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승현이 가볍게 던진 말에 이유 모를 분노가 일었다. 순간 열이 확 몰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시야는 어질어질했고 심장이 과하게 빠르게 뛰었다. 손끝마저 벌벌 떨렸다.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는 몰라도 이진은 굉장히 화가 났다.
“너…… 나 가지고 장난쳐?”
“네?”
“내가 너한테 빌빌 기니까 만만해 보이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될 것 같아?”
승현이 당황해 눈을 크게 뜨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흥분한 이진은 벌어진 거리를 다시금 좁히며 가까이 다가섰다.
“친한 척? 여태까지 하던 게 친한 척이었어? 남의 일상에 쳐들어와서 함부로 굴어도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쉽지? 너 내킬 때만 친하게 굴고 고까우면 그 좆같은 내기나 들먹이고……!”
‘좆같은’을 발음할 때 혀가 꼬여 아주 거센 어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그러려던 게 아니면 뭐!”
승현이 눈을 피해 아래를 바라보자 이진은 더욱더 열이 뻗쳤다. 이게 눈을 피해? 근본 없는 화가 온몸을 가득 덮었다.
“똑바로 안 봐?”
이진은 기어이 승현의 멱살을 잡아챘다. 승현의 몸이 휙 기울었다.
‘아차……!’
흥분해서 멱살을 잡긴 했는데 이렇게 쉽게 훅 끌려올 줄은 몰랐다. 승현도 이진의 행동을 예상치 못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액션, 스릴러 영화 속 남자 배우처럼 승현의 얼굴을 가까이 끌고 와 버린 이진은 제가 한 짓에 화들짝 놀라 잡았던 멱살을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뒀다.
“거, 총각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주인 할머니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고함을 쳤다. 이진이 어버버대는 틈에 승현이 아이스크림을 담은 바스켓을 빼앗아 들고는 계산대로 가져갔다.
삑, 삑. 삑.
단조로운 바코드 찍는 소리와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가격별 아이스크림의 수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현과 이진은 계산을 마치고 거대한 비닐 봉투 하나를 넘겨받아 가게를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침묵을 지켰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대는 소리가 멎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내가 1라운드 이후로 너한테 나쁘게 군 적 있어? 내가 내기 소리만 나오면 바르르 떠는 게 만만해서 일부러 끄집어 내는 거 맞잖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똑바로 설명을 해 보든가! 자꾸 이딴 식으로 굴 거면 내기고 뭐고 그냥 아는 척하지 마! 방송이고 뭐고 아주…….”
“형, 제발 진정 좀 해 봐요!”
승현이 이진의 어깨를 잡으며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진은 그 손을 뿌리치고 한 발자국 물러서 승현을 노려봤다. 그리고 턱짓을 했다. 변명이든 뭐든 지껄일 시간을 준 것이다.
“친한 척이라고 안 하면 또 선 긋고 화낼까 봐 그랬어요. 그러는 형이야말로 저번에 우리 친하냐고 물어봤을 때 제대로 대답도 안 해 줬잖아요!”
“그, 그건…….”
“형이 지금 정말로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 좆같은 내기 때문에 적당히 어울려 주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충격적이게도 승현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진지하게 사는 점을 고려하자면, 아주 심각하게 진지했다. 평소엔 반쯤만 뜨고 다니던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는데 쏟아져 나오는 안광이 그렇게 날카로울 수가 없었다. 이진의 심장을 수십 번 꿰뚫는 것 같았다.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불편한 거 아니라면서요.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으면서 왜 거짓말해요? 형이랑 다시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형이 거짓말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진은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불현듯 얼마 전 승현이 사랑의 증상을 친구에게도 느낄 수 있다며 이진을 지목한 것이 떠올랐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싫어하면 상처받아요…….”
승현이 눈을 내리며 우울하게 말했다. 이진은 숨을 들이켰다. 어딜 가든 눈에 띄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인 적 없었던 이진이, 다름 아닌 승현에게 그토록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단 사실이 감동마저 불러일으켰다.
“네가 원한다면, 누구나 널 사랑해 줄 텐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요.”
눈빛이 원망을 쏟아 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냐고, 왜 이런 비참한 말까지 하게 만드냐고. 이진을 다그치듯 쫓아왔다.
“선승현, 나도 네가 좋아. 너랑 친해지고 싶어. 이렇게 말하면 믿을 수 있겠니?”
“솔직히 못 믿겠어요.”
예상한 바였다. 전혀 다른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승현도 이진과 비슷한 부류였다. 끊임없이 남의 애정을 의심하고 시험하다 결국은 거부하고 마는.
“그럼 다시 원점이네. 내가 어떻게 증명이라도 해야 할까?”
“차라리 날 싫어해요. 형이 뭘 증명하느니 차라리 그게 나아요.”
“자꾸 내기를 들먹이는 이유가 있었구나. 넌 그냥 내가 널 정말로 좋아할까 봐 걱정하는 거였어. 그게 무서운 거지?”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애정을 원하지만 누군가 애정을 주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거부한다.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너무 굶주려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마음마저 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말까 봐.
“어제 내 대답을 안 듣고 가 버린 것도 그래서지? 너랑 같이 데뷔하고 싶냐고 물었지. 솔직하게 말해 줄게.”
이진이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았다. 흐느끼듯 거칠고 가파른 호흡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눈앞의 승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싫어했던,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편하게 생각했던 톱스타로서의 선승현이 아니라 눈앞에서 날것의 감정을 토해 해는 인간 선승현을 바라봤다.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싫어했던,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편하게 생각했던 선승현이 아니라 지금 그의 앞에서 날것의 감정을 토해 해는 선승현을 바라봤다.
“모르겠어. 왜냐면 네가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잘못하면 어디까지 추락할지도 알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너에 대해 많이 알아. 사람들이 아직은 모르는 것까지도. 네가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전부 알고 있어.”
그게 이진의 진심이었다. 오랜 외로움을 달래 주는 승현은 너무나 달았다. 그가 알려 준 행복의 맛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버릴 만큼 달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건 이진이 바라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바라본 승현이었다.
승현은 가족 관계에 예민했으며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쉽게 잊지도 못하며 그의 헌신적임은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선승현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제야 그 의미가 분명하게 실감되기 시작했다.
단지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고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태도나 사고가 변화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승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가 변화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모습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너랑 같이 데뷔하고, 네가 성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러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더라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미 살아온 과거, 오래 굳어져 버린 무의식, 그의 가정사, 성격, 어쩌면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미래까지.
이진은 그 모두를 감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줄 알았다. 모든 건 승현의 일이었으니까. 그가 느낄 고통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관계란 건 그렇게 쉽고 간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떠올리고, 목소리를 기억하고, 추억이 쌓인 이상. 선승현은 이진이라는 존재를 이루는 한 부분이었으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목이 메어 와 말을 더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울면 눈이 붉어질 텐데, 카메라에 흠 잡힐 짓을 하면 안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중얼거린 승현이 이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살짝 힘을 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진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승현은 들썩이는 등을 가만 토닥였다.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얘기해 줄 거죠?”
“응……. 이렇게 되어 버리기 전에 해야만 했어.”
거기까지 말하자 승현이 비닐봉지를 이진의 눈앞에 들이밀며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이러다 아이스크림 녹겠어요. 찬우 형도 형 보고 싶어서 목이 빠져라 기다릴 텐데.”
머뭇거리던 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은 몸을 돌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 뒤로도 이진의 우울한 기색을 느낀 건지 아니면 못 다한 말 때문에 답답했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형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았어요. 나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게 너무 기뻤어요.”
앞을 보고 뚜벅뚜벅 걷기만 하니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우진이나 다른 애들한테도 잘해 주는 걸 보고 형이 다정한 사람인 게 싫어졌어요. 나를 전부 이해하고 난 뒤에, 내가 별것도 아닌 사람인 걸 알고 떠나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이진도 알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굉장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감정이란걸. 벅차오르고, 절망하고, 세상을 온통 가졌다가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그 기복은 스스로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영역임을 알았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기분 느껴 본 적 없는데 형은 이미 다른 사람한테 느껴 봤다고 해서 그것도 질투가 났어요.”
이진은 순간 발을 멈칫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끊임없이 생각했다. 지금 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승현이 질투했다는 감정이라고 할 법한 건 얼마 전에 말했던 첫사랑 정도가 전부 아니던가.
‘잠깐. 선승현…… 설마 쟤 진짜 나 좋아하는 거야?’
한참 뇌를 가득 침몰시키던 끔찍함이 배수구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 자리를 혼란함이 차지했다.
“차라리 형이 남자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사귀자고 고백하면 될 텐데.”
“뭐?”
그리고 혼란한 배수구 구멍에 갑자기 핵폭탄이 날아와 박혔다. 이진은 이러한 반응이 방금 전 조용한 고백 타임과 어울리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큰 소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아이돌이 연애하면 안 되죠.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승현은 이진이 지금 어디에 놀랐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귀자고 고백하면 될 텐데’ 라니. 설마 지금 자신의 감정을 친구들 간의 진한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요즘은 그런 깊은 우정도 유사 연애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니까 쟤가 나를 진짜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데…… 아직 본인이 모르고 있다고?’
처량한 뒷모습에서 느껴지던 아련한 감상이 깨지고, 그가 머저리로 바뀌어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