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76화 (76/173)

76화

승현은 큼큼 소리를 내며 찬우와 이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형, 우진이가 센터 안무 조금 수정하고 싶대요.”

“응? 어떻게?”

“그건 안무 감독님이랑 협의해서 알려 준다고 하는데……. 형, 걔한테 뭐 나쁜 짓 했어요? 아주 무서워서 벌벌 떨던데.”

“뭐? 아니야!”

슬쩍 손을 잡아도 모른 척하는 게 우스워 조금 놀렸더니 이진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 행진이 거기서 군기 잡나?”

“아, 아니야…….”

“선승현 이 자식이 형님을 놀려먹고 말이야!”

놀리긴 이진을 놀렸는데 응징은 미열에게서 왔다. 미열이 등짝을 몇 번이나 갈겨 대며 승현을 타박했다. 그는 누나들과 함께 자란 주제에 손버릇이 나쁜 편이었는데 그 희생양은 주로 승현이었다.

승현은 평소 남의 성격에 대고는 욕을 바가지로 할 수 있었지만, 남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며 드러나는 작은 습관 같은 것들에는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것들이 마치 상대방이 승현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미열에게도 몇 년째 맞고 구박받으며 살고 있었다.

“미열아, 그만 때려.”

요즘은 그래도 이진이 공황이 올 것 같으면 달래 주고, 미열이 무식하게 폭력을 쓰며 구박할 때에도 말려 줘서 조금 살맛이 났다.

고등학생 때 악몽 때문에 도저히 잠이 안 오면 몰래 막내를 안고 자기도 했는데, 어디 육아 책에서 아이는 보호자의 감정을 쉽게 느낀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그 뒤로 몇 년간이나 홀로 외롭게 삭여 내야 했던 불안을 막내랑 닮은 형이 뿅 나타나 달래 주니 좋았다.

“근데 수상쩍게 왜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분데? 아직 봄인데 벌써 태풍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까는 바람 한 점도 안 불던데?”

“괜히 불안하네…….”

미열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길한 소리를 해 댔다. 찬우가 미열을 미신이라고 놀리려 입을 딱 뗀 순간 촬영 세팅을 위해 잠시 주어졌던 휴식 시간이 끝났다. 벌써부터 에어컨을 틀어 둔 탓에 조금 쌀쌀해져 도로 겉옷을 입고 사람들을 따라가는데 지잉, 외투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수비니 집에 가는중^ㅇ^ 오빠 촬영 힘내! 1등해서 꼭 우리 이진이 오빠랑 같이 데뷔하쟝! 수빈이 원픽은 머니머니해두 울 오빠인 거 알쥥?♡♡♡♡♡ -선수빈-]

문자를 읽은 승현이 저도 모르게 활짝 웃자 찬우와 미열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승현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와, 동생이 응원도 다 해 주네. 좋겠다, 우리 승현이이.”

“난 얘가 동생 좋아하는 거 아직도 적응이 안 돼.”

미열이 툴툴대며 먼저 걸어가고, 찬우는 승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빠르게 두어 번 쓰다듬다가 뒤따라오던 현장 스타일리스트에게 걸려 ‘잘 가라앉혀 놓은 머리를 건들지 말라’며 주의를 받았다. 차마 남의 핸드폰을 확인할 배짱이 없는 이진이 멀뚱히 승현을 바라봤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유이진을 꼭 데리고 데뷔를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얼굴에 한가득 배어 나왔다.

이진은 ‘다정♥’이라고 적힌 팻말을 왼손에 ‘연상♥’이라고 적힌 팻말을 오른손에 쥔 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사람을 불렀으니 용건만 후딱 끝내 줬으면 좋겠는데 찬우 팀 팀원들끼리 의견 통일을 못해 또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이진 씨는 다정이 어울린다니까요? 미열 씨가 연상을 해야죠.”

“연상에 어울리는 건 좀 더 차분한 이진 씨가 낫지. 미열 씨가 쾌활함을 해야 한다고!”

“쾌활함은 우진 씨가 낫다니까?”

“저기 나 좀 지적인 이미지 아니에요?”

“지적? 미열 씨요?”

‘지적♥’ 팻말을 들고 도수 없는 안경을 낀 승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기, 적당히 하면 안 될까?”

리더인 찬우가 중재를 해 봤지만 찬우를 닮아 열정적인 팀원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토론을 이어 갔다. 최강희와 차명준이 특히 열정적이었다.

각자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팻말을 정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실상은 조금 달랐다. 팻말은 2인 1조로 지급된다. 원래는 팻말을 붙잡고 짧게 왈츠를 추는 안무가 있었는데, 이왕 두 명으로 추가된 김에 사람을 붙잡고 추기로 했다. 팻말을 뒤집어 ‘I LOVE U♥’ 글자가 나오게 만든 뒤 왈츠를 추는 낭만적이고 깜찍한 연출은 나름대로 야심차게 기획된 구간이었다.

그런데 찬우가 섭외해 온 참가자가 조금 멤버들의 예상과는 달랐던 것이다. 승현 팀에 유독 비쥬얼파 멤버가 많은 것이 문제였다.

인형 같다는 평을 듣는 사실상 잘하는 게 얼굴이 전부인 리웨이는 물론이고, 승현도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이상 속의 미인 같은 인상을 가졌다. 거기에 늘 룸메들과 붙어 다녀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보니 이진도 옆 사람을 아주 기죽이는 타입의 미남이었다. 다들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할 뮤직 비디오에서 굳이 얼굴 크기며 눈 크기며 외모를 비교 당할 게 뻔한데, 굳이 저들과 왈츠를 추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본방에 다시 보기에 비하인드 영상까지 꼬박꼬박 찾아보는 열성적인 팬보다 그냥 TV에서 하길래 본다는 시청자가 많이 서식하는 대형 커뮤니티에서는 참가자들의 외모를 비교하며 비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곳에 모욕적으로 이름이 언급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진은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른 채 캐릭터성에 굉장히 예민한 시기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럼 그냥 우리는 우리 팀끼리 짝지으면 어때요.”

지지부진한 논쟁에 결국 가만히 듣던 승현이 끼어들었다. 전혀 캐릭터성과 상관없는 의견임에도 가장 발전적이었다.

“타입을 각자 나눠서 적지 말고 상반된 이미지를 한 팻말에 적으면 되잖아요. 가사에 나오는 건 그쪽에서 들고 있고 우리는 새로운 타입을 추가할게요. 각 팀에서 7명씩이니까 연상/연하를 찬우 형이랑 웨이가 하면 되겠네요.”

승현이 딱딱 정리해서 해결책을 마련하자 찬우 팀은 굉장히 속 시원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던 이진이 지친 기운을 내비치자 찬우 팀의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근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저한테도 제가 제일 잘생겼다고 해 주는 팬 분들이 있거든요! 환상을 지켜 주고 싶다고!”

마지막에 가서 조금 연극조로 변하긴 진심이 듬뿍 묻어 나오는 외침이었다. 이진이 장조근인지 조장근인지 이름을 헷갈려 했던 그 참가자였다.

‘아, 별명이 장조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장조근이 맞겠다.’

그는 나쁘지 않은 보컬임에도 보컬 실력으로는 전혀 주목을 못 받고 오히려 웃긴 말과 행동을 많이 해서 흔히 말하는 ‘예능 멤버’로서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춤에 약간 방정맞은 기운이 묻어 나와서 더 그래 보였다.

‘근데 갑자기 외모 얘기는 왜 나와?’

이진은 ‘순진/능글’의 팻말을 들고 미열과 왈츠를 출 때쯤에야 그가 갑자기 외모 얘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했다. ‘듬직/엉성’의 팻말을 든 승현과 우진이 춤을 추는 걸 몰래 노려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설마, 선승현이랑 외모 비교될까 봐 계속 피한 거야?

‘뮤직 비디오의 완성도보다는 개인 투표가 중요한 거구나…….’

이진은 허탈한 기분에 의욕이 팍 꺾였다. 라운드가 올라갈수록 미션 점수의 비중이 줄어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왠지 떨떠름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를 좋아하는 팬들은 분명 외모가 아닌 무언가를 보고 그를 응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방송에서 보이는 성격, 실력, 태도, 미소까지. 그럼에도 팬들이 남과 비교되는 영상을 보고 환상이 깨질 거라고 하는 건 그들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진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을 들킬까, 눈앞에서 한껏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춤을 추는 미열을 외면했다.

테스트 촬영을 마치고 제작진 측에서 짧은 회의를 거쳤다. 팻말을 들고 추는 원본 버전과 수정된 버전을 비교하며 무어라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에서 전문가다운 포스가 드러나 보였다.

짐을 들고 나르고 잡다한 심부름을 하는 모습을 주로 목격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들도 각 분야의 프로페셔널이었다. 물론 거대한 장비와 촬영 상의 돌발 사항이 그들의 업무를 고되게 만드는 주범이긴 했다.

이진은 한때 카메라 뒤의 스텝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전문성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과거이자 미래였을 자신의 모습을 엿본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무대 위에 오를 사람은 스스로가 어떻게 보일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했지만 하이라이트 바로 옆, 가장 어두운 곳에 선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 자신보단 조명을 받는 피사체에 집중하곤 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는 일명 ‘스타 작곡가’라는 애매모호한 존재도 분명 있었기에 이진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외면한 것이기도 했다.

짧은 회의를 마친 그들은 승현 팀에게 예정된 본 촬영 다음날 협조를 구하겠다고 알려 왔다. 그렇게 미열의 불길한 예감은 모두 빗나가고 아무 일 없이 이제야 숙소로 돌아가겠구나 생각한 찰나였다.

“아,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만 나르면 끝나요.”

한 스태프가 조명 케이스를 가지고 내려오다 와글대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찬우 팀 때문에 잠깐 2층 난간에 기대어 발걸음을 멈췄다. 체구보다 조금 커 버거워 보이는 짐 때문인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스태프는 노후된 난간이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 봐도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부서진 난간과 함께 무거운 조명과 사람이 추락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 승현이 서 있다는 사실은, 이진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영화 속에서 일분일초를 다투는 다급한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연출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광경을 목격하고 만 이진의 시간도 느리게 흘렀다. 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승현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작게 미소를 띠고 있다가 비명 소리를 듣고선 놀라 몸을 굳혔다.

‘선승현은 피하지 못해.’

이진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렸다.

“꺄악!”

요란한 비명 소리와 쿵, 무거운 물체가 추락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다행히 반사 신경이 좋은 찬우가 추락하는 사람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을 2층에서 다 같이 끌어올렸다.

그 밑에 사람이 있었단 걸 기억하는 몇 명이 다급히 고개를 내려 아래층을 확인했다. 무거운 조명이 떨어진 탓에 거하게 파인 목재 바닥이 보이고, 그 옆으로 널브러진 조명과 난간, 그리고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형, 이진이 형.”

눈앞이 노란빛이 번쩍 점등했다가 검어졌다 다시 하얘지고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 거대해 이명마저 울렸다. 촉각을 제외한 오감이 미친 듯이 예민해졌지만 스스로도 무슨 행동을 벌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뺨과 왼손, 배와 허벅지에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누군가 오른손과 무릎으로 차가운 바닥을 짚었다. 익숙한 체취와 형상이었으나 그게 누구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던 이진의 이성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몸도 약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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