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진은 힐끔 승현을 곁눈질했다. 어제부터 좀처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정확히는 승현이 이진을 일방적으로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건지 이진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제 일도 그랬다. 서로 한 곡씩 노래를 주고받았으면 그에 대해 말할 법도 한데, 승현은 이진의 노래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지 않았는가.
지금도 승현은 이진의 시선을 슬쩍 무시하고 우진에게만 집중했다.
“잘 못 할 것 같아…….”
“그래도 다친 이진이보다 두 다리 멀쩡한 네가 아무래도 더 낫겠지.”
“우진아, 왜 이렇게 자신이 없어?”
미열의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더 기가 죽는 것 같아 이진은 상냥함을 가장하여 말을 걸었다. 그런데 우진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꾸깃 찌푸렸다.
“흐윽…….”
서러운 숨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갑자기 우진이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작은 울음소리는 곧 떠나갈 듯한 큰 소리로 바뀌었다.
“혀, 혀엉. 저 못 하겠어요…….”
우진의 앞에 서 있던 승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승현과 보원이 몸을 비켜서자 우진이 얼마나 몸을 움츠리고 서럽게 우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제가 어떻게, 형을 대신해요, 흐윽.”
“야, 이우진.”
그나마 남을 달래는데 소질이 있는 승현이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우진은 손길이 닿자마자 더 큰 목소리로 울어 댔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동안 이진에게 말을 놓던 게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는지 울면서는 존댓말을 사용했다.
“흐으, 못 하겠, 흑……. 못 하겠어요, 흐어어엉!”
“이우진, 왜 울고 그러냐!”
미열부터 보원, 현기까지 죄다 달려들어 우진을 달래기 시작했다. 이진은 급기야 그가 어디선가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우진아, 무슨 힘든 일 있어?”
“흐엉, 이진이 형!”
이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우진이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뜨끈한 액체가 가슴팍을 적셨다.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어 눈물을 쏟아 내는 우진을 어쩌지 못하고 이진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흐윽, 혀어엉!”
“그거 협찬…….”
산뜻한 분홍색 셔츠가 진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스태프들 쪽에서 안타까운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결국 승현이 우진의 뒷덜미를 잡아 이진에게서 떨어뜨려 놨다.
“데리고 나가서 진정시키고 올게요.”
“흐어엉, 이진이 형!”
우진은 승현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이진의 이름을 불렀다.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저번에 장건우가 울긴 했는데, 우리 그때 어떻게 했더라?”
“눈물이 안 나올 때까지 연습시켰지.”
현기와 보원이 우진의 연약한 멘탈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했다. 이진은 몸에 힘이 쑥 빠져 소파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지쳐 버렸다.
“어휴……. 30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시다.”
감독은 아예 30분 휴식을 선언했다. 그에 짧은 자유를 얻은 팀원들이 각자 음료를 마시거나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거실에선 소파가 가장 편한 자리지만 먼저 앉은 이진 때문인지 같이 앉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근데 진짜 살벌하네.”
“머글 표가 진짜 무서워요. 방송을 아예 안 보고 SNS에 올리는 클립 영상만 보는 경우가 은근히 많으니까.”
“특히 막방 가 봐요. 장난 없죠.”
예민한 신경 탓에 스태프들이 소곤소곤 얘기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방송국 소속이 아닌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외부 인원이라 그런지 그들은 평소 마주치는 제작진보다 참가자들에게 흥미가 많았다. 이진은 진통제를 가져온다는 핑계를 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어머, 이진 씨. 부축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손을 한번 내젓곤 계단에 늘어진 촬영용 소품을 조심조심 피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이진은 침대에 가로로 털썩 드러누웠다.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다리를 쭉 뻗어 창문을 밀어 열었다.
‘죽겠다, 진짜…….’
이진은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든 털어 내고자 크게 숨을 쉬고 훅 내뱉었다. 제대로 촬영을 마칠 수 없어 가장 속상한 건 바로 그였다. 그래도 이진은 의식적으로 속상함에서 눈을 돌렸다. 후회를 해선 안 됐기 때문이다.
그날 일을 후회한다면, 그건 승현을 구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번만큼은 이진이 잘못한 게 아니었다. 옳은 일을 했는데 단지 결과가 좋지 않을 뿐이다. 물론 어쨌든 승현은 방송에서 문제없이 데뷔했으니 돌이키기 전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가정했을 때 운이 좋아 조명을 피했거나 적어도 큰 부상은 입지 않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진은 그런 단서를 달아 가면서까지 승현을 구한 일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설마, 이러다 또 응급실 가는 건 아니겠지?’
저번 라운드에 비하면 나았지만 매 촬영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가는 정말로 단명할 것 같았다. 여태까지는 문제없이 건강한 삶을 살아서 잘 모르고 있었으나, 이진은 의외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었다.
“……연습했잖아.”
“……렇지만 잘 모르겠…….”
그때 창문 밖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바로 창문 아래에서 대화중인 것 같았다. 사람을 피해서 대화를 나누러 온 듯했는데, 마찬가지로 사람을 피해 도망 온 이진의 귀에 들리고 말았다.
‘듣지 말아야지.’
이진은 창문을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켜 그 근처로 다가갔다.
“유이진보다 잘할 수 있다고 했잖아.”
“맞아, 잘할 수 있어. 그렇지만…….”
“너 이진 형보다 부족한 거 없어. 널 믿어야지.”
그런데 하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승현과 우진이었다. 게다가 마침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이진이 등장했다. 그는 창문을 닫으려던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진은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기억을 다시 꽉 닫아 밀봉하고는 저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했다.
“이진 형 이기고 싶지?”
“이기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고…….”
“데뷔하고 싶잖아.”
“그건, 맞아.”
“이진 형이 지금 8위인데 논란 없이 데뷔하려면 7위 안에 들어야지.”
가만히 듣고 있자니 오가는 말이 가관이었다.
“하지만 난 이진이 형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은 건데…….”
“좋아. 다시 물을게. 이우진, 너 형이랑 친해지고 싶지?”
“그렇지.”
“그럼 이렇게 울고 있을 게 아니라 형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어야지. 형은 징징대는 사람 싫어해.”
심각하게 엿듣던 중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감히 선승현이 이진과 친해지는 방법을 가르친다니. 물론 이진이 울고 징징대는 타입보다는 제 할 일을 똑바로 하는 타입을 선호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는 둥 거의 애를 어르고 달래는 수준의 대화였다.
“힘들면 말하고.”
“알았어…….”
“이진이 형 말고 나한테 말해. 형 가뜩이나 자기 일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울면서 달라붙지 말고.”
“안 그럴게…….”
이진은 결국 고개까지 숙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엿듣긴 했지만 엿보진 않으려고 했는데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도저히 안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저 자식들 대체 뭐 해?’
승현은 우진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제법 친근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의 표정을 관찰했다. 우진은 소리 내어 운 게 민망한지 조금 뺨을 붉혔고, 승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생기 띤 표정이었다.
“시청자들이 전부 이진이 형 편인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이번 라운드 꼭 1등해서 음방도 나가자.”
“응!”
음악 방송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우진이 흐히히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비위가 팍 상해서 조심조심 창문을 닫았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이진은 결국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단을 내려가 부엌 냉장고로 향했다.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으려니 우진과 승현이 돌아왔다. 우진은 진정한 지 꽤 됐는지 얼굴에 붉은기가 제법 가라앉았다.
“우진 씨, 메이크업 다시 하자.”
“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진이 메이크업을 정비하는 사이 미열이 이진에게 다가왔다. 문 열린 냉장고를 붙잡고 비스듬히 선 그가 진지한 얼굴로 속닥였다.
“이진아, 네가 형으로서 우진이한테 격려라도 한마디 하는 게 좋지 않겠냐? 촬영장 분위기도 그렇고. 한바탕 울고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하기 힘들 것 같은데……. 걔가 널 좀 좋아하잖아.”
이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이미 승현에 의해 잔뜩 고취된 상태겠지만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런 자신감을 주는 연설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고 전혀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기합 같은 건 대학 다니던 시절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으니 적당히 흉내 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거 잘못하면 오히려 분위기 다운될 텐데.”
그때 승현이 이진과 미열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왔다. 그러곤 냉장고에 기대고 선 미열을 적당히 밀어 치우고 냉장고에 잔뜩 쌓인 생수를 한 병 꺼냈다. 이진이 무슨 대화를 들었는지 까맣게 모르는 것 같았다.
이진은 테이블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섰다.
“1등해서 음악 방송?”
기분이 팍 상한 이진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승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승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표정이 간식 잘못 주워 먹다 들킨 강아지 같았다. 사실 이진은 그런 강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지만, 요 며칠 인터넷 커뮤니티를 좀 들락날락대며 그런 표현을 배워 왔다.
“뭐야? 무슨 말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열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승현은 벌레 쫓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쫓아내려 했다. 이진은 누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유이진보다 잘할 수 있어?”
“형……. 어디부터 들었어요.”
“어디부터 들었으면 어쩌게?”
승현이 끙, 소리를 내며 부루퉁하게 부은 이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마저 미열을 쫓아냈다.
“야, 인마. 너 뭐 실수했어? 또, 하필 유이진한테?”
“아, 좀 가라고.”
승현이 미열의 등을 밀어 부엌에서 내쫓고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입을 열어 변명을 쏟아 내려 했다.
“그러니까…….”
“이진이 형을 이겨서 데뷔?”
안타깝게도 이진은 승현의 입이 열리게 둘 생각이 없었다. 변명조차 막힌 승현은 곤란한 듯 끙 소리를 내며 한 손은 허리를, 다른 손은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뚝 떨궜다.
이진은 팔짱을 낀 채로 아직 열린 냉장고 문에 몸을 기대어 쿵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