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진이 형, 정신 차려 봐요!”
찰나의 순간, 이진이 승현을 구했다. 갑자기 벌어진 사고에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고 상황을 목격한 몇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지척에서 들려온 굉음에 갑자기 떠밀리기까지 한 승현은 순간 정신을 잃을 뻔하다 제 몸 위에 누군가 겹쳐져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공황 상태에 빠진 이진을 애타게 불렀다.
“유이진!”
정신이 쏙 빠진 이진이 간신히 승현의 말을 알아듣고는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승현을 살폈다.
“형, 괜찮아요?”
“……너야말로 괜찮아?”
바닥에 냅다 박은 뒤통수와 허리가 좀 아팠지만,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에 비하면 한참 괜찮았다. 승현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자 이진이 안심한 듯 기댄 몸을 뒤로 물렸다.
“이진 씨, 승현 씨. 괜찮아요?”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이 승현과 이진을 둘러싸고 괜찮냐고 물어 댔다. 두 사람이 괜찮다 대답하자 이진이 얼마나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승현을 구했는지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스텝들 중 가장 상급자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고함을 치며 정신을 어디다가 두고 사는 거냐며 떨어질 뻔한 사람과 장소를 섭외한 사람 등에게 화를 냈다.
“아!”
그러나 그의 고함은 작은 신음 소리에 묻혔다.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려던 이진이 발목에 힘을 준 순간 털썩 쓰러지며 다리를 움켜쥔 것이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라도 떠올린 것 같았다.
“……나 못 걷겠어.”
주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 시도하던 이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뒤늦게 몰려오는 고통을 인지하자 태연함을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가장 곁에 있던 승현이 황급히 바짓단을 걷어 상태를 확인했다. 발목 위 종아리 아래 부근에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다. 넘어진 충격으로 난 상처가 아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추락한 물체에 다리를 맞은 것이다.
이진은 식은땀이 삐질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촬영 중 부상이라니. 1라운드 리허설에서 다쳤던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됐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현실감이 몰아닥쳤다. 정말 최악의 경우엔, 이대로 방송을 하차해야 할 수도 있었다. 다름 아닌 선승현. 선승현을 구하려다가…….
다행히도 절망이 이진의 목을 조르기 전, 커다란 손이 먼저 찾아와 목덜미를 지나 어깨뼈를 감싸 왔다.
“잡아요.”
반쯤 눈이 돌아간 승현이 이진을 번쩍 들어다 옮기며 말했다. 떨어지지 않게 자신을 잡으라는 뜻 같은데 말을 하기도 전에 몸부터 냅다 드는 바람에 이진은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터운 목과 옷자락을 꼭 잡은 뒤에야 그 목소리를 들었다.
“승현 씨, 우리가 부축할게요.”
“형도 다쳤잖아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으나 승현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진을 안고 걸어가 침대 위에 눕혔다. 곧 연락을 받고 도착한 의료진이 이진의 상처를 살피다 임시방편으로 부목을 덧대 고정했다.
“부러진 건 아니고 심하면 금이 간 것 같은데 우선 이 상태로 차 타고 응급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료진이라 해도 구색만 간신히 갖춘 정도였다. 이진의 치료가 끝난 뒤 승현도 상태를 확인받았다. 왼쪽 손목에 일시적 통증이 있고 등 쪽으로 타박상이 다수 발견됐다. 뒤이어 떨어지는 사람을 낚아챈 찬우도 난간 모서리에 찔린 상처를 치료받았다.
같이 다쳐도 출연진이 먼저고 추락할 뻔한 스텝은 후순위였다. 그는 누적된 피로가 심각한 수준이라 이진과 함께 응급실로 호송되었다.
다음 날 포털 메인에 온갖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굴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연예/사회] 유이진 또 응급실 행……. 윈올 촬영 현장 사고. 선승현, 한찬우 다수 부상 ‘가혹한 스케줄’ 탓?
***
제목: (펌)윈올 유이진 응급실 팩트 정리
1.친구들끼리 놀러 갔다 다친 거 아님. 펜션에서 촬영 중이던 걸로 추정. 기사에서도 촬영 중 부상이라고 써있는데 말이 어떻게 와전되는 거야;
2.난간에서 떨어진 거 유이진 아님. 현장 스텝이 추락할 했고 한찬우가 잡아서 큰 사고는 안남.(대신 한찬우도 부상) 스텝이 옮기던 짐이 떨어져서 밑에 있던 사람들도 다친 것 같음. 난간이 부러졌대서 불법 증축이다 부실공사다 다 말 많은데 확실한 건 밝혀진 적 없음.(관련 링크: 디 데일리 연예 뉴스)
3.유이진 골절 아님. 하차도 안 함. 촬영장에서 금 갔다고 해서 응급실 갔는데 엑스레이에서 이상 발견 못했다고 함. 붓기 빠지면 상태 지켜보고 3라운드 복귀하든가 4라운드 때 재합류 하든가 할 듯(관련 링크: 공지사항/Winner Takse All/프로그램/SSTV)
+추가) 물론 오진일 수도 있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쩌라는 거야... 누구는 다쳤으면 하고 염불 외는 줄 아는 건지...... 진짜로 심한 부상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무리해서 촬영 강행하는 것도 본인 선택이잖아. 사실 관계 밝혀진 것도 아닌데 말을 어떻게 얹으라는 거야.
4.촬영 중단 안함. 방영 일정 때문도 있지만 한명 다쳤다고 참가자 50명[email protected]제작진 전부 올스탑 할거란 건 너무 꽃밭이고... 아무리 인기멤이라도 제작진 측에서는 공평하게 대해야지. 개인 인터뷰나 미공개 영상 같은 걸로 분량 빠방하게 챙겨주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2라운드 탈락자도 공개 안됐으니까 그냥 본방을 기다리자.
5.유이진은 현재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 어디 입원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힌 바 없고 응급실 들렀던 곳이랑은 다른 병원임. 경기도에 어디 병원은 그냥 촬영지랑 가까워서 들른 듯. 백미열 피셜임.
참고로 나는 유이진 픽 아님. 평소에 좋게 보긴 했는데 내 픽이랑 존나 안친해서 쉴드 칠 이유 없음. 그런데 개소문이 너무 많이 돌아서 정리글 쓰는 거니까 괜히 맘이니 뭐니 태클 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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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네요ㅇㅅㅇ
판단은 알아서.
댓글(431)
이진아 제발 건강하자......
데뷔 물건너간 줄 알고 개쫄았네ㅠㅠ
↳ ㅠㅠㅠㅠㅠㅠㅠㅠㅠ부상으로 하차는 진짜 말도 안된다ㅠㅠ
찬우도 다치고 승현이도 다쳤는데 이진이한테만 관심 쏠리니까 좀 그렇다ㅎ;;
↳ 니가 관심 많이 주던가ㅋㅋ
↳↳ 두분 다 여기서 분쟁 일으키지 맙시다ㅠ
이진분이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슬슬 정리글 올라오네ㅠㅠ 정리 고마워ㅠㅠ
↳ 펌글이야ㅋㅋ
이진이가 팬카페에 글 한번만 써주면 좋겠는데.......
↳ 컴맹한테 뭘 바래ㅠ
↳↳ 컴맹 아니라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진이 안다친 거 확실해?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글 올리면 안되는 거 아니야?
에구... 뭔 일이 있었나 보네요.
유이진 꾀병이라고 후려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여기서 골절 아니라고 하면 뭐가 되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닌게 되는 거지
↳↳ 지랄 ㄴ
↳↳↳ 화나시는 건 알겠는데 아무한테나 분풀이 하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그리고 이거 원 게시물 아니고 퍼온 글입니다.
쾌차 바랍니다.
[댓글 더 보기]
***
이진은 1인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사고 이후 이틀이 지났다.
아무리 실금이라 하더라도 골절이라면 한 달은 꼼짝없이 통 깁스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병원에 도착해서야 안 이진은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하고 절벽을 가로지르던 흔들다리가 눈앞에서 끊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속상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여서 병원에 동행한 스텝이 일반적인 골절에 비해 붓기의 정도가 약하고 빨리 가라앉는 것 같다는 말로 우울해 보이는 이진을 달래 주었다.
다행히 엑스레이 검사 결과도 좋게 나왔다. 의사는 엑스레이 판독으로 읽어 내지 못한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 했지만 이진은 입원 대신 진통제를 처방받았다. 우선 내원 당일은 상태를 지켜보자고 해 그날은 병원에서 밤을 보냈다.
날이 밝고 승현과 찬우도 추가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승현은 이진을 보고 별말 않았는데, 의외로 찬우가 몹시 단호한 태도로 며칠 더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이진아, 몸이 곧 재산이야. 아이돌 지망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젊다고 건강을 등한시하면 절대 안 돼. 지금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감수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순 있어. 하지만 사실은 아니야.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내가 하차해야 한다는 뜻이야?”
“설마. 하지만 적어도 사흘은 입원해야지. 지금은 골절이 아니라 멍 때문에라도 움직이기 불편하잖아. 어차피 안무 금방 외웠다면서. 촬영 전까지만 쉬고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거야. 무리해서 돌아가지 말자.”
그렇게 말하는 찬우의 표정이 여태까지 중 가장 진지해서 이진은 더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이면 돌아가자마자 뮤직비디오 촬영을 감행해야 했다. 이진은 적어도 촬영은 가능한 것을 위안 삼았다.
‘잔고가 얼마 남았지…….’
이진은 어플을 켜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병원비는 방송국에서 보험 처리를 할 예정이라고 하니 처음 와 보는 1인실을 가격 걱정 없이 만끽하면 될 텐데도.
밖에서 대기하는 간병인 외에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홀로 3일을 지새우게 된 이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핸드폰과 TV시청뿐이었다.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해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진은 저녁 무렵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선반 위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었다.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한창 방영 중이었다.
‘사건 사고 탑 10’이라는 미니 코너에서 한창 그 주의 연예계 사고들을 간추려 소개했다. 누가 결혼을 했고, 누가 이혼을 했고, 누구랑 누구가 스캔들이 났는데 친한 동료일 뿐이래고……. 5위쯤 가자 현직 아이돌의 민간이 폭행 시비나 유명 개그맨의 음주 운전 소식이 들려왔다.
-대망의 2위! 오늘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식이죠? 화제의 서바이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위너 테이크 올’. 윈올의 촬영 현장에서 참가자 유모 씨가 중상을 입고 응급실로 호송되었다고 합니다!
중상을 입고 응급실로 호송된 유모 씨는 멍하니 TV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 포털을 확인했다. 검색창 밑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윈올, 유이진, 유이진 부상, 유이진 추락사 등의 단어가 휙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전문가들은 방송국 스텝들의 과로를 원인으로 보고 있는데요. 유모 씨는 평소에 방송을 통해 철저한 연습 벌레로 알려져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시청자들은 방송국에서 휴방 조치를 내리고 유모 씨가 부상에서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서명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부디 성공적인 복귀를 하길 바랍니다.
인기 검색어를 타고 들어가 보이는 글들도 죄다 방송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진이 다시는 춤을 출 수 없다는 말부터 재활 운동을 해야 하니 1년 뒤 다시 방송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이것이 방송국의 사주라는 음모론도 있었다.
그 뒤로 이진은 가끔 들락거리던 팬 카페도 확인하고 팬 카페에서 링크를 가져오는 타 사이트들도 들락거리며 게시 글들을 읽었다. 대부분은 이진을 걱정하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팬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진이 하차한다면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이진 원 픽이었는데 다음 픽을 누구로 할지 영업 부탁한다’는 요지의 글도 있었다. 이진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내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지칭하는 이진은 이진 본인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었다. 방송에서 만들어진 모습, 그들이 보기 원하는 부분만 도려내 전시된 형상, 어찌 보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아이돌을 흔히 환상을 파는 직업이라 일컫는데 그게 딱 맞는 말이다. 아직 데뷔하지 않았지만 팬이라는 존재가 생긴 순간 이진은 그들의 아이돌이었다.
‘외롭다…….’
문득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들이 걱정하는 건 진짜 이진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짜라고 믿는 이진이거나 진위 여부가 상관없는 무형의 존재였다. 험한 욕설을 읽을 땐 한층 걸러 생각할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이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글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으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소중한 진심들이 너무 고마웠지만 이진에겐 채 닿지 않을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매일같이 확인하던 커뮤니티도 이진의 이야기를 한 철 지난 떡밥 취급하고 과하게 부풀려진 소문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미열이 개인 SNS에 울상을 한 셀카를 올리며 ‘서울 가고 시퍼요ㅠㅠ 이진이 병문안 가야 해ㅠㅠ’라고 적은 것도 도움이 됐다. 이진은 여전히 경기도에 위치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그를 스토킹하는 이들의 시선이 서울로 많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