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승현이 이진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한 팔에 이진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수현을 안고 다른 손으로는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도착하기까지 아파트 벤치에 셋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진은 그 순간 세상에 모든 게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진의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 의무감, 열등감. 모든 것이 한순간 씻겨 사라졌다. 태풍 속의 솜사탕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린대도, 전부 괜찮을 것만 같은 환상을 봤다.
“형,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나한테 강아지 인형 선물해 준 수현이 덕분인 줄 알아.”
“강아지?”
승현의 목을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어 있던 수현이 강아지 소리에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형아. 나 강아지 인형?”
“이진이 형 말 듣지 마.”
“내 거?”
승현이 수현의 귀를 막았다. 이진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쉽사리 마음을 바꾸는 변덕스런 어린애에게 이미 손을 떠난 인형을 굳이 상기시킬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원한다면 도로 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승현의 면목이 없어질 테니 잠자코 협조했다.
“택시 왔다. 형, 조심히 가요.”
“그래. 오늘 고마웠어.”
“재밌었다고 해 주세요.”
빠른 걸음으로 택시를 향하던 이진이 뒤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이한테는 그게 더 좋잖아요.”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였지만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을 향해 ‘오늘 재미있었어.’ 하고 인사했다. 수현이 울상으로 조그만 손을 흔들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택시비가 승현의 카드로 자동 결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진 이진은 핸드폰을 들고 한참 고민했다. 뭐라도 연락을 해야 했다.
‘문자라도 남겨야겠지? 그런데…… 뭐라고 하지?’
생각하던 이진은 어플 하단에 기프티콘 상점을 발견했다. 다양한 가격대의 유용한 쿠폰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빚지는 걸 끔찍이 꺼려하는 이진은 택시비보다 비싼 쿠폰들을 깡그리 살폈다.
‘아. 나 잔고 충분한가?’
이진은 근 두 달간 수입 없이 야금야금 알바비와 적금을 갉아먹으며 사는 중이었다. 후다닥 어플을 켜서 확인해 보니 사치하기엔 애매한 생활비만이 남아 있었다. 저번에 소액 적금을 하나 깼으니 남은 적금이…….
이진은 두 눈을 꼭 감고 기프티콘을 구매했다. 커다란 아이스크림 패키지를 사서 ‘동생들이랑 사이가 좋아 보여 좋더라.’ 라는 문구와 함께 전송했다. 한 사흘 정도만 미리 사다 둔 라면으로 버티면 계산이 맞았다.
피부 건강이 조금 염려되었지만 이진은 승현과 그를 닮은 형제자매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상상을 하며 핸드폰을 내려놨다. 오랜만에 평온한 기분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7화 방송과 함께 3라운드가 시작되었다.
“2라운드, 대망의 1위는…… 바로 정하늘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2라운드의 우승자는 하늘로 일주일 전 음악 방송에도 하늘 팀이 출연했다. 찬우는 2위, 이진은 8위로 떨어졌지만 승현이 3위, 미열이 15위로 올랐다.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동규와 재규는 각자 5위와 6위를, 하늘 팀에서 주목을 받았던 강지흔은 7위를 기록했다. 제이슨은 뚜렷한 팬층을 확보했는지 4위로 올랐다. 진영도 덩달아 12위로 올랐다.
이진 팀에선 모두가 예상했듯 수원과 지호가 떨어지고 채일이 19위, 우진이 18위, 주헌이 28위, 태원이 26위에 올랐다.
그러나 윌리엄은 이번에도 눈에 띄는 활약이 없어 오히려 42위로 떨어졌다. 500점의 팀 점수가 없었다면 떨어졌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도 없이 많은 참가자가 탈락하고 생존자 49명만을 남겼다.
그사이 이진에게는 사소하지만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우선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휴지랑 계란을 사 들고 가는데
‘이 동네 산다더니 진짠가 봐.’
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으러 갈 때 자주 마주치던 아주머니가 대뜸 요즘 티브이에 나오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사람의 시선이 쏠리면 쏠릴수록 부쩍 기분이 좋았다. 동료들에 치이느라 잊고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이진의 목표는 유명해져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팀이 5등을 하고 아직 생존자들이 반백 명쯤 되는 지금 이것은 몹시 좋은 징조였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누군가가 아닌 ‘유이진’으로서 각인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름 석 자를 박아 넣은 것만으로 훌륭한 시작이었다. 물론 아직은 윈올의 유이진이겠지만, 곧 ‘그 유이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 이진은 다짐했다.
다음으로 이진은 승현과 함께 지내던 10여 일이 그리워졌다. 집이 삭막하다며 작은 화분을 사자고 조르거나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고 뒹굴대는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동물을 키우다가 떠나보내면 이런 심정일까? 이진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들에 승현을 대입해 봤다.
매일같이 홀로 지내던 좁다란 원룸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이진은 드디어 자신의 캐릭터가 무엇인지에 대한 방황을 끝냈다. 허전함을 달래고자 남는 시간 동안 윈올의 앞 회 차를 전부 정주행한 이진은 드디어 ‘팬 반응’이라는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포털 창을 열고 ‘유이진’이라고 검색했다. 블로그부터 카페, 비공개 커뮤니티까지 많은 곳에서 이진의 언급되고 있었다.
대충 훑어봤을 때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유일이진’이라는 카페였는데 가입해서 확인해 보니 이곳에서 ‘서포트’라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포트가 뭔가요?’라고 댓글을 쓴 이진에게 누군가 친절히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응원의 의미를 담은 선물을 보내는 거예요.’라고 답글을 달아 줬다. 거기에 이번 서포트에는 이진이 신는 신발과 비슷한 스타일의 신발을 선물하려는 계획이라며 차근차근 설명해 준 덕에 팬 문화를 잘 모르는 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가 꼬질꼬질한 신발을 신고 다니면 주변인에게 소개할 때 부끄러우니 부족한 부분을 ‘서포트’를 통해 바꿔 주는 모양이었다. 마침 디자인 투표를 받고 있길래 이진은 자신의 취향인 신발에 한 표 선사했다.
이진은 가입한 김에 눈에 띄는 제목을 위주로 게시물을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아직 등급이 되지 않아 못 읽는 글도 더러 있었지만 별 영양가 없는 팬들의 앓이성 게시물은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겉핥기 분석 결과 팬들이 이진을 이해한 키워드는 천연, 엉뚱, 성실, 노력형 천재, 단호쯤의 단어였는데, 방송에서 유독 부각되어 편집된 에피소드들과 나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 보였다. 이진은 천연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대충 성형하지 않은 정도의 의미로 해석했다. 철벽남 다음으로 졸업 사진이 연관 검색어에 오른걸 보니 과거는 진즉에 털렸으리라 짐작했다.
그리하여 심심할 때 유일이진의 게시물을 확인하는 게 이진의 작은 습관이 되었다. 자신을 응원하고 아껴 주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때마다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고갈되었던 옹달샘이 촉촉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부담감은 오히려 좋은 자극제였다.
그렇게 이진은 2라운드의 후유증을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3라운드에 돌입했다.
순위 발표식 다음 날, 제작진은 참가자들을 언제나의 합숙소로 집합시키는 대신 순위 발표식을 하던 방송국 내부 대형 스튜디오로 불렀다. 지시에 따라 정장 스타일의 흰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장 관람석처럼 층이 높은 계단에 앉아 촬영 시작을 기다렸다.
“복고복고 아직 10위 안에 있네.”
“하늘 너머도 오락가락하긴 하는데 계속 치고 올라오긴 하더라.”
먼저 온 참가자들은 자기들끼리 음원 사이트 차트를 보며 어떤 ‘craving juice’가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르는지 구경했다. 7화가 끝나자마자 공개된 음원은 방송의 화제성 덕분에 대부분 아직 상위권에 노출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현이 슬금슬금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왔다. 넥타이가 불편한지 자꾸 매듭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승현이 고개를 들어 이진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승현이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아이스크림은 잘 먹었어?”
“뭐…….”
승현은 뒷말을 흐리며 이진의 옆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대다가 미열이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찬우와 윌리엄이 차례로 들어오고 미열이 지각 직전에 뛰어 들어왔다.
“야, 펜션 빌렸대.”
“뭐?”
미열은 들어오기 직전 스텝들의 말을 엿들었다며 중대 발표 사항에 앞선 스포일러를 뿌렸다. 찬우가 미열을 뭐라 더 채근하려던 찰나 피디가 마이크에 대고 촬영의 시작을 알려 왔다. 2라운드 우승자인 하늘이 슬레이트를 들고 메인 카메라 앞으로 다가갔다.
팡! 요란한 소리를 내며 3라운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3라운드의 주제는 ‘첫사랑’입니다.”
이진은 순간 놀라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이었다.
“왜요?”
승현이 귓가에 소곤거렸다. 이진은 순간 척추부터 어깨까지 소름이 올라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라운드, 여러분은 팀원들과 함께 원테이크 뮤직비디오를 촬영합니다.”
원테이크 기법이란 카메라 한대만을 이용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없이 한 번에 촬영하는 것으로 기법 특성상 동선을 치밀하게 연출한 뒤 모두가 계산된 대로 움직여야 했다. 한번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촬영해야 해서 아이돌 뮤비에선 좀처럼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총 일곱 개의 장소가 섭외되어 있으며 장소마다 공연하게 될 노래가 달라집니다.”
저번부터 음원 수익을 노린다 싶더라니 이번에는 아예 팀별로 다른 곡을 배분했다. 스크린을 통해 차례로 각 노래의 하이라이트가 공개됐다. 이진은 기껏해야 커버곡일 거라 생각했는데 제법 잘 만들어진 오리지널 곡이었다.
그리고는 저번처럼 1위부터 7위에게 차례로 하이라이트가 비춰지더니 각 팀의 리더가 되어 불려 나갔다. 이진은 아쉽게 8위를 차지해 이번 라운드의 리더 브로치를 받지 못했다. 곁에 앉은 승현과 찬우, 저 앞에 앉은 하늘이 간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진의 기억 속에선 데뷔한 적 없는 제이슨은 의외로 꾸준히 상승세를 탔다. 진영이 제이슨을 제치는 걸까 아니면 승현이 제이슨을 무시하고 진영을 뽑은 걸까, 알 수 없었다.
7명의 리더들은 가볍게 가위바위보로 원하는 노래를 골라잡았으나 누가 어떤 노래를 골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리본으로 눈을 가립니다. 그 후 제자리에서 열 바퀴를 돈 뒤 리더들의 박수 소리를 따라 당신의 리더에게 걸어가세요.”
참가자가 소리를 듣고 따라가 최종적으로 만난 리더의 팀이 되며 참가자가 눈을 가린 시점부터 리더들은 각자 자리를 교체하는 식의 진행이었다.
“방송 수위 제재 좀 먹었다던데 진짠가 보네.”
“저게 더 악랄하지. 만약 아무도 박수 안 치면 어쩔 거야?”
초반의 경매나 장기 자랑보다는 많이 약해진 수위에 윌리엄이 중얼거리자 미열이 곧장 받아쳤다.
이진은 미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자뿐 아니라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눈치껏 박수를 치지 않으면 시청자 아니라 같은 동료들에게도 원망을 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