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80화 (80/173)

80화

째깍, 째깍. 음원에서 흘러나오는 시계 소리가 이진의 귀를 간질였다.

이진은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눈을 뜰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곧 알람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시계 소리에 맞춰 번쩍 눈을 뜨자 한참 가까이 다가온 카메라 렌즈와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이진은 카메라 너머를 보기 위해 최대한 애쓰며 팔을 뻗어 시계를 잡았다.

“Beep, beep. D-day, Today는 바로 설레는 데이트 날.”

시계를 보며 상쾌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첫 소절이 시작됐다.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며 터벅터벅 창문가로 걸어갔다. 창문 밖에서 내리쬐는 조명이 제법 햇살 같았다.

“햇살이 기분 좋아. 왠지 모두 잘될 듯한 기분. 준비, 완료!”

창문틀에 턱을 괴고 빛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가 번쩍 일어서 폴짝 뛰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한 이진이 방문을 열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여섯 명의 멤버들이 동시에 다음 노랫말을 이었다.

“I'm ready to fall in love with you, babe─”

그들에게 양손이 붙들린 이진은 복도의 방을 드나들며 씻기고, 옷이 갈아입혀지고, 머리 모양도 바뀌고, 달콤한 향수까지 칙칙 뿌려졌다.

“첫 데이트를 하기에 정말 완벽한 하루지. 지금 당장 네게 달려가고 싶지만, 아직 준비할 게 많아.”

“설레는 오늘을 너와 함께 만들 거야.”

이진이 방 한쪽에 붙들려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다른 멤버들이 각자 한 소절씩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사이 완벽한 데이트 룩을 차려입은 이진이 서둘러 다음 촬영 지점에 섰다.

복도 끝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이진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다행히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가 무너지기 전 카메라는 승현에게로 옮겨 갔다.

하늘색 셔츠에 미색 바지를 입은 승현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자 카메라가 따라 움직였다. 그 뒤를 미열과 리웨이가 이었다. 짐벌에 매달린 카메라가 매끄럽게 1층으로 내려가고, 승현이 계단을 장식한 화병에서 장미꽃을 하나씩 꺼내 들며 노래했다.

“너를 위한 꽃다발을 준비했어. 첫사랑을 닮은 분홍색으로─”

꽃을 두 손으로 맞잡아 뺨에 가져가더니 허공으로 흩뿌렸다.

“이런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 널 웃게 하기에.”

계단이 카메라 화각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자 스태프들이 이진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왔다. 어느새 승현의 파트가 끝나고, 양손에 영화표를 든 우진이 나타나 로맨스 영화만 한가득 붙여 둔 화이트보드를 붙잡고 징징댔다. 우진의 양옆에서 보원과 현기가 어깨를 으쓱이며 안무를 췄다.

잠깐 카메라에서 벗어난 승현이 이진에게 다가와 응원하듯 어깨를 한 번 꼭 움켜쥐고 카메라 뒤로 이동했다. 곧 단체 안무가 시작되는데 안색이 영 좋지 않아 걱정된 탓이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슬쩍 미소 지은 이진이 조용히 뒤따라가 순서를 대기했다.

“디저트는 뭐가 좋을까. 초콜릿, 빙수, 케이크, 마카롱, 아이스크림까지.”

센터에 선 리웨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뭘 고를지 고민하듯 양손을 번갈아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제작진이 모아 온 꽃다발을 한 손에 쥔 승현이 타이밍에 맞춰 대형에 합류했다. 다음 소절이 끝나면 바로 이진이 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잠깐 이진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I'm ready to fall in love with you, babe─”

‘이번 테이크는 버티자.’

이진은 이를 악물고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었다. 격한 움직임에 한 발을 내딛자마자 통증이 몰려왔지만 힘든 티를 낼 순 없었다. 뒤로 물러난 카메라를 쫓으며 후렴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 데이트를 하기에 정말 완벽한 하루지. 지금 당장 네게 달려가고 싶지만, 아직 준비할 게 많아. 설레는 오늘을 너와 함께 만들 거야.”

이진이 양손을 심장 위에 얹고 상반신과 골반을 마주 튕겼다. 몸을 부드럽게 꼬며 첫사랑에 설레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처음이라 서툴지도 모르겠지만, 실수하진 않을 거야. 너무나 기다렸던 오늘이니까.”

메인 파트를 끝내고 대형 뒤로 물러나자 미열이 앞으로 나왔다. 이진이 미간을 구겼다. 통증 때문에 자꾸 동작이 소극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버리는 테이크니까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노래가 완벽히 끝날 때까지 이진은 무리를 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감독의 입에서 컷 소리가 나오자마자 모두 이진의 상태를 살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촬영은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요했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땀을 흘리거나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부족한 산소를 보충했다.

이진은 대형상 바로 곁에 있던 승현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 앉으려 했다. 승현과 미열이 그를 부축해 거실 구석 소파로 데려갔다.

“……안 되겠어요. 욕심 부려서 죄송해요.”

끝내 이진이 시인했다. 눈동자는 이미 고통으로 인해 촉촉한 물을 머금고 있었다. 애초에 아픈 몸을 이끌고 출 수 있는 춤이 아니었다. 동선도 너무 많았고, 밝은 노래다 보니 활기찬 분위기를 위해 뛰는 건 물론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사실은 창문에서 처음 콩 뛰어오른 순간 첫 번째 테이크의 결말을 예상했다.

“미안해. 진작 말했어야 하는데.”

이진이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그늘진 얼굴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창백한 안색에도 화장을 고칠 엄두를 못 냈다. 촬영 감독이 머리를 쓸며 말을 골랐다.

“그럼 잠깐 쉬었다가…….”

“아뇨. 우진이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돌아왔을 때부터 기가 죽어 있던 우진이 화들짝 놀랐다. 가볍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멤버들의 이목 역시 집중됐다.

“이진 씨, 이번 테이크 나쁘지 않았어요. 자잘한 실수가 있긴 했지만 현장감이 좀 살아도 좋으니까 몇 번만 더 해 보죠.”

“저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 제대로 못 하고 미련 남길 수는 없잖아요.”

이진의 말에 모두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이번엔 실수가 나와도 무시하고 계속 진행하기로 한 거라 처음부터 끝까지 찍을 수 있었던 거지, 사실 몇 번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 찾아왔었다.

소품이 제때 등장하지 못하거나 배우와 카메라 동선이 어긋나는 건 별것 아닌 수준이었다. 스태프가 찍히고 우스운 연출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등 웃어넘길 수 없는 실수도 있었다. 현 상황에서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한 번에 완벽히 컨트롤하기란 불가능했다.

“우진 씨랑은 얘기가 된 거 맞아요? 당장 센터 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맞고?”

“저는 할 수 있어요. 우진이도 아마…….”

“계속 연습하긴 했습니다.”

확신이 없었던 탓에 말끝을 흐리자 승현이 대신 말했다. 우진은 이진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생각에서인지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지켜봤다.

“다른 멤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픈 애를 데리고 계속 무리시킬 수도 없잖아요.”

미열이 답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멤버들 입장에선 조금 더 고생해서라도 이진이 이대로 얼굴 마담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은 분명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감동 스토리도 있고, 방송에서 꽤 분량이 있는 만큼 개인 팬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다들 굳이 그렇게까지 이진에게 센터를 쥐여 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진 본인이 끝까지 센터를 지키고 싶다면 지지하겠지만 아니라면 말겠다, 딱 그 정도의 입장이었다.

“우진이도 연습 많이 했잖아.”

“그래. 잘 하겠지 뭐.”

승현이 우진을 지지하자 보원이 냉큼 동의하고 나섰다. 이진의 실력이 훨씬 좋은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무대에서 실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컨셉을 생각해 보면 표정이나 분위기가 더 중요하지 않나.

“한 일주일 뒤로 미룰 순 없는 거죠?”

“선공개 일정이 잡혀 있으니 아무래도 힘들죠.”

“아, 선공개 안 하면 안 되나.”

현기가 다른 의견을 냈다. 이왕이면 인기 멤버가 눈길을 끌어 주길 바라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게 최선이니까.”

“그래도 형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분분한 의견에 이진이 다시 포지션을 넘기자는 말을 할 때, 마침내 우진이 입을 열었다. 이진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현과 보원의 뒤로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우진이 보였다. 뒤늦게 제일 중요한 당사자 의견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형……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괜찮아?”

“다쳤는데 어떡해.”

우진은 센터 포지션에 열의를 보이던 이전과는 달리 무언가 불안한 듯 재차 확인을 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촬영을 한 달 뒤로 미루든가 아무리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초강력 진통제를 구한다든가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우진이 몇 번이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니 의심이 들었다.

‘혹시 나 없는 동안 연습 하나도 안 한 거 아니야?’

이진의 순한 눈이 세모꼴이 되려는 걸 발견한 승현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우진, 연습 열심히 해 놓고서 왜 그래?”

“그건, 형이 복귀 못 할 때를 대비해서 한 거지.”

“어쨌든 할 수 있잖아.”

우진은 승현이 어려운지 우물쭈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리웨이가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팔을 올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우진은 되레 부담을 느끼는 듯 몸이 점점 쭈그러들었다.

“곤란한데……. 우진 씨가 못 하면 이진 씨가 계속 해야 될 텐데.”

촬영 감독이 뒷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진도 그건 곤란했다. 솔직히 이대로 팀원들 배려를 받으며 주연으로서 뮤직비디오를 완성시키고 싶은 욕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찬우 팀 멤버들이 뮤직비디오의 완성도보다 개인의 인기를 더 신경 쓰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과 상황이 같지는 않지만 이진은 개인보다 팀 전체를 생각하고 싶었다.

적어도 방송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곁에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동료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길 바랐다. 거기에는 그들의 짐이 되어 따가운 눈총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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