났나 보네. 그렇지? 어때, 예뻐요?”
기사가 낄낄 웃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진은 맹렬히 고민했다. 차라리 미열의 사진을 보여 주고 말까. 잠시 운전하는 사람을 강제로 돌려 앉혀 얼굴에 핸드폰을 들이미는 상상을 해 봤다. 이진의 상상은 그가 탄 택시가 사거리에서 대형 트럭과 충돌 사고를 내며 끝났다.
그렇다고 기사의 무례함에 화를 내기에도 곤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열을 애인으로 착각하다니. 황당하기만 할 뿐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음……. 예쁘긴 엄청 예뻐요. 근데 성격이 좀.”
그래서 적당히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미적지근하던 이진이 드디어 맘에 드는 대답을 내놓자 택시 기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치? 그럴 줄 알았어! 손님이 이렇게 잘났는데 당연히 상대방이 얼굴값 좀 하겠지.”
“막, 고집도 세고…… 잘해 주는 척하다가 수틀리면 또 엄청 뭐라 하고요.”
맞장구를 치는 김에 약간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근슬쩍 누군가의 뒷담화를 했다.
“제가 다른 애들이랑 놀면 엄청 질투하는데, 막상 자기는 삐끗하면 자기보다 어린애랑 놀러 가고.”
“그런 썩을! 어장이네, 어장.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 마음을 그렇게 가지고 논답니까? 손님이 아깝네. 미련 버려요! 난 잘생긴 청년이 기분 좋게 웃길래 서로 좋아하는 사인 줄 알았지. 세상에 여자 많아요.”
그런데 기사의 반응이 생각보다 거셌다. 갑자기 이진을 엄청난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게 아닌가. 이진은 당황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게, 걔가 저보다 어리기도 하고.”
“어리다고 얕보니까 되레 관리당하는 거야.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애가 착해서 주변 사람을 잘 챙기다 보니까 친한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그리고 가끔 짜증나게 구는 것도, 이해 못 해 줄 정도는 아니고요.”
이진은 더듬더듬 누군가를 변명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필사적인 태도에 택시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묘하게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손님. 세상 물정 잘 모른단 소리 듣지 않아요?”
말문이 막혀 더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보니 익숙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떠드는 사이에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이다. 이진은 적당한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말했다.
“……걔는 진짜 그런 애 아니에요!”
이진은 택시에서 내리기 전 참지 못하고 기사를 쏘아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오해만큼은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기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예쁜 사랑 하세요!”
오랜만에 느끼는 패배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하는 게 아니랬는데 그 간단한 상식을 잠시 잊어버렸다. 평소라면 가볍게 무시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친한 사람처럼 대화에 열중하고 말았다.
‘나 사실 아무한테라도 선승현 욕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진은 스스로를 고찰하며 터덜터덜 발을 옮겼다.
다음 날 이진은 미열이 사진으로 보여 줬던 반팔 유니폼을 입고 대형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이르게 집을 나와서 그런지 참가자들이 열 명도 채 도착하지 않아 분위기가 다소 썰렁했다.
스튜디오 중앙에 자리한 튼튼한 철봉 일곱 개와 그 뒤에 우뚝 선 팻말이 먼저 보였다. 이번에는 팀명을 정하지 않는다 싶었더니 팻말에 적힌 노래 제목들로 팀 구분을 할 모양이었다. 이진은 익숙한 제목이 적힌 팻말 쪽으로 다가간 뒤 바닥에 주저앉아 동료들을 기다렸다.
“오. 이진쓰!”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찬우였다. 찬우는 엉덩이를 씰룩이며 철봉을 지나 이진에게 다가왔다.
“이진아, 나 자취방 구했는데 오늘 거기서 영화 볼래? 집들이 선물 들고 와!”
찬우가 불쑥 말했다. 1라운드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찬우는 잦은 합숙과 형편없는 출연료,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쉽게 집을 계약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도 상위권 순위를 지키게 되자 이제야 마지막 라운드 진출을 확신했는지, 드디어 임시로라도 보금자리를 구한 것이다.
“정말? 어딘데? 언제 계약했어?”
“합숙 가 있는 동안 아빠가! 나 2위한 거 보고 신나서 바로 기차표 끊고 달려왔잖아.”
가족을 언급하며 찬우는 어린아이같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찬우는 1라운드에서 1위, 2라운드에서 2위를 지키며 데뷔가 확정시되는 분위기였다.
물론 팀 점수의 영향이 큰 앞 라운드 순위가 무대 점수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마지막 라운드의 최종 순위와 완전히 같으리라곤 할 수 없었지만, 부모님 입장에선 아이돌이 되겠다고 기획사에서 고생만 하던 아들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하니 감격스러울 테다.
“위치는 너희 집 근처야. 이 근처는 너무 비싸고 이동 시간 괜찮은 곳에 매물 많은 곳은 역시 대학가더라. 집은 좀 구리지만 어쩔 수 없지.”
찬우는 이진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신나서 계속 말했다.
“그리고 보고 싶은 영화도 구해 놨어!”
“아직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안 올 거야? 나 먹을 것도 막 사 놓고 그랬는데……. 이거 네가 안 먹으면 다 버려야 되는데?”
찬우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말투와 태도가 왠지 누군가를 연상시켰지만 이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