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진은 펜션 이곳저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향해 필사적으로 관심을 모으던 멤버들을 떠올렸다. 뜬금없이 춤을 추기도 하고, 굳이 그 앞에서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별일이 없으면 가급적 카메라를 피해 다니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승현아, 우리 센터 말이야.”
그래서 자꾸 마음에 걸리던 일을 입에 올렸다. 입을 떼기가 무섭게 승현이 이진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우진이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맘대로 형한테 줘 버린 것 같아서요?”
승현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표현하면 승현이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조금 순화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지는 같기에 우선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형이 정 마음에 걸리면 이우진한테도 연습해 보라고 할게요. 어차피 지금 당장 촬영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 놀리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래도 괜찮아?”
기껏 준 자리를 제 발로 차 버린다고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이진이 센터를 하는 것에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이진이 그 자리를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고 있던 듯 구체적인 행동부터 제안했다.
“형이야말로 괜찮아요? 이대로 센터 뺏길지도 모르는데요.”
“난 별로 센터감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형은 진짜 아이돌 지망생 아닌 티가 나요.”
승현이 씩 웃었다. 확실히 이진은 아이돌 지망생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가 아이돌이란 직업에 미련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3년 전, 선승현이 윈올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저 자리에 내가 서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다.
“우선 이우진한테는 말해 놓을게요. 근데 너무 기대할지도 모르니까, 좀 더 우리 컨셉에 어울리는 쪽을 피디님과 상의해 보고 결정하자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형도 센터 안무 까먹지 말아요.”
“나는 우진이 파트 연습해야지.”
“그거 어차피 하루 보면 끝나는데 뭘.”
그건 사실이었다. 그만큼 3라운드 무대는 동선도 안무도 쉬운 편이었다.
“우리 놀면서 방송한다는 소리 들으면 어떡하지?”
“사실이니까 받아들여야죠.”
승현이 아무렇게나 말했다. 이진은 그가 쥐여 준 음료수를 쪽쪽 빨아 마셨다. 승현은 이진에게 등을 보이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진은 지금의 침묵도 나쁘지 않았지만, 왜인지 더 말을 걸고 싶었다. 이진은 이유를 찾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입을 열었다.
“선승현.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춤이나 노래 같은 거 안 배운 게 사실이야?”
이진은 몸을 반쯤 빙글 돌려 승현을 바라보고 누웠다. 승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어느새 노을이 져 붉은기가 도는 햇빛이 얼굴 굴곡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음. 아예 안 배운 건 아니에요. 저 옛날에 바비에서 잠깐 연습했었거든요.”
“뭐? 바비면…… 그 바비 엔터?”
“네. 그래서 하늘이랑도 그때 잠깐 알았어요.”
이진은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선승현과 바비. 충격적이게도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대체 몇 살 때?”
“중 2였나? 여름 방학에만 잠깐 다니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그만뒀죠.”
부모님께 걸려 그만뒀다면 연습생 계약서를 쓰지 않았거나 계약서 자체에 효력이 없었단 뜻이었다. 새삼 이진은 승현도 아주 오래된 꿈을 좇아 이 자리에 있음을 실감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우연히 벼락 스타가 된 것이 아니라 그에게도 진영이나 찬우, 그리고 이진처럼 꿈을 좇아 노력한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뭐…… 사실 그때 배운 것들은 거의 까먹었어요. 어떻게든 짬 내서 연습해 보려고 해도 삶이 정신없어지니까 어렵더라고요.”
“아, 재혼?”
“어…….”
승현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이진의 눈을 피했다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몸을 아예 이진 쪽으로 돌려 앉아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이진의 심장도 철렁, 멈추고 말았다.
“맞긴 한데, 알고 있었어요?”
아마 방금 의도한 ‘삶이 정신없어진 시기’는 고등학교 진학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진은 반사적으로 승현 어머니의 재혼을 떠올렸다. 그의 부유한 새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두 여동생, 그리고 나이가 까마득히 어린 동생까지.
그리고 그 생각을 실수로 입 밖으로 내 버렸다.
“미안……. 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백미열이 말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그날 우리 집에서 보고 티가 났을 수도…….”
“아니야. 미열이가 그런 거 아니고……. 미안해.”
승현은 이진의 사과에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이진은 불안하게 눈을 껌뻑이며 시선을 받아 냈다.
“큰일이네.”
“뭐가?”
“형이 나를 예상보다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네가 아니라?’ 이진은 간신히 그 말을 참아 냈다. 승현의 말투에 이진을 놀리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의 가정사 좀 추측해서 알고 있는 게 뭐 그렇게 미안할 일이라고. 나도 형이 고아인 거 알고 있으니까 샘샘 아니에요?”
이진은 승현의 입에서 나온 ‘고아’란 단어에 몸을 움찔했다. 그 이후로 언급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이진이 응급실에 실려 갔던 이후로 그도 자신의 비밀을 전부 알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진을 배려해 여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지금에 와서 노골적인 단어까지 사용해 그 일을 끌어 올리는 건 어쩐지 평소의 승현답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건 예민할 수밖에 없는 화제니까 그렇지. 너도 지금 아닌 척 화내고 있잖아.”
“맞아요. 부모님 재혼하신 거 알려지는 거 싫어해요. 내가 초대해서 알려 준 꼴이면서 화내서 미안해요.”
승현이 순순히 사과했다. 그래 놓고 느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더니 감정을 싹 지운 서늘한 눈으로 이진을 응시했다.
“그런데 형이 날 너무 좋아하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가끔 우리 내기를 잊고 있나 싶을 정도로.”
“승현아.”
“확실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와서 내가 좋아졌다고 내기 같은 거 없던 셈 쳐도 되는 거예요? 나는 형 때문에 매일 밤 잠도 못 자고 슬피 울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조금 장난이 섞이긴 했지만 분명히 진심이었다. 마치 이때까지 친한 척 굴었던 게 전부 거짓인 것처럼 승현은 순식간에 이진에게서 멀어졌다.
“나랑 같이 데뷔하고 싶어요?”
순간 이진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니, 끄덕이려고 했다. 승현에게 변화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내가 널 그렇게 상처 입혔다면 사과하겠다고, 이제 쓸데없는 감정싸움 같은 건 그만하고 싶다고.
그러나 승현은 이번에도 이진의 말을 가로챘다.
“대답하지 말아요. 너무 쉽게 그렇다고 하면 내가 형을 어떻게 믿겠어요.”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슬쩍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곧 지우고 곤란한 듯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요. 요새 부모님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예민한가 봐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이우진한테는 제가 얘기해 둘게요. 형은 좀 쉬다가 저녁 먹기 전에는 내려와요.”
이진이 대답을 못하자 승현은 한숨을 푹 쉬고 방을 나가 버렸다. 이진은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좋던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며 자책했다.
‘설명해야 해. 선승현이랑 제대로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이진은 자신이 왜 승현을 그토록 밀어 냈는지, 왜 그런 내기에 쉬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어떻게 그의 가정사를 알게 되었는지 전부 설명하기로 했다. 미친놈 취급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진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에 관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날의 선택으로 이진이 3년간 어떤 삶을 살아왔고 승현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이야기해야 했다.
***
-여기 피디님한테 확인해 봤는데 지금 자암깐만 와서 그림 확인하고 괜찮으면 너희 쪽이랑 촬영 스케줄 조율해 주신대!
다음 날 찬우에게 연락이 왔다. 승현이 아직 자고 있어 이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 탓에 그가 나서서 팀원들의 의견을 취합해야 했다.
“지금? 점심도 안 먹었다.”
“가서 같이 먹지, 뭐.”
보원과 현기가 말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거울을 보고 표정 연기를 하던 리웨이와 미열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어제 센터 안무를 연습해 보란 소리를 듣고 신나서 한참을 연습실에 박혀 있었지만 이진이 물어보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이만 깨워서 금방 갈게.”
-피디님, 이진이가 지금 온다는데요? 아. 오래, 오래! 그리고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좀 사다 주라.
“갑자기? 뭐 소품 같은 거야?”
-아뉘, 아뉘. 찬우가 먹고 시퍼잉!
찬우의 애교가 스피커폰을 통해 우렁차게 들렸다. 다들 듣지 못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러 갔다. 이진만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굳어 찬우가 몇 번이나 전화가 끊어진 거냐고 되물어야 했다.
이진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동네 슈퍼에 간다고 하자 승현이 자진해 따라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대화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이진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가게로 향하는 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오래된 가게였으나 유난히 아이스크림 코너만 신식이었다. 자세히 보니 피서객들이 주로 찾을 만한 물건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다른 물건들은 먼지가 거뭇하게 쌓여 몇 달은 손대지 않아 보였다.
벌써 카메라까지 동원해 연습을 한다고 하니 스태프들이 꽤 모여 있을 것 같아 손에 잡히는 대로 아이스크림을 담아 댔다. 취향 것 고를 수 있도록 초코 맛, 딸기 맛, 포도 맛, 소다 맛에 녹차, 바닐라, 팥까지. 속으로 개수를 헤아리며 담던 이진이 막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차가운 냉동고 속에서 따끈한 것이 손을 스쳤다.
‘히익!’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휙 빼내고 확인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한 승현이었다. 본인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집으려던 그와 손이 잠깐 스쳤던 것이다.
“무슨 기겁을 그렇게…….”
“아니, 노, 놀라서.”
이진은 승현을 어려워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자신을 마구 책망했다. 그날의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가 내보였던 싸늘함이 떠올라 자꾸 겁을 먹고 말았다. 그간 쌓인 감정에 일정 부분 이진의 과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책임을 다하기로 했으나…… 마음에 들여놓은 상대와 멀어짐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기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진이 형…….”
승현이 조심스럽게 이진을 불렀다. 이진은 이 침묵의 순간이 너무 싫었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태연을 가장한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가자 승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내가 불편해요?”
“어? 아니, 아니야!”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요?”
“아니, 아니래도…….”
이진은 안절부절못하며 부정했다. 요새 두 사람 사이는 줄곧 상승세였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밑바닥을 보여 주고 나니 매일매일 조금씩 더 친해지고 익숙해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처음의 세한 냉기를 풍기던 관계와 비교하자면 지금은 베스트 프렌드라는 명칭을 붙여도 좋을 만큼 원만하고 평온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 밑에는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라운드에 도달하면 펑 터져 버리고 말.
만약 승현이 그가 세워 둔 벽을 허물고 저 깊이 묻어 둔 진심까지 파헤친 뒤 갑자기 후퇴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 버린다면, 이진에게 커다란 구멍을 남겨 두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 버리는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면……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러면 형.”
“으, 응?”
이진은 이제 그냥 승현의 입을 아이스크림으로 틀어막고 후다닥 계산한 뒤 찬우와 미열에게로 도망가고 싶었다.
“나 다시 친한 척해도 돼요?”
“뭐?”
“형한테 말 못 거니까 심심해요. 형과 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