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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82화 (82/173)

82화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승현은 이진의 몸을 슬금슬금 밀어 부엌 안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카메라도 없고 마이크 소리도 잡히지 않는 나름 프라이빗한 장소였다.

“형 없는 동안 대화를 좀 해 봤는데, 이우진이 형을 엄청 의식하더라고요.”

“그래서요?”

“쟤가 평범한 응원이나 격려에는 별 반응이 없는데, 형 얘기를 하면 엄청 효과적으로 동기부여가 되길래…….”

“이름을 팔았다?”

승현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얼굴로 벽에 옆머리를 쿵 박았다. 이진이 대화를 들을지도 모른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몸을 기울인 탓에 이진보다 머리가 낮아진 승현이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황당하긴 했네요.”

“제가 음악 방송 같이 나가고 싶은 것도, 같이 데뷔하고 싶은 것도 형뿐인 거 알죠?”

승현이 웅얼웅얼 속삭였다. 진심으로 곤란해서 절절매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뒤에서 제 이름을 팔고 다닌 건 괘씸하지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진은 평소 쌓였던 감정을 해소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랑 데뷔 안 한다면서? 내가 너보다 순위 낮으면 알아서 꺼지라 그럴 땐 언제고.”

이진이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이자 승현이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너, 어제부터 나 피하던 것도 맞지?”

“아니, 그건…….”

“맞아, 아니야.”

승현이 버럭 화를 내는 이진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속삭였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간질간질 이진의 가슴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맞아요. 그런데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형이랑 대화하면 오늘 촬영 끝나고 대화할 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대화를 할 생각이었던가? 물론 이진은 자신이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할 예정이긴 했지만,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승현은 대체 무슨 말을 할 작정이었기에 이진과 거리까지 둔단 말인가.

“대체 왜? 무슨 말을 하려고?”

“제 속마음이요.”

승현이 수줍게 털어놨다.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살짝 말꼬리를 올리며 눈을 맞추는 모습이 흡사 청춘 멜로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옥상으로 불러내는 한 학년 아래의 후배 같았다.

‘아니, 이 자식 지금 뭐라는 거지.’

이진은 눈알이 굴러 떨어질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입 역시 적 벌어졌다.

“사실 저는 형을…….”

뒤이어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진을 간질이다 못해 아주 후려갈겼다. 아까부터 초조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이 빠르게 뛰었다. 이진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이, 이건……! 이 뒤는 위험하다!’

“잠깐!”

이진이 황급히 승현의 말을 끊고 외쳤다. 목소리가 조금 뒤집어졌으나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너 내가 분위기 못 띄울 것 같다고 했지!”

“네?”

“나, 날 우습게 봤겠다……!”

이진은 승현이 어이없어 반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앞을 가로막은 탄탄한 가슴을 밀치고 부리나케 모두가 모인 거실로 향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모양새였다.

“이우진!”

“네!”

이진의 부름에 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옆에서 손장난을 치며 그를 위로하고 있던 리웨이도 깜짝 놀라 뒤를 옆을 돌아보았다. 우진은 이진이 성큼성큼 걸어오자 벌떡 일어나 그 앞으로 가 섰다.

“우진이 너 잘 할 수 있어?”

“네, 네?”

“센터 잘 할 수 있냐고.”

대뜸 질문부터 던진 이진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무섭게 다그쳤다. 보원이 이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승현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죽이고 둘을 지켜보았다.

“모, 모르겠어요…….”

“똑바로 대답해. 정말 모르겠어? 센터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해. 할 수 있어?”

“자, 잘…….”

이진이 우진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곤 자꾸 바닥을 파고드는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이진은 4년제 예술 대학의 구닥다리 서열 문화를 이겨 내고 졸업한 세대였다. 이땐 교수부터가 간단한 압박 정도는 오히려 무대에 도움이 된다며 엄격하게 굴었다. 이진이 그 문화를 싫어해서 그렇지 보고 당한 게 있으니 이 정도 압박을 주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봐.”

“저, 잘 할 수 있어요.”

단호한 말에 우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슬쩍 승현을 곁눈질 했다가 다시 이진을 바라봤다.

“센터하기에는 부족한 거 아니야? 연습은 똑바로 했어? 괜히 전부 고생시키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저 지금보다 훨씬 잘할 수 있어요, 아니, 있습니다!”

우진이 분한 숨을 내뱉었다. 물기에 젖었던 눈은 조금씩 총기를 되찾아 또렷하게 그를 바라봤다. 예술대 재학생으로써 대학 내 선후배 문화가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다나까체를 쓰며 공손히 대답했다.

‘얘 나한테 반말하던 애 맞아? 너무 심했나……? 이러다 영원히 존댓말 하면 어떡하지.’

이진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믿어도 되겠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우진이 온몸에 바짝 기합을 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할게요! 훨씬, 잘 할 수 있어요. 형이 믿을 수 있게!”

“그럼, 그것만 생각해.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잘할 수 있는 거, 그것만 생각해.”

우진의 답에 이진이 표정을 풀고 방긋 웃었다. 그리고 세뇌하듯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네!”

“그래. 준비가 됐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떠넘기게 돼서 미안해.”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우진도 잔뜩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며 배시시 웃었다. 이진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될 것도 같았다.

관심받고 싶다. 화제의 중심에 서고 싶다. 더 좋은 배역을 얻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고 싶다. 이러한 바람들은 훌륭한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노력에 보답받지 못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되기도 한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필사적이고, 간절한 상황 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다가는 새로운 기회마저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현기가 지레 겁먹고 센터 자리를 다투지도 않은 것처럼 우진도 이번 일주일 동안 괜한 기대를 부풀렸다 접기를 반복하며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특히 이진을 유난히 신경 쓰는 우진에게 그의 자리를 넘겨받는다는 것은 심적으로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격려하는 게 선승현보단 낫겠지.’

이진은 고개를 휙 돌려 승현을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봤다. 그런 표정을 의도하고 지어 본 적이 없어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움직였지만, 승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야. 훈훈하다, 훈훈해!”

현기가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나팔 모양을 만들며 외쳤다. 보원도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이곳저곳에 쭈그리고 앉은 스태프들도 기분 좋게 웃으며 우진에게 덕담을 건넸다. 몇 사람들은 저들끼리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신호를 주고받았지만 곧 이 장면조차 촬영 중이란 생각에서인지 아님 알아서 납득했는지 적당히 어울려 호응해 줬다.

“쉬는 시간 끝! 다들 모입시다!”

“네!”

감독이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받고자 조금 이르게 촬영을 재개했다. 모두의 관심을 받느라 민망해진 이진은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잠깐 잊고 있던 통증에 놀라 걸음을 버벅거렸다.

“조심해요.”

살짝 다리가 꼬이긴 했지만 넘어질 만큼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현은 이진이 아주 빙판길을 걷다 미끄러진 것처럼 보이기라도 한 건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 응. 고마워.”

바로 세워진 이진은 놀란 티를 숨기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런데 오히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몸이 뒤로 기울였다. 툭, 무언가와 가볍게 접촉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진의 등에 승현의 몸이 닿아 왔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예요?”

“……무슨 말이야?”

“내가 믿어도 되겠어? 이런 거요.”

승현이 귓가에다 대고 물었다. 이진은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척으로 그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걸 느꼈다.

“대학 가면 전부 배우는 거야.”

“저도 대학 다녔어요. 한 학기 정도지만.”

“어쩌라고.”

이진이 고개를 그의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러곤 승현이 잠깐 말이 없는 사이 후다닥 계단 위로 도망쳤다. 왜 자꾸 아무 데나 만지고 귓가에다 속삭이면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진은 승현이 저럴 때마다 민망하고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경계심 없이 첫사랑 따위를 떠드는 게 아니었다. 괜히 이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거나 쿡쿡 찔러보고 싶어 하는 승현이 헛소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버렸으니 후회가 막심했다.

‘나는 이진이 형을 보면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형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그날 일을 떠올렸더니 갑자기 볼이 화끈거리고 머리에서 열이 났다. 얼굴에서 티가 나면 안 되는데, 이진은 양손을 허공에서 휘휘 휘둘러 열을 식힌 다음 뺨에 대고 눌렀다.

“갑자기 왜 혼자 부끄러워해요? 제가 뭐 잘못 물어봤어요?”

뒤따라 계단을 올라온 승현이 이진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다시 물었다.

“궁금한 것도 참 많다.”

“형은 비밀이 너무 많아요.”

승현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아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이진의 뺨을 쿡 찔렀다.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닌 이진은 손을 툭 쳐서 치워 버리고 스탠바이 위치로 향했다.

“형……?”

이진이 생각했을 때 그는 매번 뉘앙스가 이상한 말을 골라 하는 주제에 막상 곤란해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서 사람을 바보 만드는 재주가 참 탁월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이진은 복잡한 머리를 차게 식히고자 애를 썼다.

‘고백도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불쑥 든 생각에 스스로 놀라 도리질을 쳤다. 승현과 대화만 하면 왜 이렇게 초조하고 신경이 예민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진은 후우, 가슴 깊이 숨을 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안정시켰다. 세상에 홀로 맞서는 게 두려워질 때면 괜찮을 거라고,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던 것처럼.

지금보다 어린 이진에게 부디 누군가 해 주기 바랐던 말을 우진에게 전했으니 이번엔 스스로를 돌볼 차례였다. 이진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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