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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87화 (87/173)

87화

“형이 하고자 한 말의 결론이 뭐예요? 결국은 내가 개새끼라서 용납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아냐, 정말 아니야! 난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속사정 따위 말하지 말까.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승현이 아무 의심 없이 이진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진도 승현을 받아들여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3년분의 미래를 살고 온 이진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미래에서 따라온 죄책감과 의심을 오늘 털어놓지 않으면 승현과의 관계는 결국 제자리걸음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이진은 승현과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승현은 이진이 대체 왜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심취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었다. 서툰 시도는 오히려 승현을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오늘 말은 안 들은 걸로 할래요.”

승현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진도 허겁지겁 뒤따라 나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차디찬 경멸이었다.

“선승현! 승현아, 잠깐……!”

“설마 방금 본인이 한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 아니죠? 솔직히 형 미친 것 같아요.”

“미안, 미안하다고…….”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그랬어요. 형은 정말 이기적이에요.”

싸늘하게 쏘아붙인 승현이 이진을 지나쳐 걸어갔다. 펜션 방향이 아니었다. 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야, 선승현! 내가 정말 너 하나 엿먹이려고 이런 정성스런 개소리를 지어 냈다고 생각해?”

“그럼 제가 형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돼요? 와, 시간 여행자래. 신기하네. 그러고 나서 나사에 신고해요? 아니면 뭐 정신과 상담이라도 잡아 줄까요?”

“적어도 진지하게 생각해 줄 순 없어? 나는, 나도 혼란스럽지만 정말 너랑 잘해 보고 싶어서…….”

자신을 몰아붙이는 승현에 격분해서 덩달아 큰 소리를 내던 이진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뭐라도 다 받아 줄 것처럼 굴어 놓고 막상 중요한 순간에 꽉 막히게 구는 선승현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이진은 눈에 힘을 주고 승현을 노려봤다.

“……나 혼자는 못 하겠단 말이야.”

혼자서는 변할 수 없었다. 지난 과거를 설명하고 사과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진은 승현이 그 존재가 되어 주길 바랐다.

이진의 지난 3년을 이루는 핵심이자 지금의 이진에게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여 주는 그가 이진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승현과 같은 선상에서 동등한 시선을 나눌 수 있도록 그가 도와주길 바랐다.

“나도 형이랑 잘해 보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승현이 제 팔뚝을 잡은 손을 떨치며 말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목소리였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듯 건조한 목소리로 고요히 통보했다.

“그때 좀 노력해 보지 그랬어요.”

승현은 결국 이진에게 등을 보였다. 이진은 더 이상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 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든 아님 모든 걸 부정하며 이진을 미친 사람 취급하든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이진은 승현을 따라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진이 빠진 이진은 차에 기대어 어떻게 말을 했어야 승현이 화내지 않고 자신을 믿어 줬을지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승현의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진은 정말 딱 열 대만 때리고 지금이라도 대박 날 주식을 알아볼까 고민했다. 이진이 주식으로 성공을 한다면 승현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어 줄 것이다.

‘개새끼……. 내가 꼭 성공하고 만다.’

그의 입장에선 갑작스러웠을 고백임을 알지만 거절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진은 감정에 못 이겨 자꾸 굴러 떨어지려는 눈물을 꾹꾹 집어넣었다. 슬펐다가 화났다가 이대로 영영 멀어질까 불안해졌다가 감정이 널을 뛰었다.

그때 승현이 떠나간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네 이럴 줄 알았다.”

미열이었다. 이진의 앞에 선 미열이 펜션 방향으로 손짓했다. 이진은 바로 발을 떼는 그를 따라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부축해 줄까?”

이진은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친구 되는 거 참 어렵다.”

“……다 듣고 있었어?”

“아니. 정원에서 너희 둘 언제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어휴, 누가 가수 아니랄까 봐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미열이 능청맞게 분위기를 풀었다. 이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열의 말이 맞았다. 승현과 친해지는 길은 참 멀고도 고됐다.

이진에게 승현은 현재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늘 어딘가 불편했다. 별것 아닌 오해나 말실수로도 둘 사이의 분위기는 쉽게 날카로워졌으며, 승현은 사소한 갈등조차 절대 대충 묻어 두는 법이 없어 미열이나 찬우와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로 되고 싶은 게 친구인 걸까? 승현의 생각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이진을 유독 특별하게 취급하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진 자신은 어떠한가. 승현과 결국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걸까.

비즈니스적인 동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그 이상의 무언가.

쌀쌀한 밤바람에 감기가 걸릴까, 어두운 가로등에 발이라도 헛딛을까. 자꾸만 창문 너머를 바라보게 만드는 이 감정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걸까.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마음이 닿을 수는 있을까?

이진은 실망한 마음을 감추며 그런 생각을 했다.

***

3라운드의 합숙 촬영이 종료되었다. 이날은 2라운드 순위 발표식이 방영되었다. 참가자들은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방송을 시청했다.

놀랍게도 방송이 끝나자마자 바로 3라운드 티저가 나왔다. 각 팀의 경연곡 하이라이트 파트가 한 소절씩 이어져 마치 한 곡처럼 흘러나오고, 3라운드 주제인 ‘First Love’의 타이포그래피가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끝나는 짧은 영상이었다.

노래 가사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곱게 쌓인 목소리들이 동시에 첫사랑을 외치는 장면에선 약간 소름도 돋았다.

아직 정식 녹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연습하는 장면을 편집해서 사운드를 만든 것 같았다. 방송이 시간 싸움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촬영 후 편집을 거쳐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지고 있었다.

방송에 쓸 자료도 적고 편집할 시간도 부족하다. 이는 결코 참가자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체적인 필터링이 부실한 만큼 방송의 수위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번 주 합숙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들어가서 푹 쉬세요!”

여러 대의 승합차가 차례로 방송국 앞에 도착했다. 방송국 건물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불이 켜진 창문이 보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해 있던 메인 피디가 곧바로 일주일만의 귀가를 허락했다.

“이진 씨도 정말 수고 많았어요.”

지하철도 버스도 모두 끊긴 시간, 새까만 밤거리를 걸어 돌아가야 하는 참가자들이 마음에 걸리는지 피디는 한 명씩 이름을 불러 가며 손에 교통비를 쥐여 주었다.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날이 갈수록 가난해지는 참가자들은 뜻밖의 용돈에 지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었다. 덕분에 이진도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서울로 돌아왔다고 해서 스케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정이 넘어서 돌려보내 놓고 양심도 없나 싶었지만, 뮤직비디오 완성본을 당장 사흘 안에 업로드해야 했기에 참가자들도 군말 없이 제작진의 일정에 따랐다.

“우진이는 아직도 올림픽 대로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대.”

“어휴, 지하철 타지……. 출근길에 택시를 타고 그러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참가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스튜디오에 집합했다. 여러 가지 일정 중 가장 급한 건 역시 음원 녹음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진이 막 녹음을 끝냈을 무렵, 우진이 헐레벌떡 녹음실 안으로 들어왔다.

“딱 맞춰서 왔네. 이제 너만 녹음하면 끝나.”

“네? 벌써요?”

“지금 완전 속전속결이야. 이진이는 한 번에 끝냈어.”

미열이 목소리를 낮추고 우진에게 속삭였다. 녹음 기사들은 일정 핑계를 대며 가사를 틀리거나 심각한 음 이탈이 나는 수준만 아니라면 참가자가 요구를 해도 재녹음을 해 주지 않았다. 녹음 기사의 매서운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우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꾸물꾸물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완전 멍청이같이 불렀는데…….”

“형은 원래도 그랬어.”

“너도 콧소리 장난 아니거든?”

“너희 둘 다 난리였어! 진즉에 노래 연습 좀 하지 뭐 했냐?”

보원과 현기가 서로를 깎아내리자 미열이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이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실력이 모자랐거나 노래가 어려운 수준이었다면 이해했겠지만 두 사람의 부진은 순전히 연습 부족이었다.

“아무리 연습했어도 한 큐에 완벽하게 할 수는 없잖아!”

현기가 투덜거리자 미열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매 라운드마다 라이브 무대를 진행해 왔으니 유별날 것도 없는데, 노래에 자신이 없는 참가자들로부터 많은 불만이 쏟아졌다.

‘나한텐 나쁠 거 없지만…….’

보컬이 주가 아닌 이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결과물이 좋지 않을수록 이진의 탄탄하고 안정적인 보컬 실력이 도드라질 건 자명했다.

“이진 씨, 차 대기해 뒀어요.”

그때 제작진이 문을 열고 이진을 찾았다. 오늘 아침, 아직도 미세하게 다리를 절뚝이는 이진을 본 제작진의 강한 주장으로 방송국 지정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게 되었다. 비용을 방송국에서 대준다고 하니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간단히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스태프를 따라 나가려는데 순간 시야에 무언가 걸렸다. 녹음 내내 존재감 없이 얌전히 찌그러져 있던 승현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병원 간다니까 걱정은 되냐?’

이진은 승현을 지긋이 노려보며 녹음실을 벗어났다.

어제의 대화 이후 그는 은근히 이진과 거리를 두었다. 차라리 대놓고 무시했다면 따지기라도 할 텐데, 이진을 피한답시고 하는 행동들이 너무 미묘해서 아무 말도 못 했더랬다. 애초에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눈 맞춤을 피하고, 일부러 멀리 떨어져 앉고.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만 반대로 말을 걸지는 않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오늘 아침 녹음까지 줄곧 그랬다.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진은 당분간 승현의 냉대에 익숙해질 마음의 준비를 갖췄다.

‘하여간에 속 좁은 자식 같으니라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시간 여행 좀 할 수도 있지.’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는 믿는 척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승현이 어떤 생각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가 이진의 말을 믿지 않으며, 이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함부로 언급한 것에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아예 해명을 듣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어쨌든 모처럼 분위기 좋게 화해 중이었는데 내가 초를 치긴 했지…….’

끝을 모르고 늘어진 생각이 자책으로 이어지자 이진은 승현의 태도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항상 남들의 두 배로 감정을 소모하니 매사 우울한 기운을 풍길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잘못한 건 인정하고, 아닌 건 깔끔히 남 탓을 해 버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승현의 냉담한 태도를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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