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66화 (66/173)

66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얼핏 기 싸움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순위 발표식에서 5등이나 해 놓고 기뻐하진 못할망정 허무해하고, 우울해 보여서 조금 도발했더니 펄쩍펄쩍 뛰고. 나한테 화났으면서 팬 선물 준다고 하니까 쪼르르 따라오고.”

그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저번 일도 그래요. 병문안 온 사람이 다짜고짜 눌러앉겠다는데 쫓아내지도 못했잖아요. 내가 막 물건을 버릴 때도 뭐라고 안 했죠? 오히려 ‘맞아, 내 집이 좀 더럽긴 해’ 이런 표정 하고 있는데, 하……. 형도 자기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이진은 승현의 어이없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허리에서부터 척추까지, 몸을 지탱하던 힘이 탁 풀려 도저히 앉아 있기 어려워져서 실례를 무릅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스스로가 멍청하고 현실이 답답해서 선승현을 좀 때리고 싶은데, 지금 이 상황이 싫지가 않아서 웃겼다.

“그건, 네가 얼굴에 멍들어 있어서 그런 거야. 합의금 물어내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안 그런다니까요?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이진은 지금이 너무 재미있었다.

“붕붕이 볼래.”

“걔 오늘은 병원 갔어요. 정기 검진 받는대요.”

“개도 그런 걸 하는구나.”

“돈만 있으면 못할게 어디 있어요. 강아지 호텔도 있고 유치원도 있고 별게 다 있는데.”

이진은 이 상황을 만화로 그리는 상상을 했다. 선승현과 유이진 캐릭터가 침대에 가로로 드러누워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말풍선엔 ‘왈왈왈왈, 왈왈!’만 적혀 있는 그림을.

선승현은 자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스며들어 어느새 이진에게 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가까운 친인척이 없는 지금, 어쩌면 이진에게 가장 편한 상대가 승현일지도 몰랐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편견에 휩싸여 경계하고, 밀어내고, 결국 모진 말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진짜 한심하다, 유이진.’

누군가에게라도 짜증을 내고 싶은데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가도 웃음이 터지려다 말았다.

‘선승현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다.’

이상한 내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승현이 엇나갈 것 같으면 다잡아 주고. 이상한 오해가 있으면 해명해 주고, 만약…… 정말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과거를 당당히 짊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싶다.

이진은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했다. 이진은 승현의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게 되었다.

“형. 형이 왜 기운이 없는지 알려 줄까요?”

“넌 뭐야. 입 다물어.”

이진이 한참 감상에 젖어 있는데, 승현이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그새 뭔가를 보고 지금 이진이 어떤 기분인지를 추측해 낸 모양이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와서 되는대로 내뱉었다. 승현이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덜 죽은 소리들이 이진에게 가 닿았다. 이진은 멍하니 얜 욕먹는 걸 좋아하나 생각했다.

한참 동안 그가 웃기만 하고 정말 한마디도 안 하기에, 결국 이진은 항복하고 말았다.

“알았어. 말해 봐. 들어는 줄게.”

그러자 승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이진 쪽으로 돌려 누웠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듯한 거리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형이 지금 어이없고 힘 빠지는 이유는요.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요.”

“그럼 너희 집 오는데 긴장이 안 되겠니?”

“오늘 말고 평소에요.”

또 인생 상담이라도 하려나 싶어 대답을 안 했더니 승현도 말이 없었다. 그는 꼭 계획한 것처럼 대화의 양을 조절했다. 이진은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너는 왜 계속 존댓말이야? 다른 애들한테는 말 착착 놓으면서.”

그래서 딴소리를 했다. 평소엔 별로 거슬리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질문을 했다. 이번에는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킥킥대는 승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승현도 뇌가 피곤에 절어 조금 맛이 간 것 같았다.

“그게 이제 와서 궁금해요?”

“사실 안 궁금해.”

“형이 말 놓으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죽어도 말 편하게 하란 말 안 하길래 조금은 오기로.”

승현은 진짜로 즐거워 보였다. 원래도 표정이 이렇게 많았나? 그러고 보면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표정들이었다. 승현은 대체로 말수는 적었지만 마냥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낯을 가려서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한다고 했었나, 그런 얘기를 미열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하늘이나 찬우와는 꽤 친하게 지냈고. 오히려 미열에게나 장난친다고 표정이 항상 굳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승현이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 둔 컵을 챙기며 문을 열었다.

“이제 진짜 밥 차리러 갈게요. 형도 같이 나와서 수빈이한테 팬 서비스 좀 해 줘요.”

이진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고작 식사 한 끼에 팬 서비스를 요구하다니, 밥값이 비싼 건지 몸값이 싼 건지.’ 하고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가스레인지와 냉장고를 바쁘게 오가는 승현을 내버려두고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 무늬를 보고 있는데 수현과 수빈이 쭈뼛대며 이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수빈이에요. 방송 너무 잘 보고 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진은 어린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렀다. 계속 마주 존대를 하면 상대방이 불편할 것 같은데 말을 놓을 적당한 타이밍을 찾지 못해 갑자기 엄청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특히나 승현의 동생이라는 타이틀을 단 10대 소녀는 도통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같은 타이틀을 단 유아는 더 고난이도였다. 수현은 이진을 관찰하다 갑자기 배에 몸을 찰싹 붙이고 배시시 웃기도 하고 혼자 낯을 가리고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저 멀찍이 도망가기도 했다.

“오빠 노래 너무 잘해서 막 소름 돋아요. 애들끼리도 맨날 그 얘기해요.”

“아, 감사…….”

“수빈아, 손님 괴롭히지 말고 반찬이나 날라.”

적절하게 승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수현이 두다다다 달려가 승현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이진으로썬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이었다.

저녁은 의외로 소박했다. 정확히는 재벌의 밥상치고 소박했다. 열 종류가 넘는 고급진 밑반찬과, 방금 승현이 부친 계란프라이 한 무더기. 그리고 삼겹살로 만든 제육볶음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이진은 역시 부자들도 매일 스테이크를 썰진 않는구나 생각했다.

수현이 복도를 뛰어다니며 방문을 두드렸더니 두 명이 더 나타났다. 거실 문을 열고 상황을 살피는 모습이 수빈과 많이 닮은 여자가 수민이랬고, 그 뒤에서 문 앞에서 비키라고 무신경하게 등을 툭 미는 남자가 재현이랬다.

두 사람은 이진과 가볍게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시작했다. 새삼 가족 구성이 특이했다. 다양한 가족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지만 외아들에 친구도 없는 이진이 실감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재벌 집에서도 다 큰 아들딸들을 한 집에 모아 두고 친남매처럼 키우는걸 보니 이런 형태로도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다가 멍 때리는 게 수현이 닮았다.”

“가위바위보도 못해.”

“아, 진짜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둘 다!”

가족을 만나고 보니 드디어 납득이 되는 게 있다면 승현의 뜬금없는 무신경함이었다. 어쩌면 그건 유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재현은 승현과 성격적으로도 판박이었다. 생김새는 어렴풋이 닮은 정도였지만 말투랑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누가 말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제 친구들이 승현이 오빠랑 하늘이 오빠를 막 좋아하는 거예요. 저는 그래도 이진이 오빠뿐이거든요.”

제 편이 많아져 긴장이 풀린 수빈은 재잘재잘 묻지 않은 정보들을 이야기했고, 이진은 꼭 미열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이진의 미소에 자신감이 붙은 수빈도 활짝 웃었다.

“이진이 오빠랑 승현이 오빠 둘이 같이 데뷔하면 너무 좋겠다.”

수빈이 미래를 상상하는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진의 숟가락질이 멈칫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왠지 고개를 들면 승현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아 밥알을 열심히 노려봤다. 승현과의 내기를 떠올렸다. 둘 중 하나는 꼭 엿을 먹어야 끝나는 내기.

“이진이 형은 우리 형 싫어하는 것 같은데.”

“아. 네가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재현이 우물우물 말하자 수빈이 날카롭게 신경질을 냈다. 수현이 큰 소리에 겁먹은 표정이 되자 수민이 수빈의 등을 퍽 때렸다. 이진은 가족 사이에 난무하는 폭력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승현은 뜬금없는 소리로 수현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렸다.

“디저트 먹자.”

‘밥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승현이 밥을 먹던 중 디저트를 찾자 재현이 벌떡 일어나 거실 문을 열고 나갔다. 수민은 바쁘게 반찬을 정리했다. 갑자기 밥그릇을 빼앗긴 이진은 젓가락을 들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 집안 식구들은 이진보다 템포가 한참은 빨라서 따라가기 벅찼다.

“짜자자잔!”

틱, 하고 불이 꺼지더니 수민의 환호성과 함께 재현이 초 여섯 개를 매단 조그마한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수빈이 꺅 소리를 내며 입가를 두 손으로 가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수빈이 생일 축하합니다!”

무반주 합창이 이어졌다. 얼결에 따라서 박수를 치다가 설마 하는 눈으로 승현을 보았다. 멍하니 손을 움직이던 승현이 이진의 눈빛을 눈치채고 스윽 시선을 피했다.

‘선승현 동생의 깜짝 생일 파티에 선물로 초대받은 건가 지금?’

이진은 이 황당한 상황들의 연속에 결국 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들 너무 고마워…….”

“빨리 초나 불어.”

수빈은 이제 눈물을 글썽이며 초를 불었다. 테이블에 내려놓고 보니 곰돌이 얼굴 모양을 한 시트에 초콜릿으로 눈, 코, 입을 그린 케이크였다.

“수현이랑 같이 가서 골랐어.”

“고마워, 우리 막내!”

수민이 말했다. 수빈은 수현을 덥석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이진은 경험해 본 적 없는 과격한 애정 표현이었다. 승현이 케이크 상자 밑에서 플라스틱 칼을 꺼내 들더니 잔인하게 곰돌이를 여섯 등분으로 조각냈다. 그러자 다들 자연스럽게 포크를 들고 제 몫을 퍼먹기 시작했다.

“형은 따로 접시에 담아 줄게요.”

승현이 이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진의 조각을 덜어 냈다. 곰돌이의 왼쪽 귀와 왼쪽 눈이 이진의 접시에 담겼다. 케이크 단면에는 딸기가 쫑쫑 박혀 있었다. 붉은빛이 곰돌이의 뇌와 혈관을 연상시켰다.

‘원래 이렇게 잔인하게 먹는 건가?’

승현이 야만적인 건지, 이렇게 의도된 케이크인지 고민하던 이진은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어 끄트머리를 살짝 떠먹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옛날에 저녁이나 새벽 무렵에 방영했던 요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충격적인 영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케이크 하나에 막 10만 원 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여태까지 먹어 본 케이크는 빵 덩어리에 크림을 올렸을 뿐 진짜 케이크가 아니라고 증명하듯 경탄스러운 맛이었다. 빵이 촉촉하고 크림이 달고 딸기가 새콤할 뿐인데 세 가지 맛이 입 안에 확 퍼지며 미뢰를 마구마구 자극했다. 미각과 후각과 시각의 환상적인 하모니에 이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의 씹을 필요도 없이 케이크는 녹아 사라졌다.

‘행복하다…….’

다들 이 맛있는 케이크를 먹으면서 식탐을 부리지도 않았다. 이미 각자에게 충분한 양이 주어진 덕이다. 이진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