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진이 부상을 당해 입원했다 한들 당장 방영일이 얼마 남지 않은 촬영을 미룰 수는 없었다. 즉석 콘서트는 이번 3라운드의 주요 기획들 중 뮤직비디오만큼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본래 3라운드는 그동안 고생한 참가자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주면서, 적절한 일상 속 장면을 담고자 기획되었다. 정확히는 펜션 타운에서 다가올 휴가철을 대비해 홍보 차원에서 협찬을 제안했고, 방송국 윗선에서 제안을 냉큼 승낙했으므로 방송작가들은 협찬받은 장소와 어울리도록 세부 프로그램을 끼워 넣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쾌적하고 아기자기한 펜션 내부를 보여 줄 수 있는 원테이크 뮤직비디오와 뒷마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바비큐 그릴, 레크레이션용 대여 장비를 소개할 수 있는 즉석 콘서트였다.
다만 방송의 메인 미션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야 했기에 뮤직비디오를 전면에 내세우되 즉석 콘서트는 말 그대로 깜짝 미션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참가자들을 위한 바비큐 파티, 친목 도모 행사의 한 코너로 가볍게 지나간 뒤 잘된 공연은 본방에 넣고 별로인 공연은 비하인드로 풀면 펜션 홍보도 되고 방송의 본 취지와도 걸맞았을 텐데.
그런데 펜션 시설의 노후로 일어난 사고 때문에 일이 조금 틀어졌다. 제작진과 참가자 여럿이 부상을 당해 현장 분위기가 가라앉고, 이진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문이 점점 불어나 중태에 빠졌다는 얘기까지 돌기 시작했다. 연예계 뉴스에서는 이를 두고 제작진의 잘못이니 펜션 측의 관리 부실이니 잘잘못을 따져 가며 떠들어 댔다.
아직 촬영장이 화기애애하며 참가자들 간의 유대가 돈독하다는 상징적 연출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승현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일은 조연출이 맡게 됐다. 참가자들에게 고압적으로 굴기 어려워하는 젊은 작가들과 달리 그는 평소에도 마음에 드는 참가자에게 진행 상황을 전달하거나 개인적인 충고를 서슴지 않았기에 부탁이 들어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승현 씨, 공연 하나만 준비해 주세요. 이진 씨한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요.”
조연출이 인근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돌아온 승현을 불러다 다짜고짜 말했다.
“갑자기요?”
뜬금없는 말에 승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조연출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재차 권유했다.
“이진 씨 퇴원하는 날 저녁 시간에 바비큐 파티 하면서 축하 무대를 할 생각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사고가 있었던 만큼 승현 씨가 이진 씨한테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깜짝 공연 선보이면 감동적이잖아요. 이진 씨도 기분 좋을 테고.”
“그건 좀 이상할 것 같은데요.”
권유의 탈을 쓴 지시를 승현이 아무렇지 않게 거절했다.
“사고는 안타깝지만, 이진 형을 그렇게 띄워 주면 안 되죠. 순위 발표식 다음이라 다들 예민해질 시기잖아요. 대놓고 형을 위한 공연을 하면 시청자들은 공평하지 못하다 생각할 거고 오히려 반발만 생길 텐데요.”
제법 타당한 말이었다. 실제로 제작진도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는 척 묻어 버리기엔 사고에 휘말린 이진과 승현, 찬우의 인기가 높아 더 큰 문제가 될 게 뻔히 보였다.
“승현 씨만 공연할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다른 참가자들한테도 사연 모집 받아서 공연할 팀 정할 거고, 아예 감사의 달 특별 무대인 걸로 해서 참여형 콘서트처럼 만들 거니까.”
“그럼 이진 형이…….”
“승현 씨, 내가 생각해 봤는데 비틀즈나 빌리 조엘 같은 올드 팝을 개사하면 어때요? 적당히 익숙한데 어린 시청자들이 질려 하지 않을 곡으로.”
조연출이 의도적으로 승현의 말을 끊었다. 꼭 부드럽게 대하면 말을 안 듣는 참가자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잘나가는 방송 자산을 대놓고 기죽일 수도 없으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승현 씨 요즘도 실력 논란 있던데. 이번 무대 제대로 하면 그런 것도 싹 들어가고 얼마나 좋아?”
일부러 그를 향한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언급하며 반응을 살폈다. 이쯤 하면 현장 내 위계를 깨달았을 법도 한데, 승현은 불쾌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를 연습 하나 안 하고도 운 좋게 멘토 맘에 들어서 점수 잘 나온 것처럼 편집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 난 편집 팀도 아니고 그런 권한은 없지.”
“자판기는 직접 손보셨잖아요.”
이제는 팔짱까지 턱하니 끼고 상대방을 바라봤다. 물론 조연출이 모든 일의 배후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많은 일의 공범인 건 확실했다. 없는 일을 부풀리는 것보다 새로운 논란을 만들어 내는 게 더 자극적인 만큼 의외로 많은 곳에 그들의 손이 닿아 있었다.
“정하늘 따라다니는 기자한테 위치 풀고, 한찬우한테는 잘못 전화 건 척 어머니가 위독하시단 거짓 정보를 흘렸죠.”
승현은 차분히 말하며 상대를 관찰했다. 분노나 경멸 같은 감정은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단지 사실을 나열하며 또 무슨 속셈을 숨기고 있는지 탐색하듯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볼 뿐이었다.
조연출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벅벅 긁더니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섰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승현 씨, 나는 이번엔 이진 씨가 울었으면 좋겠어요. 그간 숨겨 왔던 가정사를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끔 만들어서 인터뷰를 따내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부실한 현장 상황 따위가 아니라 이진 씨 사연에 집중됐으면 해요.”
그 말에 승현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적절한 시기, 적절한 수준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건 평면적으로 느껴지던 참가자에게 입체감을 부여해 준다. 시청자들이 참가자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그게 우리한테도 더 이득이고 유이진 씨한테도 훨씬 나아요. 윈윈이라고.”
그는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했으리라 생각하고 손을 올려 승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팔짱을 끼고 있던 승현이 팔을 풀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 손길을 피했다.
“그러니까 승현 씨만 믿을게요.”
눈이 마주치자 여유롭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 조연출은 마지막까지 승현의 생각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이진은 자신이 안무를 소화할 만한 상태가 아님을 인정했다. 걸어 다니는 것도 온전치 못한데 아무리 난이도가 쉽다고 한들 춤을 추는 일이 다리에 부담되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이번 뮤직비디오 촬영은 더 했다. 원테이크 샷 촬영의 특성상 한 번만 이 악물고 견뎌 내면 되는 무대와는 달랐다. 초반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 촬영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가중될 것이다.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아? 원래 멍이 이렇게 아픈 건가?’
크게 다칠 일 없이 얌전한 삶을 살아온 이진은 제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도 후유증이 오래 간다고 하긴 하던데…….’
괜찮은 장면끼리 이어 붙여서 편집할 수라도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번 라운드의 핵심은 아무리 실패하고 좌절을 겪어도 포기하지 않고 영상을 완성시켜 내는 참가자들에 있었다. 즉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에게 성공에 대한 희열과 기쁨, 감동을 느끼는 게 중요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진만을 위해 편의를 봐 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얻었던 동정표마저 빼앗길 판국이다.
이진은 소염제와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주인공은 고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버티고 이겨 내는 존재다. 이진을 포함한 참가자들은 이 방송의 주인공이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불평 없이 견뎌야 했다.
그래야만 많은 관심과 함께 시청자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해야지.’
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하니 이진은 자신이 통증만 좀 참으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 강한 진통제도 처방받았고 보호대도 준비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표정 관리뿐이었다.
이진은 침대에 올라선 채로 다친 다리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한 손에는 방에 비치된 거울을 든 채였다. 욱신, 뼈와 근육이 통째로 관통당한 것 같이 날카로운 통증이 짜릿하고 올라왔다. 이진은 미약하지만 분명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근육을 펴 억지 미소를 만들었다. 양쪽 발이 모두 바닥에 닿을 때쯤에는 어느새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얼굴 기괴해…….’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단 걸 이진도 알았다. 카메라는 피사체의 시선, 미소, 호흡 하나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이를 지켜보는 감독님이나 제작진, 더 나아가 시청자들이 이진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불안함에 진통제를 한 알 더 먹었다. 진통제를 처방해 준 의사가 정량을 꼭 지키라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진은 딱 오늘 하루만 무리하자고 다짐했다.
이진은 촬영만 끝나면 아예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선승현한테 밀어 달라고 해야겠다며 부러 밝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즈음, 촬영 준비가 시작됐다. 제작진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레일을 깔고, 방을 정리하고, 소품을 배치했다. 숙소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컨셉을 지키려다 보니 이동 거리가 줄어 편해진 참가자들과 달리 현장 스태프는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이진아, 춤출 수 있겠어?”
미열이 소파에 살짝 기대어 서 있는 이진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응. 진통제도 먹었고 혹시 몰라서 보호대도 했어. 병원에서도 무리하지만 말라고 했고.”
“그래도 한의원에 가서 죽은피라도 뽑아야 하는 거 아니야?”
미열은 어제 저녁 감사의 달 콘서트 촬영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자는 이진을 깨워 다리에 난 흉을 확인했다. 무언가에 찍힌 자국 위에 피어난 검붉은 멍을 확인하고는 몇 번이나 뼈가 안 부러진 게 맞냐고 물었다.
“나 진짜 괜찮아. 경과 지켜본다고 사흘이나 쉬었잖아.”
“그래. 진통제 효과 떨어지기 전에 얼른 끝내 버리자. 그럼 형도 무리 안 하고 우리도 빨리 끝나고 좋지.”
현기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여차하면 우진이도 있으니까.”
이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애써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 힘을 주려는 마음이 전해졌는지 다행히 이진이 불편해할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승현만이 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만일을 대비해 준비하라는 듯 신호를 줬다.
***
첫 번째 테이크 촬영이 시작됐다.
“처음이니까 우선 이번 테이크는 끝까지 촬영해 보고, 연습용 카메라가 아닌 진짜 카메라에 찍혔을 때의 감을 익혀 봅시다.”
촬영 감독이 활기차게 박수를 치며 팀원들을 격려했다. 이진은 미열과 승현의 부축을 받은 채 2층으로 올라가 준비된 침대 위에 누워 대기했다. 산뜻한 빛깔의 분홍색 셔츠와 연두색 바지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진 씨, 너무 얌전하게 자는 것 같아. 손을 얼굴께로 올려 볼래요?”
“네. 이렇게요?”
“응, 좋은데? 반대 손도 똑같이 해 볼게. 그리고 여기 이불도 살짝 접어 주세요.”
감독의 지시에 현장 스태프가 부리나케 뛰어와 이진이 덮은 이불을 흐트러트렸다.
“아니, 누가 이진 씨 눈에 펄 발랐어?”
“미세 펄 정도는 괜찮다고 하셔서…….”
“이다음 장면에 샤워하러 가는데 이래도 돼?”
스태프들이 눈 감은 이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때 드디어 감독이 앵글을 결정했는지 슬레이트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