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72화 (72/173)

72화

“이거 그거 아니야? 하늘이랑 이진이가 이름 지었던 거?”

“하늘이가 뭐라고 했더라?”

“퍼플 러쉬였나 스카이였나……?”

이진은 인형 탈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그거 아니었나? 보라돌이 무덤?”

“무덤?”

“백구의 보라돌이 시체? 이런 느낌이었는데?”

“상식적으로 음식 이름에 그런 입맛 떨어지는 단어를 썼을까요?”

“아니, 이진이잖아. 걔 약간 그런 감성이야.”

찬우의 주장을 태원이 반박했으나 찬우는 이진이 ‘그런 감성’이라고 매도했다. 반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진은 속으로 분개했다.

“아. 백만 스물두 마리의 보라돌이!”

“그 숫자가 아니지 않나?”

“맞아! 저작권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맨이 적당히 끊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진은 다시 분홍 젤리가 보이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아……. 어, 얼마 드리면 되는 거죠?”

차명준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진도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는 들은 바가 없었다. 카메라맨을 바라보자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값을 치루라고만 했으니까, 꼭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

최강희가 주장했다. 이진은 대충하라는 듯 손을 휙휙 휘저었다. 당연히 개인기를 보여 주거나 춤을 추거나 할 줄 알았는데, 최강희는 냉장고로 가서 정말 아이스크림 가격과 비슷할 만큼 많은 양의 과자를 한 아름 가져왔다.

“몰래 먹으려고 숨겨 둔 건데 고양이 씨 너무 마른 것 같아요. 이거 많이 먹고 토실토실 살쪄 주세요!”

“강희야, 그건 저주야.”

태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이진의 품에 큰 과자를 안겨 주더니 손이 모자라자 트레이닝복 후드에까지 가득 채워 넣었다.

“우리 보스 꼴이 이게 뭐야…….”

이진을 배웅하며 찬우가 말했다. 이진은 찬우를 인형 장갑으로 퍽 치고 카메라맨과 함께 다음 장소로 향하려 했다.

“찐찐, 잠만!”

찬우가 이진을 잡았다. 나름 정체를 숨겨 준답시고 별명을 부른 것 같은데, 찬우가 찐찐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이진뿐인 건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이었다.

“원래 따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너희 팀 혹시 시간 괜찮으면 우리 뮤비에 특별 출연해 줄 수 있어?”

행동으로 답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이진은 결국 인형 탈을 벗었다.

“뭐?”

“아니, 너희 안 바쁘면. 피디님한테 여쭤봤을 땐 너희가 제일 한가하다고 했거든.”

“대체 어떻게 특별 출연을 해? 최대한 동선 내에서 움직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진이 묻자 찬우가 인형 탈에 삐치고 눌린 머리카락들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우리 팀 노래가 ‘What’s your taste?’인데 첫사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가사거든. 취향이라는 의미에 맞게 좀 더 많은 사람이 출연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게 제작진이랑 합의가 된 거야?”

“응. 연출상으로는 크게 달라지는 게 없고 한 화면에 잡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뿐이야. 안무 익히고 이럴 필요도 없어.”

찬우는 제법 진지하게 설명했다.

“너 지금 들고 있는 팻말, 팻말 맞나? 하여튼 거기에 연상 or 연하, 다정 or 귀여움, 지적임 or 쾌활함 이런 게 써 있고, 그걸 들고 있다가 신호하면 반대로 뒤집기만 하면 돼. 뒤집었을 때 ‘I LOVE YOU’가 나오는 연출인데 꽤 귀여워.”

“쉬워 보이긴 하네. 근데,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아이스크림 배달 끝나고 승현이랑 애들한테 말 좀 꺼내 줘. 아마 좋아할 거야.”

아직까지는 코어 팬의 행동력보다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생존을 좌우하는 시기였다. 초반에 인지도를 쌓지 못한 참가자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환영할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참가자 수에서 절반이나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건 오직 28명뿐이었다.

“알았어. 그럼 이따 연락할게.”

이진은 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맨과 함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펜션끼리의 거리가 걸어서 10분씩은 되어서 자동차를 탔는데, 그사이에 빈 아이스박스에 아이스크림을 충전했다.

다음 장소는 제이슨 팀이었다. 이진은 한 번 해 봐서 익숙해졌다고 망설이지 않고 팻말을 들어 문을 쿵쿵 두드렸다.

“뭐야. 누구세요?”

문을 열고 나온 건 진영이었다. 이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팻말을 올려 보였다.

“이진이? 너 뭐 해?”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진은 아이스박스를 열고 다시 팻말을 쿡쿡 찌르며 미션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아, 그렇구나.” 하고 말한 진영이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자기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이진은 어이가 없어 그를 두고 펜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야, 이진아. 나 고민 있는데 좀 들어 줄래?”

그런데 진영이 뜬금없이 이진을 마당 벤치로 끌고 가 앉히는 게 아닌가. 이진이 카메라맨을 가리켰다.

‘지금 촬영 중이라고!’

카메라맨은 이진의 손짓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카메라를 내리고 빨리 끝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진은 1라운드 이후 진영과 어색하고 뜨뜻미지근한 관계였기에 촬영 핑계라도 대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가만 놔주질 않았다.

“어제 소속사 통해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해외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하는 프로그램에 섭외가 됐대.”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데뷔 확정도 아닌데 벌써 예능 섭외라니. 단체 활동 스케줄 때문에 제약은 좀 있지만 나름대로 홀로 서기의 좋은 신호였다.

“해외 관광청이랑 컬래버해서 뭐 이것저것 투자도 많이 받고…… 인지도는 좀 낮아도 음악성 있는 뮤지션들이 꽤 출연하나 봐. 같이 여행 다니면서 고생 좀 하고 현지 아티스트한테 영감도 주고 하는 방향으로 기획 중이래.”

이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파일럿 촬영이 바로 다음 주라는 거야. 원래 예정되어 있던 가수가 펑크 나서 후순위한테 연락 쫙 돌렸는데 일정이 너무 급해서 나한테까지 내려온 거지.”

그 말은 즉, 진영이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이슨이 4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진영도 아직 12위로 충분히 데뷔를 노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어떡할까, 이진아?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형이 선택해야지.”

이진은 결국 답답한 인형 탈을 벗었다.

“그렇긴 한데 다른 애들 의견은 어떤지 들어 보고 싶어서.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해 버릴지도 모르잖아.”

“형은 어쩌고 싶은데?”

“나야…….”

진영이 말끝을 흐리더니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스푼으로 긁어 댔다. 처음엔 랩 포지션으로 아이돌 연습생을 시작한 진영이지만, 언젠가 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아티스트가 되고자 한다면 예능을 통해 쌓을 경험이 훗날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리스크 역시 존재했다. 인기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른 지금, 다른 방송에서 섭외가 들어왔다는 이유로 윈올에서 하차한다면 많은 팬들은 배신감을 느낄 터였다 설상가상 예능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할 시 어쩌면 지금의 인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하던 진영은 이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되고 싶던 게 뭐였는지…… 이젠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정말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게 맞나? 그냥 겉멋이 들어서 유명해지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진은 진영의 고민을 이해했다. 진영의 고민은 너무 오래 같은 방향만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고질적으로 갖는 문제였다. 이진도 그 문제를 겪었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이, 어쨌든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어휴. 내가 너한테 뭔 소리냐. 연락이 정말 방금 온 거라 심란해져서 헛소리한 거야. 미안하다.”

“아냐.”

펜션으로 들어가려는지 진영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진도 후다닥 일어나 다시 인형 탈을 쓰려고 하는데, 진영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저기, 형.”

“응?”

수백에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개인이 쌓아 온 시간은 결코 순식으로는 칭할 수 없다.

“다른 길을 찾을 용기가 없어서 이 길 밖에 없어서 떠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어.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해.”

진영이 멈춰서 이진을 돌아봤다.

“형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아한다는 증거야. 그게 음악이든 춤이든.”

“이진아…….”

“그냥 그렇다고.”

“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애였구나.”

이진은 인형 탈을 쏙 뒤집어쓰며 표정을 감췄다. 진영은 지금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부모의 세뇌에 가까운 가르침 아래 무모한 도전 대신 안정적인 생계를 택했던 자신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때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 근데 이거 아이스크림 이름 뭐더라? 배고픈 보라둥이였나?”

이진은 진영의 등을 인형 주먹으로 한 대 퍽 쳐 주고 다시 임무에 복귀했다.

승현 팀을 마지막으로 이진은 임무를 끝마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기만 하고 이름을 맞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난관으로, 팀마다 한 명씩 있는 정신 사나운 참가자들은 꼭 이진과 함께 셀카를 찍고 싶어 했다.

“하나, 둘, 셋! 유이진!”

“유이진!”

그리고 미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체 얼굴에 손발까지 다 가린 상태인 이진을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몰라도, 미열은 시무룩한 고양이 인형 탈을 쓴 이진을 엄청나게 놀려 댔다. 이진이 이름을 맞추라는 팻말을 아무리 보여 줘도 ‘오조 오억 마리의 보라돌이’ 따위의 말이나 했다. 어째 보라돌이의 숫자가 자꾸 늘어났다.

결국 보다 못한 우진이 백한 마리의 보라돌이라는 답을 말하고 나서야 이진은 거칠게 인형 탈을 벗어던지고 카메라맨을 향해 해방 선언을 했다.

“고생했어요.”

침대 위에 널브러진 이진에게 승현이 다가와 체리와 딸기 스무디, 제품명 ‘키스 미 모어’를 입가에 대어 줬다. 허동규가 왔다 간 모양이었다. 승현의 얼굴을 보자 뒤늦게 찬우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찬우가 잠깐 자기네 뮤직 비디오 출연해 달라고 하던데…….”

“아. 아까 와서 얘기하고 갔어요. 다들 좋다고 했고요.”

“그렇구나.”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들 이슈 거리가 없다면 방송 회 차가 쌓여도 제대로 된 단독 컷 하나도 받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오늘 이진만 해도 상당히 많은 개인 분량을 획득하지 않았는가. 이런 불공평함을 어떻게든 메꾸려면 건네진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게 좋았다.

“찬우 형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승현이 덧붙였다. 원테이크 기법의 뮤직비디오 촬영이다. 아무리 출연 분량이 적어도 촬영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자리를 뜰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래도 점점 절박해지겠지.’

참가자 중 대다수는 처음에 내가 잘하면 누군간 알아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헛된 희망이란 걸 금세 깨닫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안달이 나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해 무모한 짓거리를 벌이기 일쑤였다. 지금 여기에 모인 이들은 궁지에 몰린 입장은 아니었지만 살랑 꼬리를 흔드는 동아줄을 쿨하게 보내 줄 만큼 배부른 상태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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