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쉽네.”
한 시간쯤 지나자 안무를 모두 외운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 주저앉았다. 3라운드까지 살아남은 만큼 실력에 모자람이나 자만은 없었다. 안무를 처음 보고 따라 하는 어설픈 순간에도 그동안의 연습으로 쌓인 내공이 돋보였다. 군무에서 늘 구멍이었던 미열도 못 보던 사이 안무 습득력이 부쩍 늘어 이제는 동작을 알려 주면 곧장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안무가 쉬워도 너무 쉬웠다. 안절부절못하던 팀원들은 바로 대형과 줄 이동을 연습해 보고 그조차 완벽해지자 자진해서 뮤직비디오의 동선을 계산해 각자 어떤 애드리브를 첨가할지 토론했다.
그럼에도 하루 꼬박 쉼 없이 연습했더니 더 연습해 봤자 주기적인 맨손 운동을 하는 꼴이 되었다. 그나마 난이도 있는 부분은 포인트 안무 정도였다.
양손을 심장 위에 얹고 첫사랑의 설렘을 표현하듯 상반신과 골반을 마주 튕기며 몸을 배배 꼴 때 동작이 살짝 엇박으로 많이 쪼개졌다. 간단히 말해 따로 놓고 보면 전부 잘 어울리지만 함께 추면 미묘하게 꿈틀대는 애벌레 같아 보이기 딱 좋았다.
하지만 다들 박자감이 좋은 건지 대형으로 맞춰 볼 때 두세 번 만에 착착 고쳐졌다.
“이제 뭐 하지?”
“발성…… 연습?”
몇 달 꼬박 연습 벌레로 살던 이들은 연습할 거리를 빼앗기자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불안해했다. 이진도 마찬가지로 구석에 앉아 멍하니 동료를 바라봤다. 보컬에 자부심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는 이진은 아예 솔로로도 커버할 수 있도록 노래를 통째로 외워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미열이 카메라를 피해 모두를 불러 모으더니 하나의 가설을 내놨다.
“내 생각에 이 펜션은 일석이조의 목적을 가진 것 같다.”
“뭔데요?”
“요즘 신인 아이돌이 데뷔하고 인지도를 얻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게 뭐지?”
“어…… 연습?”
“……연습에서 좀 벗어나 봐라. 바로 생활 밀착형 리얼리티 찍는 거잖아.”
TV를 보지 않는 이진으로서는 딱히 공감 가는 내용이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작진이 펜션에 사람 넣어 두고 원하는 게 연습이 아니라 리얼리티 찍기라고요? 그럴 법하지만…… 우린 이미 꾸준히 하고 있었잖아요?”
현기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진은 숙소에 깔렸던 카메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숙사 생활이었잖아. 일어나면 식당 가고 연습하고 자고. 당시엔 한두 명을 조명해 주기엔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지만 행동반경이 단순하고 실제 우리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 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7명씩 묶어 두고 연습은 잠깐 취미 수준으로만 시간을 할애하면 자연히 우리가 평소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한눈에 알 수가 있는 거야. 아침엔 누가 제일 먼저 일어나는지,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뭘 하는지, 샤워는 아침에 하는지 저녁에 하는지, 점심 식사는 누가 차리고 좋아하는 메뉴는 뭔지. 그리고 그런 정보들 사이에서 탄생하는 게 바로 캐릭터와 관계성인 거야.”
미열이 자신의 의견을 물 흐르듯 전개하자 이진은 미열이 존경스러웠다. 하루 만에 제작진의 의도를 파악해 내다니. 이진이었다면 연습량이 적어지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맨손 운동이라도 꾸준히 했을 텐데, 미열은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그걸 당당히 멤버들에게 설명까지 해 주었다.
“한마디로 이번 라운드는, 예능 테스트다.”
어디선가 비장하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미열의 말이 맞는 것 같다며 동의를 표하자 미열은 이제 매일매일 콘텐츠를 뽑아내야 한다며 함께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걸 생각해 내라고 닦달했다. 그리하여 7명은 파자마를 입은 채 쿠션 하나씩을 끼고 거실에 둘러앉아 첫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첫사랑 있는 사람 손?”
미열의 말에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이진도 눈치를 보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리웨이와 승현만이 손을 들지 않고 멀뚱대며 다른 이들을 신기한 사람 보듯 바라봤다. 미열은 이어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 물었다.
우진과 보원은 중학생, 현기는 고등학생, 미열은 초등학생 때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 크흠!”
태연하게 답하려 했는데 목소리 끝이 갈라져 헛기침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괜히 수상한 눈초리가 집중돼서 이진은 마실 것 좀 가지러 다녀오겠다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볼이 후끈후끈했다.
이진은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한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이건 대놓고 방송에 내보내기 위한 대화였다. 말실수를 하면 큰일 난다는 긴장감과 많은 사람들 앞에 음악이 아닌 방향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짜릿함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진은 2L 오렌지 주스 한 병과 머그컵 일곱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열이 후끈후끈해 자리에 앉아 달아오른 뺨을 무릎에 비볐다. 승현이 자연스럽게 음료를 넘겨받아 머그컵에 따르는 동안 미열의 주도 하에 대화가 계속 진행됐다.
“연상, 연하?”
우진과 이진이 연상, 나머지는 동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질문이 한 번 더 돌아왔다.
“그냥 저 중학생 때 댄스부였는데 거기 누나를 혼자 몰래 좋아했어요……. 누군지는 비밀이에요!”
“물어볼 생각도 없었어! 들어 봤자 우린 모르잖아.”
“아, 맞다.”
우진이 답하자 시선이 이진에게로 쏠렸다. 이진은 왠지 솔직히 밝혔을 때의 반응이 예상이 되어 벌써부터 살짝 기가 죽어 있었다.
“그,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
“근데 애인이 있으셔서…….”
“뭐어어?”
이진의 말에 방 안이 뒤집어질 듯한 함성이 일었다. 다들 노래를 해서 그런지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했다. 누군가는 뺨을 감싸며 꺄악, 비명을 질렀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
“아니, 천하의 유이진이 선생님을 좋아하다니.”
“그야말로 금단.”
“금단 같은 소리. 형이 고백해 봤자 곤란해지기만 하는 상황이잖아요.”
“난 애인이 있고, 내 제자가 고백을 해 왔는데…… 얼굴이 유이진.”
이진은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에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런데…….”
옆에 앉은 승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첫사랑인지는 어떻게 확신해?”
“뭐?”
“사랑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어릴 때는 특히 동경이나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도…….”
승현의 말에 현기와 보원이 우효효, 고릴라 소리를 내며 승현을 놀렸다. 우진은 다시 뺨에 손을 대고는 꺄악, 소리를 질렀다. 당사자인 승현과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지금 말을 이해하지 못한 리웨이만 우두커니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진마저 흐허억,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선승현, 모태 솔로 티 내냐?”
“모태 솔로라고? 어쩌다 그런 운명을?”
미열의 말에 다시 요란한 반응이 이어졌다.
“나 갈래.”
“어, 어딜 가!”
승현이 쿠션을 집어던지며 일어서고 나서야 놀림이 멎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유로 이진은 승현의 바짓가랑이를 대신 붙잡느라 쩔쩔맸다. 나름의 콩트였는지 승현은 이진이 가지 말라고 바지 끝자락을 붙잡자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러니까, 사랑을 할 때 느껴지는 현상이 있거든. 뭐 하는지 궁금하거나 멀리 있어도 보고 싶거나…….”
“나보다 그 사람한테 집중하게 되는 거죠!”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냥 딱 보고 뽀뽀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봐.”
승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다고 말하자 사랑의 현상에 대해 설명하던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승현이 그에게 유독 무르다는 걸 그들도 알았다. 이진은 여전히 조금 붉은 얼굴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봤다.
“사랑은 조금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워. 하염없이 잘 보이고 싶다가도…… 그 사람이 나로 인해 상처받기를 바라.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내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런 관심이라도 받고 싶지.”
승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진의 말을 멈추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멋진 모습만 보여 주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지쳤을 땐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을 거야. 약점을 들켰을 때 작은 동정이라도 베풀어 준다면 그마저도 장점으로 느껴져. 그 사람이 누구보다 널 두렵게 하는데도…….”
조곤조곤 말을 잇던 이진은 잠시 단어를 골랐다. 자신의 짧지도 얕지도 그리 특별하지도 않았던 사춘기의 첫사랑을 표현할 마지막 문장이었다. 이진은 고개를 들어 승현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없는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 거야.”
막상 입 밖으로 뱉고 나니 너무 거창한가 싶었지만 당시 이진은 딱 그랬다. 선생님과 함께하는 과외만이 유일한 휴식이자 미래로 향하는 발판이었다. 예정된 마지막이었지만 그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만약 그 사고가 없었다면 고백할 수 있었을까?’
선생님과는 부모님의 사고 이후 완전히 연락이 끊겨 버렸다. 비록 살갑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당시 적잖은 충격을 받은 이진은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누구에게도 곁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진의 우울한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 드디어 승현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런 감정은 친구 사이에서도 가능한 거 아니에요?”
승현의 대답에 다들 우워어, 하고 기운 빠지는 소리를 냈다. 미열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야! 너는 날 보면 막 그런 서정적인 생각이 들고 그래?”
“너 말고.”
승현이 그런 가정조차 싫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승현의 시선이 이진의 무릎께에 닿았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이진은 반사적으로 승현의 눈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승현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진이 형을 보면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형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이진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 말을 삼키고 있는 건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이진의 말을 오글거린다 생각하던 현기나 아이돌 지망생이 데뷔도 전에 첫사랑 토크를 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던 보원,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조르륵 뱉어 버린 우진과 그래서 언제쯤 자도 되는 건지 시계를 힐끔대던 웨이까지. 모두가 승현의 황당한 발언에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홀랑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