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진은 예정보다 하루 이르게 퇴원했다. 어차피 병원에서도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 이튿날 저녁에 퇴원한 것이다. 그런데 급하게 결정된 사항임에도 소식이 금방 전해졌는지 숙소이자 촬영장인 펜션에 참가자들이 잔뜩 들어와 작은 폭죽을 터뜨리며 이진의 복귀를 환대했다.
“축하합니다!”
문을 여는 순간 들리는 폭죽 소리에 이진은 가장 먼저 승현을 떠올렸지만 눈앞에 나풀대는 종이 꽃가루와 그 뒤에 나열해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를 짓는 동료들을 보고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얼굴은 익숙하지만 대화는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어깨를 토닥이며 축하의 말을 건네고, 분명 얼마 전까진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은 사람…… 예를 들면 제이슨이 걱정했다며 손을 잡아 부축해 주기도 했다. 원체 눈물이 많은 우진이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하늘도 살짝 붉어진 눈매를 하고 이진을 작게 포옹했다.
‘이렇게까지 환대받을 일인가……?’
이진은 순수한 호의에 기쁘면서도 조금 얼떨떨해져 주위를 둘러봤다. 하도 사람이 많아 어딜 돌아봐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남자들 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들 틈에 카메라를 들고 촬영 중인 카메라맨이 보였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카메라 렌즈를 마주하니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이진의 부상 자체를 방송의 에피소드로 사용하겠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분량이 많아지고 팬이 생기고 데뷔 순위권에 오르고. 처음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하며 이진이 바랐던 일이다. 그때는 그에게 남은 길이 오직 그것뿐인 양 맹목적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배부른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언제부터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느끼게 됐을까?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닌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언제 배웠던 걸까…….
이진은 바쁘게 고개를 돌려 군중들 틈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자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러나 보고 싶던 사람은 안 나타나고 미열과 찬우가 나타나 이진을 도로 현관문으로 끌고 가 펜션 뒷마당으로 데려갔다.
이진이 절뚝대자 양옆에서 번쩍 그를 들어 올려 어깨 위에 태우고 마차처럼 이동했다. 말이 이동이지 납치 수준이었다. 그곳엔 작은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현수막에는 ‘축 유이진 무사 귀환’이라고 적혀 있었고 ‘환’ 옆에 이진의 얼굴이 동그랗게 잘려 붙여져 있었다.
“너희 진짜 심심한가 보구나…….”
“이게 3라운드 메인 콘텐츠라니까?”
이진이 중얼거리자 미열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다들 뮤직비디오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확히는 뮤직비디오보다 더 주목받을 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현수막의 밑으로는 전자 피아노와 기타, 탬버린과 마이크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캠핑의 추억이 물씬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약 50명 분의 의자가 간이 무대를 향해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진은 그 앞에 내려져 맨 앞,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진이 앉자 차례로 자리가 채워졌다. 두리번대며 사람들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이진이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설치된 원수 같은 조명의 밝기가 조금 어두워진다 싶더니 펜션 뒷문 부근에서 나타난 어두운 형체가 뚜벅뚜벅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승현이었다. 승현은 마이크를 조금 높이며 위치를 조절한 뒤 민망한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음…… 안녕하세요. 선승현입니다.”
“니 이름 모르는 사람 없다!”
“누굴 의식한 멘트냐!”
“제가 원래 이런데서 나서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 많다! 들어와!”
“춤이나 춰라!”
승현이 말을 한마디 하면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이진은 주변의 요란한 반응에 조금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장면을 응시했다. 이진의 시선이 닿자 승현도 관중을 둘러보는 척 눈을 맞춰 왔다.
“오늘은 꼭 제 마음을 전해야 하는 상대가 있어서요.”
‘잠깐. 이거 분위기 뭐야?’
이진은 승현의 충격적인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찬우도 미열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금 이 분위기 나만 이상해, 나만? 나만 다른 세상에서 온 거야? 혼란스러운 이진을 남겨둔 채 승현의 멘트가 계속됐다.
“이진이 형.”
이진의 이름이 불리 우자 주변에서 ‘우워어어’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설치된 카메라를 여러 번 확인해 봐도 붉은빛이 번뜩이는 게 분명히 촬영 중이었다. 조명에 앰프까지 셋팅된 걸 보면 제작진이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한 상황이라는 뜻인데.
승현은 평소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습니다. 위험한 순간에 망설임 없이 저를…….”
그리고 말을 하다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언뜻 보면 격해지는 감정을 참는 것 같았지만 이진의 눈엔 현이 뭔지는 몰라도 이 짓거리를 굉장히 하기 싫어하는 게 보였다.
“……하여튼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를 준비했어요.”
아마 저것보단 길고 장황했을 문장을 ‘하여튼’ 한 단어로 압축 요약시켜 버린 승현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승현이 눈짓하자 간이 관중석에 앉아 있던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가 악기를 들었다.
그러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승현의 뒤, 나무에 매달려 있던 현수막이 떨어지더니 밑에 숨어 있던 새로운 현수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사의 달 기념 특별 콘서트]
이진이 글자를 읽음과 동시에 주변 등이 어두워지고 하이라이트 조명이 머리 뒤에서 쏘아졌다. 이진은 다소 허탈한 기분으로 웃었다. 승현과 이진의 사연은 제작진의 깜짝 기획을 돋보일 연출로 이용당한 모양이었다.
조금 어설픈 키보드 연주와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승현의 의지인지 제작진의 강요인지 몰라도 승현은 올드 팝인 원곡에 새로 적은 가사를 붙여 불렀다.
‘Yesterday.’ 과거를 회상하며 좋았던 그 시절을 그리는 아련한 노래는 승현을 통해 감사의 달 캠페인곡으로 재탄생되었다.
“고마워.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 나를 위해 희생한 당신. 오, 놀라워. 감사해요─”
맥락 없이 계속 고맙고 상대방을 대단하다 치켜세우기만 하니 약간 기독교 찬송곡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진만의 감상은 아니었는지 연주자들도 얼굴 표정이 미묘했다. 승현 혼자 아주 진지한 태도로 마이크를 잡고 공연을 이어 갔다.
그러나 역시 어디를 보는지 모르겠는 시선에서 초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 나를 구해 준 건지, 잘 모르겠어. 형, 목숨이, 아홉 개면 내가 이해하는데. 오오오─ 고마워.”
비록 가사가 장르를 이탈해 웃음을 주긴 하지만 승현의 차분한 목소리는 제법 노래와 잘 어울렸다. 세련된 인디 팝송 정도나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아저씨 같은 감성에도 잘 취하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저음이 부드럽게 울릴 때면 ‘감사해 또 감사하고 감사해’ 따위의 가사는 적당히 걸러 들을 수 있었다.
“오, 영원히 감사해요.”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짧은 노래가 끝나자 의리의 함성 소리가 뒷마당을 가득 울렸다. 손바닥이 백 개쯤 되니 꽤 뿌듯할 만큼 꽉 찬 소리가 되었다. 무난한 진행을 위해 한 몸 희생해 준 승현을 향한 격려의 의미도 다수 섞여 있으리라 추측했다.
“이진이 형, 제 노래 어떠셨어요.”
그런데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고 박수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던 승현이 대뜸 이진에게 질문했다. 이 역시 예정된 코너였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스텝이 무선 마이크를 가져다줬다.
“으, 음.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이렇게 노래까지 불러 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이진은 최대한 무난한 문장을 골라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는 마음을 듬뿍 담아 바라보자 승현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답가 불러 주세요.”
“이야아! 답가, 답가, 답가!”
감사의 달 기념 특별 콘서트라더니. 알고 보니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넘기는 장기 자랑 시간이었나? 참가자들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인 이진은 황당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지금?”
“단둘이 있을 때 불러 주시게요?”
“…….”
이진이 없던 고 며칠 사이에 승현이 대체 뭘 잘못 처먹었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춤을 추지 않는 라이브 무대는 이진이 제일 자신 있는 영역이었다. 연습한 만큼 노련하기도 했고, 스스로도 본인이 의외로 무대 체질이라고 종종 느낄 만큼 무리했다가 기절할지언정 무대를 망쳐 본 역사가 없었다. 이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승현의 도발을 받아들이고 호기롭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반주 주세요.”
“아, 어떤 노래요?”
“아뇨. 반주기. 그 키보드 자리를 저 달라고요.”
키보드를 잡고 있던 참가자를 쫓아낸 이진은 무대 옆에 멀뚱히 선 승현도 옆으로 쫓아내고 능숙하게 마이크를 가로로 눕혀 앉은 키에 맞췄다. 가볍게 건반을 튕기며 손을 풀다가 곧 복잡한 코드를 눌러 가며 전주를 시작했다.
사실 이진은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 이진의 피아노 실력은 대학생 때 학기 말 정기 공연을 준비하느라 한 두곡쯤 외운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해 속성으로 2년쯤 배우긴 했지만, 그때에 비해 그다지 나아지진 못했다. 손가락이 뻣뻣해 기교도 잘 못 넣었고 섬세한 터치로 음악의 강약을 조절할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이진에게 바라는 것도 코드 잡기 이상이 아니라 설렁설렁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실수만큼은 하지 않았다. 최고치가 높지는 않았지만 최저치가 낮지도 않았다.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장르나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늘 안정적인 실력을 유지하는 게 이진의 큰 강점이었다.
“Look at you kids with your vintage music.”
이진은 촬영 첫날 승현의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던 노래를 불렀다. 잔잔하지만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원곡에 비해 이진의 목소리는 답가에 어울리게 좀 더 부드럽고 밝은 톤이었다.
“You’re part of the past, but now you‘re the future.”
비록 가사를 전부 외우지 못해 1절을 간신히 넘긴 뒤 코러스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지만 적당한 변주가 있어 듣기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진의 편곡이 새로운 매력을 부여해 원곡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흠뻑 빠져들어 감상할 수 있었다.
“You get ready, you get all dressed up.”
지금 선곡은 이진이 승현에게 보내는 일종의 장난스런 신호였다.
“To go nowhere in particular.”
둘만이 겪었던 상황과 노래.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고 너는 아직 기억하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의도라고 하기엔 이진도 지금의 감정을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To be young and in love.”
괜히 우리끼리의 비밀을 모두의 앞에서 아는 척하고 싶은 그 오묘한 기분. 이진은 생소한 충동에 잠시 몸을 맡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