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68화 (68/173)

68화

“백미열 참가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이름순으로 호명되어 미열과 윌리엄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미열을 탐내는 찬우가 너무 열성적으로 박수를 쳐 그곳으로 향하는 듯싶었으나 승현이 박수를 연달아 세 번 치자 무언가를 느낀 듯 그곳으로 향했다.

“이거 미리 암호 정해 놓은 거 아니야?”

“아니거든!”

찬우가 이의 제기를 하자 스텝이 리더를 유추할 수 있는 사인은 자제해 달라고 공지했다.

“백 윌리엄 참가자, 당신의 리더는 누구인가요?”

그리고 다음 순서에 윌리엄은 팔을 잘못 허우적대다가 열성적으로 박수를 치던 찬우 옆에 서 있던 강지흔을 건드려 버려 지흔의 팀에 가게 되었다.

이후로도 참가자들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너무 성큼성큼 걸어 리더와 쿵 부딪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리에 앉은 참가자들은 휘파람 섞인 호응을 해 댔다.

“유이진 참가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이진의 이름이 불렸다. 이진은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 리본을 눈가에 둘렀다. 하늘하늘한 촉감이 콧잔등과 목덜미를 스쳤다. 리본 안에서 눈을 떠 봤지만 의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진은 종소리에 맞춰 오른쪽으로 비틀비틀 열 바퀴를 돌았다. 어디선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진 참가자. 당신의 리더에게로 향해 주세요!”

이진은 암흑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그 순간 사방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울려왔다. 감동적인 연극을 관람한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치는 것처럼 규칙적인 마찰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이진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또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다시 차근차근 움직였다. 박수 소리가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미세하게 공기를 통해 사람의 기척과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박수 소리가 멎고 앞에 선 누군가가 작게 속삭였다.

“이쪽으로 오면 후회할 텐데.”

목소리에 놀란 이진은 살짝 옆걸음질 치다가 누군가와 툭 부딪혔다. 익숙한 향이 느껴지더니 곧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휘청대는 이진을 바로 세우고 다른 손으로 리본을 풀어 내렸다.

사라락 소리와 함께 리본이 풀리자 가장 먼저 한 손으로 마이크를 가린 제이슨이 보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는데, 어깨를 잡은 손이 이진을 확 돌려 세웠다.

“이번엔 같은 팀이네요.”

승현이었다. 이진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한 명을 정하지 않고 우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였더니 일렬로 선 리더들 틈으로 파고든 모양이었다. 오른쪽으로 제이슨이, 왼쪽으론 승현이 서 있었다.

하마터면 제이슨 팀으로 갈 뻔 했기에 그가 마이크를 가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밀어 낸 것이었다.

“잘됐네요.”

이진과 눈이 마주친 제이슨이 싱긋 웃었다. 그러자 어깨를 잡은 승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됐죠.”

고개를 돌려 승현을 보자 승현도 시청자 인사를 할 때나 보이는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진은 승현 팀 뱃지를 달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마터면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제이슨 팀에 들어갈 뻔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우리 이번에 셋이 같은 팀이다! 잘됐다!”

“음원 성적 기대할 만하겠네.”

미열이 이진의 목을 끌어안으며 신난 소리를 냈다. 진영은 이번에도 제이슨 팀으로 갔고, 초반에 주목받던 것과 달리 그다지 활약하지 못한 박희영도 제이슨 팀으로 가게 되었다.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저번 라운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조금 풀이 죽어 보였다.

“에휴……. 이번엔 너희가 꼭 1등 해라.”

윌리엄은 체념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직전 라운드에서 턱걸이로 생존한 만큼 윌리엄은 아무리 이번 라운드를 화려하게 보낸다 하더라도 생존을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특히나 갈수록 시청자 투표의 비율이 높아지니 윌리엄뿐 아니라 모든 참가자는 작정하고 투표를 해 줄 코어 팬을 모으는 게 급선무였다.

이진은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미열이 윌리엄의 배를 퉁 치며 말했다.

“뮤직비디오잖아! 네가 얼굴로 다 발라 버려.”

“에휴, 상위권 애들 다들 잘생겨서…….”

윌리엄은 미열의 말을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러는 동안 우진이 승현 팀으로 들어왔다. 승현은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방황하던 우진이 넘어질 뻔한 걸 받아 주고 말아 그의 팀이 되었다.

“형!”

우진이 손을 흔들며 이진을 불렀다. 같은 팀이 되어서 기쁘단 뜻 같지만 이진은 받아 주고 싶지 않아 못 본 척 눈을 돌렸다.

김보원, 리웨이, 백미열, 선승현, 유이진, 이우진, 장현기. 이진은 이번 3라운드를 함께할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사람이 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친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방송을 몇 번 복습했더니 어렵지 않게 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리웨이는 중국인으로 저번 라운드에선 하늘 팀에서 거의 센터 급의 역할을 맡았던 참가자다. 나이는 스무 살로 팀원들과의 갈등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울고 짜증 내면서도 꾸준한 연습으로 본 무대 때 놀라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

첫 방송부터 인형 같은 외모로 관심을 끌었다고 들었으나 막상 분량이 적어 인기를 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진으로썬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저번 무대 너무 잘 봤어요! 음방 나간 거 축하해요.”

김보원과 장현기는 저번 라운드에서 승현과 미열의 팀이었는데 둘 다 성격이 세지 않고 성실한 편이지만, 마땅한 특기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장현기가 승현과 동갑, 김보원이 승현보다 한 살 많고 이진보다 한 살 어렸다. 보원은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한 데다 승현이나 찬우보다도 키가 크고 정장 재킷이 작아 보일 정도로 몸이 거대해 위압적이었다.

현기는 평균보다 조금 살집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의 별명은 다름 아닌 만두였다. 첫 방송 땐 수많은 만두가 있었지만…… 현재는 현기를 포함한 세 명의 만두만이 생존해 있었다.

“우리 팀 예감이 좋은데?”

“미열이 형 감 좋으니까 믿어도 되죠?”

“형님만 믿어라!”

흰쌀과 만두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팀이 정해지자마자 참가자들은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12인승 승합차에 탑승했다. 당연하게도 내부에는 카메라가 세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도착할 펜션에도 화장실과 침실을 제외한 이곳저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정해진 촬영 시간 외 쉬는 시간에도 메인 카메라 몇 대는 계속 돌아갈 예정이라고 사전 안내가 내려왔다.

30분쯤 달려 겨우 시내를 벗어났을 무렵 이진은 조금 멀미가 나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카메라 근처 앞자리에 자리 잡은 미열은 이곳저곳에 말을 걸어 대며 방송 분량을 챙겼다.

“보원 씨, 솔직히 선승현 잡았을 때 기분 어땠어요.”

“형은 뭐 그런 걸 물어봐요…….”

“아니, 말해 봐! 족보 브레이커에 독불장군이랑 한 번 더 한다고 했을 때 기분 어땠어?”

“아…… 솔직히?”

과묵해 보이던 인상과 달리 보원은 미열의 농담에 장단을 잘 맞춰 줬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진은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싶어 살짝 눈을 떴는데 옆자리에서 핸드폰을 하던 승현이 이진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마주 바라봤다.

“백미열 시끄럽죠.”

“응? 아니…….”

“야. 이진이 형 멀미하잖아. 조용히 좀 해.”

승현이 신발 앞 코로 앞좌석을 강하지 않게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

“저 성깔 더러운 자식……. 괜히 지 욕 듣기 싫으니까 핑계는. 야, 이거 받아.”

미열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승현에게 건넸다.

“뭔데?”

“이거 우리 협찬 물품.”

협찬이란 소리에 이진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자 미열이 싱긋 미소를 띠고 설명을 시작했다. 뭔가 장황하게 말이 길었지만 한 기기에 여러 개의 이어폰을 꽂을 수 있는 이어폰 듀얼 잭이었다.

“그거 꽂고 이진이 형아랑 오붓한 시간 보내라? 이 형님 방해하지 말고.”

어린애 달래는 듯한 말투에 우진과 보원이 킥킥대며 웃었다. 리웨이는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자기도 있다며 자랑을 해 댔다. 우진도 주머니에서 듀얼 잭을 꺼내 리웨이와 함께 착용했다. 미열은 다시 사회자가 된 것처럼 맨 앞자리에 앉은 현기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진은 듀얼 잭을 만지작거리는 승현을 힐끔거렸다. 솔직히 이진이 승현의 상황이었다면 기분이 나빴을 것 같은데 승현은 미열에게 좀처럼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진은 고새 정이 들었다고 미열이 아닌 승현의 편을 들게 되는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써 볼까?”

“노래 들으면 더 어지러운 거 아니에요?”

“아니야, 괜찮아.”

“그럼 왜 시끄러운 거 참고 있었어요?”

참고 있던 게 아니라, 승현에게 심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라 이진은 무릎 위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승현은 이진을 잠시 관찰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핸드폰에 잭을 연결하고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전에 보니까 형은 취향 없이 듣는 것 같아서.”

“대체 언제 봤대?”

잠자코 이어폰을 꽂고 기다리자 승현이 곧 핸드폰을 몇 번 터치해 음악을 재생했다. 파워풀하고 절도 있는 춤을 추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강렬한 비트의 댄스곡이나 흔히 말하는 클럽 음악이 나올 것 같았는데 의외로 흘러나온 노래는 잔잔하고 몽환적인 팝송이었다. 보컬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악기들과 어우러져 들릴 듯 말 듯, 그러나 분명한 위치를 가지고 노래를 이끌어 갔다.

살짝 눈을 굴려 바라보니 승현이 눈을 감고 있어서 이진도 다시 눈을 감고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볼륨을 조금 더 키우자 다른 이들의 말소리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You get ready, you get dressed up.

-To go nowhere in particular.

이진은 문득 승현이 이 노래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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