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드디어 첫 마디를 내뱉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진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빠르고 격렬히 요동쳤다. 그러나 고심 끝에 내뱉은 충격적인 고백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듣는 이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승현은 이진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주변을 살필 정신이 없었던 이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설명했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고 원래는 윈올에 출연한 적 없어. 캐스팅을 받긴 했지만 기분 나빠서 걷어차고 바로 취직했거든.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몰라. 하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3년 전으로 돌아온 건 확실해.”
“형, 무슨 꿈이라도 꾼 거예요?”
농담치고는 너무도 진지했다. 승현은 폭주하듯 믿기 힘든 주장을 늘어놓는 이진을 향해 상식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진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나는 분명히 과거로 돌아왔어.”
“장난치고는 너무 뜬금없는데…….”
“아니, 진짜 돌아왔다니까?”
승현은 계속해서 이진의 말을 부정했다. 이진은 자꾸만 말을 반복하게 하는 승현이 답답했지만, 곧 개의치 않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왔다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일 터였다.
“선승현, 잘 들어.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미래에서 너는 이 프로그램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1위로 데뷔했어. 기억나는 데뷔 멤버는 백미열, 한찬우, 김진영. 그리고 같이 데뷔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하늘은 마지막 방송에서 너와 1위를 겨뤘고.”
“그게 무슨…….”
“너는 피치 엔터랑 계약했어. 정식 데뷔 그룹명은 트라이엄프고 아마 백미열이 지었을 거야. 경연곡은 전부 데뷔 앨범에 수록됐지만 데뷔 타이틀곡이자 첫 번째 활동곡은 일반인 대상으로 공모를 받았어.”
이진은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다시는 하지 못할 고백이었다. 외롭고 치열하게 살아온 3년. 거짓말처럼 사라진 3년을 지워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지금의 이진을 이해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 곡을 만든 사람이 나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진은 급격히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너무 흥분했다. 승현의 반응은 확인도 않고 혼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허덕거리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는, 취직한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곡 중 하나를 다듬어서 회사 이름으로 공모한 거지만.”
이진은 차분히 덧붙였다. 여태까지 자신이 그 곡을 작업했다는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가, 승현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큰 희열이 일었다. 드디어 잘못 끼워진 퍼즐을 바른 자리에 끼워 넣은 것 같은 충족감이 들었다.
그러나 마주 본 승현의 표정은 이진의 상상 이상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해가 안 돼요. 대체 왜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이건 나한테 정말로 일어난 일이야.”
뒤늦게 이를 본 이진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승현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어적인 자세로 이진을 멀찍이서 관찰했다. 차가운 시선이 그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얼음 창이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스물네 살로 돌아왔지만 스물네 살의 유이진은 아니야. 너랑 가깝게 지내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았던 3년을 없는 셈 치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야 깨달은 거야. 그게 불가능하단걸.”
승현은 불신조차 하지 않았다. 믿고 말고를 논할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현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부드러운 온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진은 냉철하게 문제를 분석하기 시작한 그를 붙잡고 어떻게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날 한 번만 믿어 주면 안 될까?”
“저는 지금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믿는다고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이진은 새삼 승현의 냉철함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진짜 미래에서 왔다고! 왜 못 알아듣는 거야!”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하아.”
승현도 이진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인 듯 말하다 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진은 구제불능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조마조마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요. 그렇다 쳐요. 그럼 인터넷 소설 같은 소리 말고 현실적인 증거라도 대 봐요. 과거로 오자마자 주식 투자 해 둔 거 있어요? 뭐 로또에 당첨은 안 된 것 같고…… 과거로 오면 당연히 할 법한 것들 있잖아요.”
“아, 아니?”
이진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이 무렵의 유행을 떠올려 봤다.
“아. 조만간 팅톡이라는 어플이 엄청 유행해! 너희 데뷔하자마자 광고 찍었던 거 기억나.”
“그걸 딱히 증명할 방법은 없는 거죠? 투자를 했다거나 비슷한 사업 아이템을 팔았다거나.”
“그, 그치.”
그런 걸 해 뒀을 리가 없다. 이진은 뒤늦게 적금을 깨고 주식을 들었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사실 연예계 쪽을 제외하면 아는 게 없었던 터라 3년 내의 정보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승현의 입에서 나온 현실적인 얘기를 듣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뼈저리게 와닿았다.
‘로또 번호 하나만 외워 둘걸.’
갑자기 자신이 무계획적이고 무능해진 것 같았다. 역시 꿈을 좇고 어쩌고 할 게 아니라 앞으로 히트 칠 노래들을 비싸게 팔아먹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이진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들을 털어 버렸다. 애초에 윈올에 참가하면서도 선승현을 만날 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던 자신이다. 불과 며칠 전에 백미열을 만났음에도 아주 가깝고 당연한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했다. 영리하거나 계획적이지 못 하고 눈앞의 목표만을 바라보는 성실함은 이진이 타고난 천성이었다.
머릿속을 말끔히 비워 낸 이진은 곧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승현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다. 녀석과 관계돼 있는 것일수록 좋았다.
“나, 난 네 새아버지가 선훤 그룹 오너 일가인 것도 알고, 네가 고등학생 때 패싸움으로 학교 폭력 위원회에 불려 간 것도 알아! 그리고…… 그 사실을 네 새아버지 힘으로 덮어 버린 것도 알고 있어.”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듯 냉랭하던 승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는 이진에게 섣부르게 화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혹시 인터넷에서 이상한 글이라도 읽었어요? 갑자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언뜻 담담하게 들렸지만 이진은 승현의 목소리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돌을 얹은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졌다. 하지만 이진은 늘 침착한 승현이 유일하게 반응하는 약점을 헤집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곧 비밀이 아니게 될 정보들만이 그의 경험을 입증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은밀하게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머지않아 수면 위로 올라올 거야.”
“차라리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날 싫어하고 싶다고 말해요.”
방송 초반부터 알게 모르게 루머에 시달렸던 승현은 쉽게 이진을 믿지 않았다.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직감이 뒤늦게 들었다. 차 안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멈출 수 없었다.
“내 말 좀 들어! 너를 싫어하고 싶어서 이런 거짓말을 꾸미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은 좀 비상식적인 구석이 있잖아요.”
“넌 데뷔 전부터 언론에게, 대중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았어. 네 모든 행동이 도마 위에 올랐거든. 네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많은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헐뜯었어.”
그때는 정말 그랬다. 갓 연예계에 발을 들인 아이돌이 뭐 그리 흥미로웠던 건지, 사방에서 그에 대한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고작 스물두 살에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사람과 끔찍이 혐오하는 사람이 넘쳐 났다.
“그래도 마지막에 우승하는 건 선승현, 바로 너야.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승한 건 너였어.”
방송을 보지 않던 이진조차 치가 떨릴 만큼 승현은 공격적으로 깎아내려졌고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은 점점 살이 붙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우승을 차지했다. 무엇도 그를 상처 내지 못한다는 듯 그는 태연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그를 향해 쏟아지는 관심을 받아 냈다.
참으로 눈부신 사람이라 생각했다. 고작 채널을 돌리다 잠깐 스친 정도로도 승현은 이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진은 한순간에 그를 질투하고, 또 동경하게 되었다. 이진이 포기해 버린 꿈을 이뤄 낸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승현이 재벌 일가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마도 동경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진은 아직도 그 시절을 선명히 기억했다.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살며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씌우려 해도 그 격렬한 감정을 영영 잊을 수는 없었다.
“데뷔 3년 후에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이 그룹을 탈퇴해 버렸지만.”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승현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듣는 이를 배려하지 않고 해야 할 모든 말을 쏟아 낸 이진은 침묵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승현의 입이 열렸다.
“……형도 나를 미워했어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지만, 이진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만난 적도 없는 나한테 차갑게 굴었던 거였어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참았다.
“그때는, 너를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나한텐 필요한 일이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사실로 믿었던 게요? 지금 형한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자신의 비참함을 누군가에게 전가하지 않으면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시기였다. 대학이라는 눈앞의 목표를 완주하고 나서도 쉼 없이 계속 달려야만 했을 때, 이진은 스스로를 어찌하지 못할 만큼 방황했다.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선승현이었다. 승현을 보며 이진은 새로운 꿈을 키웠다. 비록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라고 말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이진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널 미워하지 않고는 내가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손가락질했다 사과하려 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놓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단정 지었다고, 필요해서 미워했을 뿐이면서 널 미워할 대단한 이유를 만들어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고.
진짜 너를 조금씩 알아 가면서 그게 염치없는 짓거리였음을 깨달았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진실에 대해 물어보고자 했다. 승현의 입으로 진실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승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형은 처음이랑 달라진 게 없네요.”
승현이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피곤함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이진의 진심은 결국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채 승현을 밀어내기 위한 변명으로 전락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