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75화 (75/173)

75화

[울 이진이 오빠는 뭐 해? -선수빈-]

승현은 합숙이 시작된 후로 쏟아지는 문자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아잉~ 읽씹하지 말구. 울 오빠 뭐하는지 보고 좀! -선수빈-]

[유이진이 왜 니 오빠야.]

[승현 오빠 형이니까 수비니네 오빠지^♡^ -선수빈-]

스튜디오 촬영 직후 잠깐 틈이 난 새에 연락이 왔길래 무심코 3라운드 스포일러를 해 버린 게 원흉이었다. 어린 동생은 이진과 같은 팀이 됐다고 하자 아주 신이 나서는 그 후 본인의 쉬는 시간마다 살살 애교를 부려 가며 근황 보고를 부탁했다.

자진해서 애교 부리는 수빈을 무시했다가는 단단히 삐져서는 한동안 틱틱댈 게 뻔한지라 승현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진의 시시콜콜한 행동을 보고하게 되었다. 한창 떠들기 좋아할 나이이니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어떻게 말이 나갈지 모르기에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수빈이 만족할 만한 사소한 사건들을 찾아내 알려 주느라 진땀을 뺐다. 질 나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

[오빠는 지금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

[헐!! 이진이 오빠 무슨 맛 먹어? -선수빈-]

[승현이 오빠랑 같은 맛.]

[ㅠㅠㅠㅠ귀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선수빈-]

승현이 무슨 맛을 먹는지도 모르면서 뭐가 귀엽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문자를 확인한 승현은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안 그래도 이진과 떨떠름한 말다툼을 해 신경 쓰이는데 동생까지 아주 난리였다.

‘하…… 맘대로 되는 게 없냐.’

솔직히 이진이 한 말이 반쯤 맞기는 했다. 승현은 이진을 가지고 놀려고 접근했다.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고, 이진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떨어지는 내기를 듣고 대번에 승낙한 이후로 상심이 너무 크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어떻게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친한 척을 한답시고 천천히 접근했다.

이진에게 다가가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진을 대하는 요령이 생기기도 했고 이게 진심이 아니라 생각하니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승현은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게 맞으니 억지로 친절한 척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진은 첫인상보다 굉장히 불안하고 유약한 사람이었다. 아주 견고한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오직 자신 있는 영역에 한해서였다. 유이진은 남들의 시선과 사람 간의 갈등에 몹시 취약했다. 대체 무대엔 어떻게 서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도 버거워했다.

‘소형견이 더 잘 짖는다더니…….’

승현이 할 일은 간단했다. 이진이 상처받고 돌아오면 조용히 그를 지지하고 아픈 마음을 보듬어 주면 그만이었다. 찬우는 마음을 편하게 했지만 성격이 단순해 누군가를 보듬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미열은 워낙 오지랖이 넓었다.

이진의 지지자 역할은 승현을 위해 준비된 듯 완벽히 들어맞았다.

주변 상황까지 잘 따라 준 덕분에 이진은 조금씩 승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역할 만족도는 몹시 높았다. 이진이 그에게서 위안을 얻으면 승현 또한 위안을 얻었다. 이진이 그로 인해 기뻐하면 승현도 기뻤다.

‘순진한 유이진.’

이진이 내기에서 이기더라도 승현과 함께 데뷔하길 바라도록 만들어 놓고, 막상 자신이 내기에서 이기면 생각지도 못한 배신을 때려 이진이 슬퍼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계획이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 좋고 인기도 많고 착하기까지 한 유이진을 굳이 복수를 하겠답시고 버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비효율적일 데가.

그리고 방송이 진행되며 깨닫게 된 건데 애초에 모두에게 투표수가 공개되는 이상, 1위가 멤버를 고르는 의식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랑 친하다고 2위 대신 14위를 뽑았다간 그날로 팬덤이 아작 나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니까 유이진은 나랑 같이 데뷔하겠네.’

아직 5라운드 근처에도 가지 않아 놓고 그런 오만한 생각을 했다. 이건 승현만의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 이진을 적당히 가지고 놀면서 그와 함께할 미래를 상상하는 것. 그게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당시의 승현은 깨닫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걸 눈치채기 시작한 건 이진이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였다.

본래 사고를 무서워하는 승현이지만 그날은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이진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승현에게 너무 큰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승현은 이진을 볼 때면 종종 불안해졌다. 자신이 이진에게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단 걸 들켜 버린다면, 그로 인해 유이진이 상처 입어 버리면 어떻게 하지?

승현의 악몽은 주로 과거를 비췄지만, 요새는 미래에 대한 악몽을 많이 꿨다. 악몽은 대체로 이랬다. 갖은 고생 끝에 데뷔한 승현을 향해 대중들이 손가락질하고 기자들은 승현의 과거를 들춰내기에 여념이 없는데, 곁에 의지할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데뷔를 하며 가족과의 연을 끊어 버렸고 미열과는 방송 진행 중에 사이가 틀어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데뷔를 하지 못한 이진은 승현을 끔찍이 미워했다.

한밤 중 악몽에서 깨어난 승현은 좀처럼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곁에서 새근대는 숨소리를 내며 잠든 이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무리 잘해 주고 잘해 줘도 모자란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순간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이진은 영원히 자신을 혐오할 것만 같았다.

승현은 예기치 못하게 이진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음을 인정했다.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을 처리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더는 불안하지 않도록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거나 더는 그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것. 승현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며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승현에게 우진이 슬쩍 말을 붙여 왔다.

“저기, 형. 혹시…… 이진이 형 기분 안 좋아?”

원래도 약간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우진이 얼렁뚱땅 말을 놓아 버려서 대화가 굉장히 어색했다. 승현은 별로 존대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대학에서 자주 군기를 잡혔던 우진은 무서운 선배를 연상시키는 그에게 함부로 말을 놓기 어려워했다. 그렇게 말 붙이기 힘든 상대에게 우물쭈물 말을 걸면서까지 이진의 심기를 파악하려고 드는 게 승현은 참 아니꼬웠다.

“잘 모르겠는데. 직접 물어봐.”

“아…… 센터 안무를 약간 보완할 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이진이 형한테 먼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승현은 우진을 결코 좋게 보진 않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는 성실하고 열의가 넘치는 참가자였다. 본인이 노력하는 만큼의 결과도 어느 정도는 얻는 듯하고 무엇보다 이진에게 몹시 호의적이었다. 이진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우진을 피하고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잘해 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승현은 우울한 얼굴로 찬우 옆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냠냠대는 이진을 힐끔 보곤 생각했다. 찬우는 손익 계산이 밝지 않고 무작정 성실한 사람이라 곁에 둬도 좋다. 미열은 계산이 빠르고 얌체 같지만 그에게 필요한 존재일 경우 배신당할 걱정은 없다. 하늘은 이진에겐 관심이 없다. 인간적으로는 좋게 보는 것 같지만…… 하늘의 시선은 미열보다 훨씬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그의 기준에서 스물네 살은 중박 아이돌 은퇴 적령기니 이진의 상품 가치를 높게 평가하진 않을 터였다.

이런저런 놈들 속에서 순박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우진은 이진이 가까이 하는 편이 이득인 상대였다.

“안무 감독님한테 상의부터 해 봐. 감독님이 괜찮다 하시면 이진이 형한테는 내가 말할게.”

“정말? 알았어. 고마워!”

우진이 한결 밝은 표정으로 안무 감독을 찾아 떠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진의 센터를 뺏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보일까 봐 걱정되는 것 같았다. 괜히 나서다가 이진에게 미움받을까 봐 불안하긴 하겠지. 1라운드의 승현이 딱 저 꼴이었다.

다시 홀로 남은 승현에게 이번에는 미열이 다가왔다.

“괜히 온 것 같지 않냐? 생각보다 애들끼리 교류도 없고, 금방 맞추고 갈 것 같았는데 좀 딜레이 되고.”

“어차피 돌아가 봤자 할 것도 없었잖아.”

“그게 수상하단 말이야. 이렇게까지 한가할 리가 없는데…….”

승현은 미열이 뭐라고 궁시렁대는 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다시 이진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현은 이진과 다시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진이 두 사람 사이의 내기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있는 줄 몰랐을 때 일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자신감은 박살 나고 이진과의 관계도 박살 직전이었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이렇게나 들여 본 적이 있던가? 승현은 새 여동생 둘을 만나 강제로 동거하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이진 짜증 나…….’

이진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찬우와 무어라 조잘대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진은 승현이 아닌 사람들에게 너무 관대해 그것이 늘 불만스러웠다. 누군가 나쁜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다면 이진의 멘탈은 아주 갈기갈기 난도질당해 아이돌 데뷔고 뭐고 아무것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쁜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 승현이 정말로 그 계획을 실행했더라면…….

‘내가 쓰레기지. 나 혼자 쓰레기야.’

그때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무언가 우당탕 요란한 굉음을 내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밖에 세워 둔 거 다 무너졌네.”

조만간 도착할 촬영 장비 차량을 위해 주차장을 비워 뒀는데 대충 문 옆에 쌓아 둔 짐이 바람 때문에 무너진 모양이었다. 파라솔이나 바비큐 그릴들이 부딪혀 요란하고 끔찍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어우……. 조심 좀 하자!”

관리자 급의 중년 남자가 말단 스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스텝들이 투덜거리며 하나둘 정리하러 나가는 사이 승현은 가까스로 놀란 심장을 다스릴 수 있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증상은 스트레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음이 평온하면 어떤 굉음을 들어도 잠깐 크게 놀라는 정도로 그치지만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며칠이고 쿵쿵대는 심장 소리에 시달릴 정도로 영향이 컸다.

어릴 적 승현이 공황 상태에 빠지면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꼭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부터는 동생인 재현이 엄마를 흉내 내며 ‘형아 괜찮아?’ 하고 달래 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타인의 온기를 느끼면 조금 더 쉽게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체온 없이는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수현이 안고 있으면 기분 좋은데…….’

어린 동생을 안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며 불안을 애써 걷어 내는데, 미열이 앉은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휴, 바람이 많이 분다. 그렇지? 해는 좀 없었어도 아까는 계속 잠잠했는데…….”

이진이 모르는 척 새침한 표정을 하고 승현의 곁에 앉은 것이다. 그러면서 아닌 척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찌르는데 귀와 뒷목이 분홍빛으로 울긋불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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