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83화 (83/173)

83화

촬영은 쉬는 시간을 포함하여 약 다섯 시간 만에 종료됐다. 뮤직비디오 촬영치고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과연, 이진이 없는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우진은 단순히 행동 지문을 몸으로 옮겼던 이진과는 전혀 다른 뛰어난 연기를 보여 줬다. 안무와 안무 사이에 동선 이동처럼 뭐라도 틈이 생기면 그 틈을 연기로 꽉꽉 채웠다. 춤도 노래도 특출나지 않은 우진이 자신의 개성을 어떻게 살릴지 많이 고민한 티가 났다.

그간의 연습만으론 실력 차를 메울 수 없었기에 춤으로 따진다면 이진이 낫다고 할 수 있겠으나 뮤직비디오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우진은 결코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또 본인 말로는 연기에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그 말을 한다면 겸손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려서 그런가. 아주 생기가 넘치네.’

뒤에서 우진을 바라본 이진의 감상이었다.

이진이 ‘아이돌 유이진’이 첫 데이트를 나가는 듯한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노력했다면, 우진은 ‘평범한 청년’이 첫사랑과의 데이트를 꿈꾸며 이것저것 준비하며 단장하는 것 같은 풋풋한 느낌을 주었다. 기본에 충실한 이진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었다.

‘저렇게 열심히 연습을 해 놨으니 막상 카메라 앞에 서기가 더 무서웠겠지.’

사소한 NG의 반복에 지쳐 가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지만,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우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달리했다. 이진은 그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은 이진이 무대 위를 떠나지 못하듯 진심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사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진이 멤버들의 응원을 받으며 데이트를 나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컷’ 소리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수백 번의 재촬영 끝에 드디어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난 걸 자축하기 위해 리웨이와 미열이 바구니에서 든 꽃잎을 머리 위로 뿌렸고, 나머지 넷은 한아름 꽃을 안고 데이트 길을 축복했다.

“어머! 정말 요정 같다.”

“자, 옷 갈아입읍시다.”

머리에 꽃잎을 얹고 품 안에 꽃을 가득 껴안고 있으려니 소품을 받아 가러 다가온 스태프가 이진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뒤로 스타일리스트가 협찬받은 의상을 수거하기 위해 참가자들을 재촉했다.

“그러게. 이진이 의외로 분홍색이 잘 받네.”

“이진 씨가 파스텔 톤을 잘 소화하더라고요.”

“저는요?”

“미열 씨는 블랙만 아니면 얼추…….”

미열이 이진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 주며 스태프와 잡담을 떨었다. 특유의 밝은 기운이 어두운 계열에서는 묻힌다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미열은 자신에게도 쿨하고 시크한 매력이 있다며 꼼꼼히 봐 달라고 닦달했다.

“잠깐 공지 있겠습니다.”

펜션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조급한 얼굴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 한 손에 든 일정표를 팔랑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10시에 서울 방송국으로 가는 차량 운행합니다! 그 전까지 펜션 사용 가능하시고, 분실물 생기지 않도록 짐 잘 챙겨 주세요! 혹시 먼저 귀가하실 분은 말해 주시면 시간 맞춰 택시 불러 드리겠습니다. 공식 일정은 종료되었으나 아직 펜션 내부 카메라 수거가 안 됐다는 점 참고해 주세요. 감독님 일행은…….”

“현장 정리 되는대로 우리 차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가기 전에 연락 한번 부탁드려요. 아, 그리고 지금 먼저 끝난 팀 추가 촬영 끝나면 이어서 이쪽 팀도 개인 인터뷰 진행합니다. 자세한 위치는 리더 통해서 다시 전달 드릴게요. 다른 팀들 일정이랑 겹치지 않도록 혹시 뮤비 비하인드 컷 찍으시더라도 6시 전까지는 마무리해 주세요.”

그는 전달 사항이 마무리되자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에휴……. 바쁘다, 바빠. 방송국은 저 짬밥을 먹고도 정신없다니까?”

감독이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철수 지시를 내렸다. 이진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용하지 않은 방 안에서 얌전히 대기했다. 승현과 보원은 힘이 남아도는지 돕겠다고 나섰지만 얼마 전 사고 때문인지 극구 사양하며 그들도 방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피곤하죠? 이왕이면 침대 있는 방으로 들어갈 걸 그랬네요.”

승현이 벽에 기대어 축 늘어진 이진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 연습량을 생각한다면 체력적으로 고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인 피로도가 심했다.

“어우. 인터뷰 같은 건 서울 올라가서 찍어도 될 텐데 귀찮게 여기서 이러냐.”

“그러게 말이야. 가뜩이나 짐도 많은데 인터뷰 판넬까지 이고 올 필요 있나.”

체력이 유독 안 좋은 미열과 현기가 나란히 불평했다. 둘 다 카메라고 뭐고 완벽히 무시한 태도로 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졌다.

“늙었어.”

스무 살 리웨이가 스물네 살 미열과 스물두 살 현기에게 손가락질하며 킥킥 웃었다.

“아니, 요즘 어린애들은 다들 왜 이러냐. 정하늘도 그렇고 지들은 나이 안 먹을 줄 아나?”

미열이 과장되게 투덜댔다. 그러나 딱 봐도 힘이 좋게 생긴 보원이나 의외로 운동량이 많은 승현을 제외하더라도 가장 활동량이 많았던 우진마저 아직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앉아 있었다. 진이 빠져 반쯤 죽어 가는 건 미열과 현기, 그리고 이진뿐이었다.

“나이 문제가 아니라 보컬 라인 체력이 허접인 것 같은데.”

보원이 껄껄 웃었다. 이진은 진지하고 무섭게 생긴 보원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는 게 어색했다.

이진이 지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승현을 훔쳐보았다. 틈만 나면 마사지를 해 준다고 덤비던 그가 오늘따라 얌전한 게 아쉬웠다. 멀쩡한 척하지만 뜨거운 조명을 쬐며 몇 시간이고 바짝 긴장한 채로 춤을 추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리라고 이진은 짐작했다.

6시가 되기 전 불러 준 장소로 다 같이 이동했다. 미열은 피곤해 죽겠다고 투덜대면서도 절대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우진은 오늘 촬영이 만족스러웠는지 아직까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서 왼쪽이에요.”

갈림길이 나오자 맨 앞에서 핸드폰을 보며 길안내를 하던 승현이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오늘의 개인 인터뷰는 뮤직비디오 촬영이 가장 먼저 끝난 팀의 숙소를 빌려서 진행됐다. 제작진 아지트나 다름없던 합숙소와는 달리 이 펜션 단지엔 마땅히 공용으로 사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쾌적한 참가자 숙소와 대비를 이룰 만큼 제작진 숙소는 각종 장비와 짐들로 가득해 도저히 촬영할 장소를 마련할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 프로그램이 제법 규모가 큰 편인 데도 이런 거 보면 참 방송이라는 게 전부 주먹구구야. 그렇지?”

“오늘 촬영 분이 당장 내일 본방 끝나자마자 업로드되니까, 뭐. 과장 좀 보태면 거의 생방송이지.”

미열의 말에 승현이 대답했다. 뒤에서 보원과 우진이 작게 웃었다. 제작진 등 뒤로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 것 같다가도,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면 어설프게 놓인 트랙에 간신히 의지해 폭주하는 기차를 어떻게든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려고 안달 내는 승무원들 같았다.

“아, 그나저나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이진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해가 기울어져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의 끝자락, 탁 트인 하늘 아래를 걸으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 하루 종일 갇혀 있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그나마 무뎌지는 것 같았다.

이번 라운드 촬영이 끝나면, 곧 매미가 우는 계절이 다가온다.

‘벌써 여름이구나.’

그들이 여유를 만끽하며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곳은 바로 제이슨 팀 숙소였다. 마침 근처에서 승현 팀을 마중 나온 스태프가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죄송해요……. 지금 분위기가 안 좋아서 그런데 잠깐만 저쪽 차량 안에서 대기해 주세요.”

“안에 무슨 일 있어요? 들어가 보면 안 돼요?”

“가급적 동선 겹치지 않도록 할게요.”

미열이 고개를 쭉 빼고 펜션 내부를 들여다보려 하자 스태프가 막아섰다. 평소보다 더 단호한 태도에 능청스런 태도를 유지하던 미열이 주춤했다. 아무래도 정말 심각한 일이 있는 것 같아 서로 눈치를 보며 맞은편 길가에 주차된 승합차에 올랐다.

“무슨 일이지?”

“잠만, 박희영한테 톡 해 볼게.”

미열이 핸드폰을 들고 액정을 두드렸다. 열심히 타자를 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은 답이 빨리 올 것 같지 않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 저녁, 승현과 대화를 나눠야 하니 정신 소모를 최대한 막아야 했다.

승현이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은 오늘 자신이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한쪽이 솔직하지 못한 관계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제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이진도 승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정리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어, 누구 나온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지겨워질 무렵,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현기가 외쳤다.

“누구야? 김진영 씨랑…… 저거 제이슨인가?”

아는 이름이 들리자 이진도 뒤늦게 눈을 뜨고 바깥을 주시했다. 창문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애들 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지켜보는데, 미열이 끙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야. 김진영 자진 하차한대.”

“뭐? 김진영이 왜? 이렇게 갑자기 나갈 이유가 뭐야.”

“나도 몰라. 제작진이랑은 이미 말 끝났고, 멤버들한테는 오늘 추가 촬영 찍으면서 얘기했다는데……. 제이슨이 그거 때문에 엄청 화나서 안에서 완전 소리 지르고 난리쳤나 봐.”

창밖으론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진영과 그 뒤를 뛰듯이 따라가는 제이슨이 보였다.

“자진 하차가 뭐야?”

“스스로 그만두는 거.”

“뭘 그만해?”

“이 프로그램…….”

리웨이의 질문에 우진이 멍하니 자진 하차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와중, 진영을 따라가던 제이슨이 대뜸 캐리어를 발로 뻥 차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멱살을 잡았다.

“미친……!”

“야, 야. 막아!”

현기가 호들갑을 떨고 미열이 다급히 허공에 손짓을 했다. 문 쪽에 앉은 승현이 차 문을 밀어 열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체격이 큰 보원이 조금 늦게 그 뒤를 따랐고 이진과 미열도 주변을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갔다.

“이 책임감 없는 자식아!”

“제이. 이미 끝난 얘기야. 진정 좀 해!”

“끝나? 누구 마음대로! 웃기지 마!”

먼저 달려간 승현이 제이슨을 막아 보려 했지만 무지막지한 힘에 밀렸다. 그는 결국 거친 손길로 진영을 밀쳐 넘어뜨렸다. 그래도 보원이 제때 달려든 덕분에 그 위로 올라타려는 건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승현이 바닥에 내쳐진 진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똑바로 선 진영이 분노로 씩씩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너 진짜 미쳤냐?”

“미친 건 너지!”

“그냥 좀 응원해 주면 안 돼? 나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야! 쉽게 한 선택이…….”

“네가 정말 우리를 생각했다면 이렇게 제멋대로 그만두면 안 되지!”

제이슨이 악에 받쳐 외쳤다. 자신을 막는 보원이나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진영만을 무섭게 노려보는 것에서 그가 진영의 하차를 얼마나 받아들이지 못하는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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