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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69화 (69/173)

69화

그 뒤로 한 시간가량을 더 달려 서울 외곽의 한 지역에 펜션 타운에 도착했다. 뒤이어 도착하는 스태프들이나 장비를 실은 차량을 보아하니 약간의 거리를 두긴 했지만 다른 팀들도 이 동네 어딘가에 있는 펜션에서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려 짐을 옮기고 숙소의 안내를 받았다. 이진은 바쁘게 주변을 두리번대며 카메라 위치를 꼼꼼히 확인했다. 침실로는 세 개의 방이 주어져 네 명이 두개의 작은 방을 사용하고 세 명이 조금 더 큰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큰 방에는 침대 세 대가 놓여 있었지만 작은방에는 이불과 요가 전부였다.

“침대가 없냐. 허리 아프게.”

“형, 그래도 여기 매트리스 엄청 푹신해요.”

미열이 투덜거리자 우진이 바닥에 고이 접힌 매트리스를 꾹꾹 누르며 밝게 웃었다. 각자의 친분도를 고려하여 리웨이와 우진이, 현기와 보원이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우리가 침대 써도 정말 괜찮겠어?”

승현과 미열, 이진은 원래 같은 방을 사용해 자연스럽게 큰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기와 보원은 저번 라운드에서 많이 친해졌고, 리웨이와 우진은 다른 팀원들과 사실상 초면이나 마찬가지라 차라리 나이가 비슷한 둘이 먼저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다.

“저는 리웨이이고 중국에서 왔어요. 나이는 제일 어리…….”

거실에 모여 앉아 방송용으로 간단하게 통성명 하는 시간을 가졌다. 리웨이는 말 수가 적은가 했더니 성격 보다는 서투른 언어 때문에 조금 위축된 것 같았다.

“어려요? 어리다? 어립니다. 어릴지도? 어릴 거다, 어린가 봐! 어리니까 잘 모셔라!”

미열이 동사 변형을 어려워하는 리웨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했다. 리웨이는 약간 자신감을 얻었는지 ‘어리지만…… 무시하지 마라!’라고 외쳤다.

“리는 Family name이고 웨이가 Given name입니다.”

“그럼 웨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렀어요. 중국에서는 샤오웨이라고, 친구들은 웨이웨이.”

“뭔가 기네.”

간단히 웨이라고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다. 우진은 샤오웨이라 부르는 성조를 배우더니 몇 번 입 속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저는 김보원입니다. 특기는 열심히 하기예요. 아니면 분위기 잡는 거 잘합니다. 뭐든 시켜만 주세요.”

자세히 들어보니 보원은 약간 사투리 억양을 사용했다. 방언에 밝지 못한 이진은 어느 지역인지까지는 밝혀 내지 못했다.

“장현기고요. 저 다이어트 중이라 6시 이후에 먹음 안 되는데…… 의지가 약하니 제발 잘 말려 주세요!”

“다이어트요? 지금 딱 보기 좋은데요?”

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현기는 손을 내저으며 카메라 앞에 아이돌 지망생처럼 나오려면 지금의 반절은 되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나 내심 우진의 말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나 살 빼라는 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어. 진짜 빼야지!”

“너는 좀 빼야 한다.”

“보원이 형은 가만히 계세요. 본인도 근육 돼지라는 소리 무지막지하게 들으면서?”

“나는 근육 쪄야 한다고…….”

웨이가 반팔 티 밑으로 앙상하게 드러난 제 팔을 만지작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 나온 김에 치킨 시킬까요?”

“우진 씨? 나는 빼야 한다니까?”

우진이 배시시 웃었다. 현기는 당혹스런 웃음을 지으며 우진에게 딴지를 걸었다. 보원은 제 팔을 구십 도로 세우고 힘을 주더니 ‘치킨’이라며 중얼거렸다. 미열은 거기에 대고 ‘치킨은 무슨 족발이다 족발!’ 하고 핀잔을 주었다. 웨이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이진은 노골적으로 외모를 언급하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제 팔과 다리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몸매를 가꾼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던 이진이었다. 방송이 시작하고 한 최대한의 외모 관리는 피부 트러블이 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정도였다.

‘살 빼야 하나? 아님…… 근육?’

과거로 돌아오고 약간 더 다부지고 약간 더 탄탄해진 육신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던 그였다. 그런데 저런 대화를 듣고 생각해 보니 이진은 휴가마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좁은 방 안에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생활을 지속해 왔다.

게다가 생활비를 아끼겠다며 라면은 어찌나 먹었는지. 이진은 다급히 제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형, 화장실은 저쪽.”

승현이 이진의 행동을 발견하고 방구석을 가리켰다. 그러다 곧 화장실을 찾는 게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이진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승현을 타박하는 눈짓을 했다. 괜한 참견으로 타박당한 승현은 조금 고민하다 박수를 치며 주목을 끌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 이제 포지션 나눕시다. 뮤직비디오용이랑 무대용 안무가 나뉘어 있어 헷갈릴 테니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하죠. 뮤직비디오는 일주일 안에 찍어야 하잖아요.”

승현의 말에 발랄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아까 설명 들어서 알겠지만 뮤직비디오는 포지션별 안무와 분량이 아주 정확해서 실력 맞춰서 적당히 떠넘기거나 애드리브로 때우거나 할 수 없어요. 한 가지 다행인 건 노래가 어렵지 않아서 퍼포먼스에 따라 포지션 이동이 자유로운 편이라는 거.”

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미열과 이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전 곡에서 두 사람은 파트별 난이도 때문에 포지션 선택의 폭이 몹시 적었다.

“게다가 뮤직비디오가 선공개되는 거 생각하면 센터 포지션이 아주 중요해지거든요.”

센터가 이제까지 퍼포먼스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이번엔 그보단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었다. 원테이크 기법의 특성상 NG가 나면 가장 고생할 사람이기도 했다.

그들이 공연할 곡은 ‘너와 첫 데이트’라는 제목의 발랄한 곡이었다. 첫 데이트를 나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꾸미고 준비하며 허둥대다가도 감출 수 없는 설렘에 데이트 계획을 되새기며 그날 하루를 잔뜩 기대하는 내용의 귀여운 가사였다. 그리고 당연히 뮤직비디오는 센터가 그 주인공이 되어 연기를 해야 했다.

“형이 센터 하면?”

“저는…….”

“얘는 표정 연기가 좀.”

웨이가 가볍게 운을 띄우자 승현과 미열이 조금 곤란한 낯으로 거절했다. 확실히 승현은 첫 데이트고 뭐고 하나도 떨지 않고 오히려 거들먹댈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승현이 안 되면 나도 안 되겠네.”

자연스레 보원도 후보에서 탈락했다. 그는 덩치가 너무 커서 귀여운 노래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이질감이 들었다.

“난 안무 연습하기 너무 바쁠 것 같아서 빠진다.”

“에이, 형은 어차피 날 티 나서 첫사랑은 좀 아니죠!”

미열이 자진사퇴하자 현기가 미열의 밝은 갈색 머리나 건들대는 모양새를 가지고 놀려 댔다.

“저는 안무도 그렇고, 내가 센터 하면 무진장 뚜드려 맞을 게 뻔해서 사퇴합니다…….”

현기는 인기도를 거론하며 빠져 나왔다. 이진은 표정 연기를 따지자면 자신도 크게 잘할 것 같지 않아 빠지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진과 리웨이만이 남았다. 둘 다 썩 믿음직스런 센터는 아니었다.

“그럼 투표하기로 할까? 진이 형이랑…… 어, 진이 형?”

리웨이는 애초에 자신을 센터감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우진과 이진을 번갈아 가리켰다. 우진이 센터는 어려울 것 같냐고 묻자 웨이는 ‘발음상의 문제’로 가장 한글 가사가 적은 파트를 원했다.

“그러고 보니 우진이가 연기과랬나?”

“아, 그렇긴 한데 저 연기 그렇게 잘하지는 않으니까. 감안해 주세요!”

“왜? 전에 이진 씨 성대모사 한 거…….”

“아악! 제발!”

우진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 그땐 왜 그랬는지. 이진은 불쑥 곤란했던 과거가 떠올라 조금 부루퉁해졌다.

그때, 리더인 승현이 투표를 하자며 다시 손뼉을 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근데 난 이진이 형이 했으면 좋겠어.”

“엥?”

뜬금없는 소리에 미열이 요상한 소리로 대꾸했다.

“아. 이진이 형이 하면 엄청, 잘 어울릴 텐데…….”

“야! 물 타기 하지 마, 인마!”

“선승현 씨 진짜 뭐에요? 공정성 어디 갔죠?”

승현이 꿋꿋하게 혼잣말인 척하는 중얼거림을 이어 가자 기어이 팀원들이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그들도 방송을 보았기에 승현이 이진을 제법 좋아하고 다소 과도하게 챙긴다는 걸 알았다. 이진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승현이 자신을 놀린 것임을 깨닫고 작은 목소리로 항의를 표했다.

“야아. 너 뭐야! 미쳤어?”

“뭐긴 뭐야. 나는 형 팬이죠.”

천연덕스런 대꾸에 이진은 두 손을 들어 승현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진이나 우진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이진은 다시 한번 센터가 되었다.

***

삐삐삐,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D-DAY! 핸드폰 화면에서 침대에 누운 주인공에게로 초점이 옮겨 가고 줌 인된다. 음악의 인트로가 재생되자 주인공이 반짝 눈을 뜨고 일어난다.

동선을 따라 춤을 추듯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으면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눈부신 빛을 받으며 거울을 본 주인공이 어쩐지 오늘 데이트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에 밝은 미소를 짓는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 주변에서 소품들이 튀어나와 자연스럽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어서 주인공이 직접 머리를 만지고 좋아하는 향수를 뿌린다. 계단을 내려올 때 어젯밤 준비했던 꽃다발과 영화표를 건네받곤 벌써 완벽한 데이트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시간을 재촉하게 된다.

그 후 거실에서 다 같이 군무를 춘 뒤 2절로 넘어가고, 2절부턴 첫 데이트의 주의 사항과 첫사랑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멤버들이 나온다. 주인공은 그들을 모두 뿌리치고 오직 기대만을 안고 현관을 빠져 나간다.

여기까지가 뮤직비디오의 내용이었다.

“많이…… 귀엽네.”

“승현아, 무슨 생각으로 이 노래 고른 거야? 노래가 싫은 게 아니라 너랑 안 어울려서.”

“가위바위보에서 졌나?”

“…….”

제작진에게 건네받은 콘티를 확인한 팀원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당일 모두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승현은 7명이 동시에 한 가위바위보에서 주먹 하나로 승리를 거머쥔 행운아였다.

“처량한 거 빼고, 유혹하는 거 뺐더니 남는 게 이거랑 교복 입는 거밖에 없길래.”

“차라리 교복을 입지…….”

미열이 끝까지 투덜대자 승현이 교복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째려봤다.

그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모두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동선 연습에 필요한 카메라맨은 본 촬영 전날부터 합류를 한다고 해서 우선 무대용 안무와 뮤직비디오의 군무부터 연습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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