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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71화 (71/173)

71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열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대사를 날렸다. 그리고 방 이곳저곳에 달린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벌렸다 붙이며 “편집! 편집해 주세요!”라고 외쳐 댔다.

“네가 이진이한테 그런 마음이 왜 들어?”

이진도 그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형이 나만 너무 멀리하니까 그렇지.”

“두, 둘이 엄청 친해 보이는데도?”

승현의 대답에 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이진도 깜짝 놀랐다. 그들이 남들 눈에는 절친한 사이로 보인다는 걸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현 또한 우진의 말에 어떠한 감상을 받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진을 바라봤다.

“우리 친해요, 이진이 형?”

“……뭐?”

“우리 엄청 친해요?”

승현은 재차 대답을 종용했다. ‘글쎄, 우리가 친한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전에 이진의 머릿속은 과부하로 폭발 직전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라운드의 마지막 날, 이진이 승현과 친해지기 싫다고 선언한 이후로 이렇게 노골적인 감정을 부딪쳐 온 적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진이 쓰러졌을 때도…….

‘……원래 이런 놈이었던가?’

쿵쾅. 쿵쾅.

이진은 마치 심장과 뇌가 바꿔치기 된 것 같았다.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기 어렵고, 간신히 한마디를 만들어 내더라도 입술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으니 뇌가 심장으로 변한 것 같다는 게 옳아 보였다.

“치, 친하지. 너…… 너 내 집에도 오고, 내가 재워 줬는데…….”

“형 집에서 자면 친한 거예요?”

정말 어렵사리 한 대꾸를 승현은 너무 쉽게 받아쳤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평소보다도 훨씬 태연했다. 진심이라서, 혹은 연극이라서. 이진은 그가 대체 어떤 대답을 바라고 이러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서운하게 왜 그래…….”

그래서인가, 투정 같은 말을 해 버렸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이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나이를 두 살이나 더 먹은 연장자가 되어 가지고 이렇게 조르는 듯한 말투를 쓰다니. 이진은 자신이 뱉은 말에 충격을 받고 몸을 굳혔다.

“그래, 승현아. 이진이 형 당황하잖아.”

“이 형 진짜 순수하네. 놀리지 말자!”

정작 이진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정면에서 받은 승현은 미동도 없는데 주변에서 괜히 감싸고돌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돕겠다고 하는 말들은 오히려 이진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승현은 여전히 이진을 꼼꼼히 바라보며 기색을 살폈다.

“저는 사랑 같은 건 잘 모르겠고 형이랑 친해지는 게 더 중요해요. 제 질문이 부담스러웠으면 사과할게요.”

“우, 우정…….”

민망한 단어의 홍수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진이 승현의 시선을 피해 ‘흐어억’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데이트 장소 로망’ 따위로 방향을 틀었고, 초반에 각 잡힌 분위기가 사라지자 어느덧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야기로, 그리고 결국엔 리웨이가 알려 주는 중국 관광 팁으로까지 넘어갔다.

그들은 졸음을 못이긴 리웨이가 말하다 말고 뒤로 고꾸라질 때가 되어서야 해산할 수 있었다.

***

이틀 동안은 지급된 캠코더를 사용해 간략하게나마 동선을 익혀 보고 표정 연기를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연하게도 뮤직 비디오와 무대가 요구하는 연기 텐션이 달랐기에 자신이 찍힌 영상을 확인하는 과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애초에 무대에서도 완벽한 연기를 펼치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다.

미열의 말대로 팀원들은 연습에만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보여 주고 서로 교류하기 위해 노력했다. 승현은 그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예능을 노리니 이런 건 백미열 주장이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아이돌 무대란 게 꼭 안무가 어려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컨셉에 어울리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방송 면에서도 슬슬 참가자를 흠집 내서 떨어뜨리는 데엔 한계가 있을 거고, 이제 3라운드를 넘겨 가는데 참가자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도 안 될 일이죠. 그러니 차라리 쉬운 과제를 주고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는 게 시청자들도, 참가자들도, 제작진들도 좋은 길 아닐까요?’

이진은 새삼 승현이 통찰력이 좋은 편임을 깨닫고 잠시 놀라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의견은 확실히 미열의 의견보다 더 그럴 법했다. 다만 거기에는 현 상황에 대한 개선안이 없었다. 승현도 그 점을 알아서 굳이 미열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은 것이라 했다.

‘근데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애가 왜 사랑이니 뭐니 할 땐 그렇게 멍청하게 나오는 거지?’

둔하고 미련한 곰 같다가도 지금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똑똑한 여우같았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굳이 승현의 외모에 빗대자면 곰보다는 개과인 여우가 더 잘 어울리긴 했다.

숙소 생활 중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아침보다는 새벽이 어울리는 시간에 기상하는 이진이었다. 이진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창문 커튼을 걷어 방 안으로 빛이 환히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어슬렁대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아침 운동을 대충 마치고, 냉장고에 구비 된 간식거리를 우물대며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연습실에 틀어박혀 실력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발성, 호흡의 훈련을 했다. 둘째 날엔 힘이 없어서 춤 기본기 연습은 살짝 건너뛰었고 셋째 날엔 기운이 좀 있어 기본기 연습까지 마치고 다시 샤워를 했다. 공상적인 사람이 그렇듯 이진도 샤워를 좋아했다.

거기까지 마치고 나면 순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는데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순서가 의미 없을 정도로 비슷한 시간에 다 같이 문을 열고 나왔다.

“승현아, 10시가 넘었는데 언제 일어날 거야?”

“점심…….”

“무슨 소리야. 일어나서 아침 먹자.”

제일 늦게 일어나는 건 여전히 승현이었다. 꼭 아침을 맞이하기 싫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앞에서 어슬렁거리면 대답하는 걸로 보아 얕은 잠을 자거나 잠에서 깨어나도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아침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올 무렵에나 몸을 일으켰다.

비몽사몽 샤워를 한 뒤, 승현은 습관처럼 냉장고를 뒤져 음식 재료를 찾아냈다. 이진도 얼마간 함께 생활하면서 느꼈지만, 승현은 의외로 가사 전반에 굉장히 빠삭했다. 그중 가장 감명을 준 것은 이진의 빈약한 냉장고를 탈탈 털어서 어떻게든 인스턴트식품이 아닌 요리를 만들어 내는 근성이었다.

그래서 내심 그가 카메라 앞에서 멋있게 요리를 하고 팀원들을 먹이는 그림을 기대했으나 승현은 딱 습관처럼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찾아내고는 멍하니 바라만 보다 도로 돌려놓았다. 이진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요리를 해 먹이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사흘째 되던 날, 제작진이 점심때에 맞춰 급하게 이진을 찾았다.

“이진 씨. 정말 미안한데…… 스폰서랑 촬영 일정이 좀 꼬였어요.”

그렇게 말하며 스태프가 내민 것은 옆으로 맬 수 있는 아이스박스와 속상하게 생긴 고양이 인형 탈이었다.

“저번에 아이스크림 이름 공모했던 거 기억나죠? 인기투표랑 내부 심사 거쳐서 최종적으로 이진 씨가 낸 게 뽑혔어요. 그런데 스폰서 측에서 연계된 프로그램을 하나 더 요청해서 소소한 게임을 진행할 거예요. 별건 아니고 VJ랑 같이 돌아다니면서 참가자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준 뒤 이름이 뭔지만 물어보시면 돼요. 정답자가 나오면 바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저 혼자요?”

“아뇨. 오늘 하루 동안 백한 마리 보라돌이, 헤이 초코, 키스 미 모어, 얼었숭이. 총 네 종류아이스크림을 돌리면서 퀴즈를 낼 거예요. 이진 씨가 첫 타자고요.”

이진은 인형 탈과 옷, 신발 등을 챙겨 입고 아이스박스를 비스듬히 맸다. 이어서 ‘아이스크림 이름이 뭘까요’라고 적힌 팻말까지 들고 펜션 투어를 떠났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찬우 팀이었다. 이진은 걸음 한 번에 한숨 한 번을 쉬면서 터덜터덜 걸어가 펜션 문을 두드렸다. 충격 방지 스펀지처럼 두툼하고 폭신한 인형 장갑 때문에 노크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았다. 이진은 카메라맨을 돌아보며 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카메라맨은 요지부동이었다. 계속 방관만 하기에 이진은 나무판자로 된 팻말을 들고 문을 쿵쿵 두들겼다.

“누구시려면─?”

이상한 인사와 함께 찬우가 문을 열었다.

“꺄악!”

“무슨 일이야?”

고양이 인형 탈의 슬프게 생긴 눈망울을 정면에서 마주한 찬우가 비명을 질렀다. 뒤따라온 참가자들도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뒤에 카메라를 발견하고 다들 침착함을 되찾았다.

“뭐지? 이 친구 힘없는 발걸음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많이 닮았는데?”

찬우가 거실로 걸어 들어가는 이진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인형 탈의 좁은 시야로 훑어보자 루키 엔터의 두주 형과 임채일, 김태원, 최강희, 차명준, 그리고 장조근인지 조장근인지 헷갈리는 이름의 참가자가 보였다.

이진은 모두가 적당히 모이자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라색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주려고 했으나…… 인형 장갑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

“아, 지금 나눠 주고 싶은데 못 하는 거야? 귀여워!”

강희가 이진이 인형 탈을 쓰다듬었다. 인형 탈을 썼더니 제2의 인격이 형성되기라도 한 건지, 행동에 굉장히 거침이 없어졌다. 이진은 강희의 손을 탁 쳐 내고 아이스박스를 내밀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이 성의 없는 손짓 너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는데?”

찬우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으며 말했다. 인형 탈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이진은 무기로도 쓸 수 있을 법한 팻말을 들어 올렸다.

[지금 먹은 아이스크림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맞추지 못하면 아이스크림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아니 이거 돈 받는 거였어?”

“먹기 전에 말해야죠!”

예능적으로 과장된 항의가 들어왔다. 이진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장갑의 뭉툭한 끝을 세워 팻말에 ‘이름’을 가리킨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고양이 발의 분홍 젤리가 보이게 손바닥을 뻗었다.

“닥치고 못 맞추면 돈이나 내라고?”

“귀여워……. 이 안에 대체 누구야? 진짜 귀여워!”

강희가 자꾸 ‘귀여워’를 연발했다.

“……나도 왠지 안에 누군지 알 것 같은데. 헛소리 하지 말고 이름이나 맞추자.”

태원이 중얼거렸다. 찬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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