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한편, 이진은 제이슨이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에겐 각자의 길이 있고 갈림길을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개인의 영역이 아니던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서로 간에 더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야! 매번 이런 식으로 성질내면 누가 너랑 같은 팀 하고 싶어 하겠어!”
“형이 먼저 배신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뱉은 진영과 제이슨은 너 나 할 것 없이 괴로워 보였다. 그때 제이슨에게서 진영을 가리며 한 발자국 앞에 서 있던 승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형, 자진 하차 한다는 게 사실이야?”
비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진영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은 듯 한숨을 쉬더니 이진이 선 쪽을 흘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다. 그렇게 됐어.”
“갑자기?”
“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어쩔 수 없었어.”
“웃기지 마! 제대로 끝내고 가라고!”
제이슨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땅을 차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서든 진영이 남아 있길 바라는 듯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제이슨이 진영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진에게는 늘 퉁명스럽던 그가 타인에게 필사적으로 집착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조금 놀라웠다.
진영은 막무가내로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듯 제이슨을 바라봤다. 이진은 그 시선에서 서로를 향한 감정의 온도차를 느꼈다.
“제이, 넌 늘 아이돌이 되고 싶었으니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난 이 기회를 걷어차고 여기 남아 있을 만큼 확신이 없어.”
진영은 얼마 전 이진에게 털어놓았던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전달했다.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막막함. 여태까지는 이 길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운이 좋아 데뷔하기만을 기도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주어졌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음악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진귀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승현은 어느 정도 진영이 떠나고자 하는 이유를 납득한 것 같았다. 화를 못 이겨 마구 소리를 지르던 제이슨도 어느새 진정된 듯 더 이상 달려들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분노한 표정으로 진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가지 마……. 이렇게 가면 이제 우리랑은 두 번 다시 같이 무대 할 수 없잖아. 그런, 그런 건 싫다고! 내가 맨날 화내서 미안해……. 내가 잘할 테니까 제발, 먼저 가지 말고 마지막까지 같이하자.”
안쓰럽게도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눅눅히 젖어 갔다. 이진은 그 필사적인 외침에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그의 기억 속 제이슨은 늘 화가 난 사람이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멤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날카로운 말을 쏘아붙이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처럼 못되게 굴었다.
이진은 보통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카메라 앞에서도 멋대로 구는 모습을 보며 내심 제이슨의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면모가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2라운드에서 그를 고생시켰던 채일이나 주헌처럼 강압에 의해 잠시 성질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근본은 바뀔 수 없다 믿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진영이 정말로 떠날까 두려워하며 스스로 변하고자 했다. 물론 필사적인 마음에 아무렇게나 뱉은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이 변한다면 진영이 마음을 돌릴 거라 생각하는 것부터가 몹시 자기중심적이긴 했다.
그래도 고작 몇 개월 만난 타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저만큼 감정적인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미안해.”
그러나 절절한 애원에도 진영의 사과는 건조하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진영은 남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을 짐작은 해 보지만 결코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지는 않는 타입이었다.
선명한 온도차에 이진은 제이슨이 안타까워졌다.
“제이슨, 이제 그만해. 형도 이제 그만 가.”
승현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눈치를 보던 미열이 재빨리 저 멀리 나가떨어진 캐리어를 주워다 진영에게 건네줬다.
“이왕 가는 거 성공해라. 연락하고.”
“그래. 고맙다.”
처음엔 가장 사이가 좋던 미열과 진영의 작별 인사는 매정하리만큼 간결했다. 승현도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진영은 등을 돌린 채 두어 발자국을 걷다가 뒤를 돌아 이진을 바라봤다.
“이진아, 저번에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새로 도전할 수 있게 됐어.”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진영은 후련한 얼굴로 다시 큰길가까지 캐리어를 끌고 걷다가 스태프가 미리 불러 둔 듯한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제이슨은 눈앞에서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고성을 지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쏟아 냈다.
“제이슨. 우선 숙소로 돌아가자. 차분히 가라앉히면 좀 나아질 거야.”
분노와 상실감에 이성을 잃어버린 채 날뛰는 제이슨에게 다가간 건 어김없이 승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뭐가 나아져? 당장 음원 녹음도 안 하고 도망간 새끼 때문에 이번 라운드 통째로 말아먹게 생겼는데, 뭐가 나아져!”
제이슨은 자신을 달래는 말에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제법 덩치가 큰 그가 흉흉한 기세로 승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을 때, 이진은 마치 자신이 위협당하는 듯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나 승현은 태연히 제이슨을 진정시켰다.
“너 지금 방송 때문에 화난 거 아니잖아.”
“네가 뭔데 아는 척이야? 매번 그딴 식으로 잘난 척하지 마. 재수 없는 새끼야.”
미열이 제이슨의 한국어가 몇 달 사이 부쩍 늘었다고 중얼거렸다. 이진은 사지도 멀쩡하면서 승현을 도울 생각은 안 하고 이상한 소리나 구시렁대는 미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상의 한마디 없이 떠나면 당연히 속상하지.”
“누가 그런 새끼를 좋아한다고…….”
갑자기 분노 말고 다른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제이슨이 말을 멈추고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어 바들바들 떨리는 턱이 애처로웠다.
“여기서 더 화내 봤자 기분만 더 안 좋아질 거야.”
“……위하는 척하지 마! 또 나만 욕하고,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만들려고 그러지?”
화내는 사람은 혼자 내버려두는 게 상책인 것을.
기어이 제이슨이 멱살을 틀어쥐었다. 줄곧 태연한 표정이던 승현은 깜짝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이진은 승현의 두 배로 커다래진 눈을 하고 제이슨에게 외쳤다.
“너 미쳤어? 얼른 그 손 안 놔!”
“야, 적당히 해!”
“착한 척하는 놈들!”
미열이 제이슨을 한 대 후려치려는 이진을 잡아 말리며 말했다. 물론 이진도 한번 잡아 본 적 있는 멱살이지만 남의 손에 붙들린 승현을 보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솟구쳤다.
“여기서 누가 네 욕을 해. 솔직히 김진영이 배신자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거 다 알아. 네 팀원들도 카메라 앞이니까 멋있게 보내 주는 척했겠지만 속으로는 뒤집어지게 욕하고 있을걸? 걱정하지 마. 지금 욕먹을 사람 너 아니야.”
미열의 냉정한 평가에 제이슨은 혼란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봤다.
“맞아. 김진영 씨가 잘못했지. 다들 제이슨 이해할 거야.”
“그래도 폭력을 쓰면 안 돼요.”
우진과 현기가 차례로 말했다. 이진은 여전히 화가 나서 외쳤다.
“알아먹었으면 당장 손 떼라고!”
결국 제이슨은 멱살을 잡은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저항도 안 하고 얌전히 붙들려 있던 승현은 풀려나자마자 한숨을 쉬더니 주름진 목 부분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넌 데뷔하기 전에 손버릇부터 고쳐야겠다.”
승현이 끝까지 얄밉게 입을 놀렸다. 이진은 기어이 미열의 팔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가 등짝을 퍽 때렸다.
“너나 입조심 해! 혼자 내버려두면 알아서 풀릴 걸 가지고 애를 왜 도발하고 그래!”
동생한테 멱살을 잡히고, 또 풀려나자마자 형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승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형?” 하고 이진을 불렀다.
그때 제이슨 팀 펜션 현관문이 열리고 멤버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이진은 한참 소란일 땐 틀어박혀 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비추는 그들이 참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화난 제이슨이 정말로 진영을 폭행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를 말리지도 않았는지. 차라리 제이슨이 자멸하길 바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무리의 가장 앞에는 박희영과 이진연이 서 있었다. 희영은 제이슨을 보며 뒷머리를 긁적이다 겨우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팀 먼저 서울로 이동하기로 했어.”
제이슨이 뭐라 반응을 하기 전에 진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도 우리가 맘에 쏙 드는 게 아니겠지만, 우리도 너처럼 툭하면 발끈하는 리더 따르기 힘들어. 그래도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모양이니까…… 같이 잘해 봐야지.”
“그래. 김진영 그 자식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래. 남은 사람들끼리도 잘 할 수 있단 걸 보여 주자. 응?”
제이슨이 리더긴 하지만 아무래도 의지가 되는 타입은 아니라 오히려 팀원들이 제이슨을 격려하는 요상한 모양새가 됐다. 다행히 제이슨은 팀원들에게까지 화풀이를 하지는 않고, 짐을 챙기러 들어가 보라는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래도 여전히 센 척은 하고 싶은 건지 펜션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흘끔흘끔 뒤를 바라보며 승현을 노려봤다.
“미안하다. 괜히 얽혀서 욕봤네.”
“아냐. 김진영도 나가고 리더도 저 모양이니까 많이 심란하겠다.”
미열과 희영이 대표로 적당한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표정에서 승현 팀이 제이슨과 진영 사이에 끼어든 걸 못마땅해하는 티가 났다. 미열의 말투에도 묘하게 비꼬는 어조가 묻어 있었다. 그사이에 진연이 우진과 이진에게 손 인사를 했다.
“이진 형은 오랜만에 보네. 다친 덴 이제 괜찮아?”
“아,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진연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반갑게 말을 걸었다. 1라운드 초반 센터조에서 잠깐 어울린 이후로는 전혀 접점이 없었는데도 친근하게 대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적절한 반응을 돌려주기는 어려웠다. 진연도 이진에게 별 기대는 않았는지 바로 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은 촬영 힘내고. 서울 올라가서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한 대가 도착해 그들을 태워 갔다. 남겨진 이들은 각자 친분이 있는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백라이트 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이 떠나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송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미열이 한숨 섞인 혼잣말을 했다.
“그나저나 이진이 형은 김진영 씨 나갈 거 미리 알고 있었어?”
“아니. 몰랐어.”
“그래? 김진영 씨가 형한테 고맙다고 하길래 이미 아는 줄.”
현기가 추궁하듯 물었다. 순간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이진이 어물어물 대답할 말을 찾을 때, 잔뜩 지친 스태프가 일행을 데리러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들어와서 바로 개인 인터뷰부터 딸게요.”
스태프는 아까 전 단호한 태도와는 달리 미안하다 연신 사과하며 저자세를 취했다. 방송 안전성 논란에 하차해 버린 인기 참가자, 주먹질이 오고 갈 뻔한 긴박한 상황. 실수로 말이 새어 나가기만 해도 충분히 욕먹기 좋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