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85화 (85/173)

85화

이번 개인 인터뷰 세트는 거실에 마련되었다. 한 명이 인터뷰를 하는 사이 나머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부담스러운 환경이었다.

“승현 씨 옷에 주름 이거 뭐지? 갈아입어야겠는데.”

제이슨이 주체하지 못한 혈기는 고스란히 옷 주름으로 남았다. 주름 모양만 보고도 무슨 일을 있었는지 쉬이 추측할 수 있어 승현은 인터뷰 전에 스태프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이 옷 단추가 뒤에 달렸어요.”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던 승현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도움을 요청했다. 스태프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머. 승현 씨 등에 무슨 손자국이……. 이것도 설마 몸싸움하다가 그런 거예요?”

“아, 이거는 이진 형이…….”

이진은 화장실에서 오가는 대화에 민망해져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옆에 앉은 미열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개인 인터뷰는 간단했다. 이번 라운드 컨셉인 첫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경연곡을 처음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특별 콘서트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땄다. 질문만 듣고도 어떤 무대가 중점적으로 방송될 예정인지 얼추 감이 왔다.

“사고가 났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어김없이 이진의 사고에 대한 질문이 시작됐다. 정말 놀랐다, 큰일 나는 줄 알았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진이 결국 배역을 수행하지 못한 건 아쉽다. 비슷한 요지의 말이 다른 표현으로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겁이 덜컥 났어요. 승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진도 자신의 사고에 대해 같은 말을 해야 했다. 인터뷰는 늘 불편하기만 했지만 남에게 속마음을 적절히 포장해 들려주는 일도 익숙해졌는지 제법 수월하게 말이 나왔다.

“그래도 그 스태프 분이나 승현이, 찬우. 모두 큰 부상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죠. 저는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수 있던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특히 이진은 이미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자 신경 썼다. 그가 가장 논란이 되긴 했지만 자신만이 다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자 일부러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우진이가 센터를 맡는 건 사고 전부터 논의하고 있었던 일이고, 갑작스런 상황에도 정말 잘해 줘서……. 음, 아쉽지는 않아요.”

그리고 우진이 억지로 센터 역을 떠맡은 게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부상당한 유이진을 대신해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우진’에게 돌아가게 될 폭력적인 관심들에서 그를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승현이나 미열이 이런 이진의 생각을 듣는다면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말했을 거다. 어찌되었든 이진은 이 일을 어른스럽게 대처하고자 했다. 늘 잘못된 선택뿐이던 인생에 모처럼 올바른 일을 했으니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음번에는 완전히 회복된 컨디션으로 완벽한 무대를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진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개인 인터뷰가 종료되었다. 헐렁한 모습으로 일상을 공유하던 동료들이 각 잡고 앉아 아이돌을 연기하는 모습은 민망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래서 이진은 늘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까지 이 단계를 어색해하는 건 그뿐인 듯 다른 이들은 서로의 인터뷰를 흉내 내며 놀려 대기까지 하지만.

이진이 자신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동료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할 때, 배턴 터치하듯 찬우 팀이 펜션 안으로 들어왔다.

“오! 우리가 일찍 왔나?”

“딱 맞춰 왔네.”

찬우 팀은 뮤직비디오 퀄리티를 높여 보고자 야심차게 이진 팀을 섭외하고 동선을 맞춰 보던 바로 그날 터져 버린 사고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새로운 기획도 접어야만 했다. 게다가 촬영장 겸 숙소로 사용하던 펜션마저도 으스스한 사고 현장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이진 팀 다음가는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와글와글 활기찬 분위기를 보니 마냥 침울해하진 않은 것 같았다.

“이진아, 촬영 잘 했어?”

가장 앞에서 걸어 들어오던 찬우가 이진을 발견하고는 바로 양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덕분에 그가 이진을 가슴팍에 가둔 채 꽈아악 껴안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고 말았다.

“승현이가 우리 이진이 업고 다녀야 되는데. 그지?”

찬우가 방금 전까지 엄숙하게 다뤄진 화제를 능청스럽게 언급했다. 그에게는 한 공간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이렇게 악의 없이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찬우가 유일했다.

“야, 말도 마. 아까도 선승현이 유이진 화나게 해서 결국 얻어맞았잖아.”

“뭐? 승현이가 우리 찐찐 화나게 했다고? 이리 와, 이놈! 찬우 형이 혼내 줄게!”

미열의 고자질에 찬우가 맹수처럼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승현에게 달려가 팔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그의 웃긴 행동을 가만히 무시했을 승현이 이번에는 찬우가 ‘왕!’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자 드물게도 잔뜩 당황해선 비명을 질렀다.

그냥 흉내만 내는 게 아니고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어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뿐이지 정말로 깨물린 것 같았다.

“이놈! 이놈, 혼내 준다!”

“아,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온몸을 물어뜯기는 처지가 된 승현이 찬우 팀 다른 멤버들에게 물었다.

“아까 뭐 웃긴 영상 본 거에 꽂혀서…….”

“하여간에 힘이 넘쳐 돈다니까.”

승현의 기분이야 어쨌든 찬우 덕분에 다 같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이진도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다.

***

여름이 다가와 조금은 해가 길어진 것 같았는데 밖으로 나와 보니 하늘은 이미 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7명은 또 나란히 쓸데없는 잡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며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는 잠깐 얘기 좀 하다 갈게.”

숙소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승현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게 이진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았다.

“그래. 먼저 가 있을게. 차 놓치지 말고, 길어질 것 같으면 적당히 끊어.”

미열이 당부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마저 걸어갔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리웨이의 어리둥절한 얼굴과 현기와 보원의 호기심 어린 표정, 우진의 걱정스러운 눈빛, 미열의 뒷모습까지. 조금 멀어졌을 뿐인데도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승현은 이진을 펜션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로 데려갔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문을 열고 이진을 먼저 태우는 폼이 꽤 자연스러웠다.

“잠깐 카메라 없는데서 대화하고 싶다고 하고 빌렸어요.”

“누가 뭐래?”

이진은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승현을 바라봤다. 둘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진은 몸을 좌석에 기댄 채 승현이 준비가 되길 기다렸다.

그날의 내기 이후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그동안 이진과 가깝게 지낸 승현과 지금 차분한 얼굴로 말을 고르고 있는 승현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제 와서 내기니 뭐니 하는 건 아무런 의미 없겠죠? 서로 간에 지킬 마음이 없던 것 같은데, 없었던 일로 할래요?”

승현이 처음 꺼낸 말은 이진이 가장 바라던 말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선 잘못된 것부터 바로잡고 싶어요.”

긴장되는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이진이 아닌 무릎 위에 모은 제 손을 응시했다. 이진은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고개를 들어 승현의 표정을 읽었다. 내리깐 눈매와 그 위로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래.”

제법 산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런 시시껄렁한 내기 따위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불안에 떨면서도 아닌 척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니. 서로 간에 너무도 미련했다. 승현은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진을 마주봤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매번 형한테 심술 부려서 미안해요.”

“괜찮아.”

“원래는…… 형이 날 좋아하게 만들어서 그 내기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진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설마 그런 꿍꿍이도 꾸밀 수 있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미련할 정도로 곧은 천성을 지닌 승현이 꾸민 계략인 만큼 참 허술했다.

스스로를 그렇게나 몰랐던 건지, 그는 친해진 사람을 모질게 내칠 만큼 냉혈한이 아니었다. 승현이 정말로 이진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내기에서 승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내기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형이랑 잘 지내게 되니까 그냥 다 재밌고, 별 얘기 안 해도 같이 있으면 기분 좋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더 욕심이 나고.”

이진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너무 이진의 예상대로였다. 승현이 이진을 잘 알 듯 이진도 승현을 제법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은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자존심이 상해서 괜한 핑계를 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됐고…… 그것 때문에 형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승현의 솔직한 고백과 사과는 그동안 이진의 마음고생을 모두 보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은밀한 복수보다는 솔직한 대화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진은 왠지 목이 막혀 오는 것 같아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이제 안 그럴 거지?”

“당연하죠. 저는 처음부터 형이랑 잘 지내고 싶었어요.”

“너는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러움에 던진 타박에 승현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며 이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툭, 느껴지는 무게에 이진은 순간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형. 저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요?”

“가, 갑자기 왜 이래?”

이진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승현을 슬쩍 밀어 냈다. 갑자기 너무 다가오니까 움찔 놀란 몸이 저절로 그를 밀어 냈다. 승현은 살짝 밀려난 상태로 이진을 바라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 형이 정말로 프로그램 하차할까 봐 정말 걱정했어요.”

하필 사고 직전에 말다툼을 하고 말아서 이진이 크게 다쳤을까 봐, 그런데 그게 자신의 탓일까 봐. 또 이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걱정 안에 담긴 많은 의미를 이해한 이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승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살짝 움찔거리는 감각이 간질간질하게 전해져 왔다. 승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려는 찰나, 이진은 마음을 굳게 먹고 팔에 힘을 줘 머리를 쑥 밀어 냈다.

“형…….”

“그 전에 내 얘기부터 들어.”

이진의 단호한 태도에 승현이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이진이 안아 주지 않아 불만인 표정이었지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듣고 승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괜히 기분을 더 좋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추락의 충격이 더 큰 법이니까.

“솔직히 별로 안 듣고 싶어요.”

“승현아.”

“형이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니까 더 불길한데. 다음에 말하면 안 돼요?”

긴장된 얼굴로 이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승현은 눈치를 살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다시 말했다.

“저 진짜 지금 기분 좋은데. 조금 더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요.”

“……이건 나한테도 중요하고, 더 늦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얘기야.”

“알았어요, 그럼. 들을게요.”

끝내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은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결국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 사실, 3년 후 미래에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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