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형. 오늘 행사 끝나고 우리 집 가 볼래요?”
순위 발표식 전까지 바쁘게 행사를 뛰던 중 승현이 물어 왔다.
“뭐?”
“어머니 다시 출장 가셨대요. 저도 슬슬 들어가 봐야 하는데 이 얘기 하니까 동생들이 형 보고 싶어 해서요.”
승현이 그 말을 할 때, 이진은 한창 메이크업을 받던 중이었다. 눈을 반쯤 감고 눈 위를 살살 문지르는 브러시를 느끼던 터라 눈을 크게 뜨지도 못했다.
“계속 형 집에 신세 졌는데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 정도는 같이 해도 되지 않아요?”
“저녁 식사는 맨날 같이…….”
이입을 움직이다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턱을 붙잡혀 입술에 색칠을 당했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이진은 하관을 굳히고 빨리 제 몸을 만지는 손이 떨어지길 바랐다.
“형 집에서 차려 먹는 거랑 제대로 대접하는 거랑은 다르죠.”
“으으으…….”
“알았다는 거예요?”
이진이 대답하기 전에 승현이 먼저 이름을 불렸다. 오늘 행사는 지역의 작은 축제로, 1위부터 5위까지 한 팀이 각자 무대를 선보였다. 비슷한 행사를 앞서 뛰어 본 결과, 어르신들은 이진 팀의 무대를 가장 좋아했다. 보통은 1위가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만도 하지만 이진 팀은 늘 마지막에 공연을 했다.
“이진이 형. 승현이 형이랑 같이 살아요?”
같이 메이크업을 받던 우진이 승현이 사라지자마자 물었다.
“아니, 뭐…… 저녁을 같이 먹어서.”
승현이 미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우진에게 말해도 되나 싶어 이진은 말끝을 흐렸다.
“저도 형이랑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다음에 고기 먹으러 가요. 소고기 좋아하세요?”
“응, 아마?”
“아. 순위 또 내려갔어.”
우진과의 어색한 대화 도중 지호의 커다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청자 투표가 시작된 이후로 지호는 끊임없이 홈페이지를 새로 고침하며 자신의 표를 확인했다. 6화 본방 때는 없었던 말이 다시 보기에 추가되며 논란을 빚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더라도 구독자가 하나라도 늘면 나한텐 이득이지. 아이돌 그까짓 거 정산받아 봤자 몇 천인데 그거보다 너튜브가 훨씬 수익 많이 나요.’
시청자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가 데뷔하길 바라는 마음에 투표를 한다. 아예 투표권이 리셋되는 시간에 알람까지 맞춰 놓고 투표를 하는 팬들도 있다. 그들 누구도 자신의 아이돌이 그런 말을 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망할! 본방에 처넣은 것도 아니고, 재방 돌았냐고!”
본방에서 참가자에게 심각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울 수 있는 내용이 방영된다면 소속사 측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사 보는 다시 보기에서는 이미 다운받은 영상을 삭제시킬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본방은 방송 편성 시간 때문에 넣을 수 있는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 방송국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다시 보기에 사소한 재밋거리를 추가해 본방보다 길게 편집한다. 시청자들도 그걸 알고 일부러 돈을 주고 구매하는 것이니 뒤늦게 파일을 수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몇 등인데?”
“성수원보다 낮아. 돌았냐고 진짜…….”
개인 방송 구독자들의 도움으로 나름 투표수 중위권대에 머물던 지호가 저번 순위 발표식 마지막에 이름이 불린 수원보다 등수가 낮다는 건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수원이 몸을 움찔거렸다.
“얘들아, 입조심 안 할 거면 나가서 떠들어.”
이진이 차갑게 말하자 주헌과 지호가 조용해졌다. 이진은 우진이 자신을 보고 미소 짓는 걸 눈치챘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
승현의 7살짜리 동생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작았다. 이진은 7살 평균 신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지만 본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했을 때 밥도 혼자 차려 먹을 줄 아는 나이였다.
“형아아아!”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강아지처럼 우다다다 달려와 안기려고 드는 어린아이는 진짜 강아지만 했다. 냉장고 문손잡이에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김치 냉장고보다 작을지도 몰랐다.
“선수현, 인사부터 해야지.”
한발 먼저 들어간 승현이 말했다. 말투는 평소랑 비슷했는데 말이 어린애에게 향하다 보니 엄하게 꾸짖는 것 같았다. 수현이 승현을 힐끔 보고 이진을 다시 힐끔 보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린아이의 발음은 아무리 좋게 들어 줘도 ‘은냐대요’처럼 들렸다.
“형 금방 갈 테니까 수민이 누나랑 놀고 있어.”
“근데에…….”
“이진이 형 집에 안 갈 거야. 형 방문 두드리면 까꿍 하고 나온대.”
현관 앞을 지키고 선 수현 때문에 신발도 벗지 못했다. 승현이 뭐라고 칭얼거리려는 아이를 달래 거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애기한테 인사도 못 했네.”
“애기 아니에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금방 크는데. 쟤가 좀 늦돼서 그렇지.”
애기가 아니래 놓고 늦돼다고 하니 이진은 더 헷갈렸다.
긴 복도에서 현관에 가장 가까운 방이 승현의 방이었다. 승현이 마실 거라도 내오겠다며 침대에 앉혀 두고 나가자 이진은 그제야 지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제안을 승낙한 것을 다시금 후회했다.
변명을 조금 해 보자면, 은근슬쩍 미열도 함께 데려올 속셈이었다. 둘은 친구고…… 말하는 걸 들어보면 미열은 승현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 같으니 같이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진이 잠깐 정신 줄을 놓고 헤매는 사이 미열이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가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승현과 둘이 택시를 타고 있었다.
대체 승현의 집에서, 그것도 단둘이 뭘 할 수 있을까. 이진의 집에서 지내던 승현은 대부분 이진을 간병하거나 집안일을 했다. 매일같이 집이 더럽다며 쓸고 닦고 새 물건을 사 오고 헌 물건을 버리려고 들고……. 그리고 휴식기가 끝난 뒤에는 촬영을 하고 돌아온 뒤 저녁을 차려 먹고, 같이 운동을 갔다가 돌아와 지친 몸을 씻은 뒤 금세 잠들었다.
‘그런 일상적인 걸 하려고 굳이 초대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때,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지이잉, 찰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가하게 현관문 바로 근처에 방이 있으니 문이 달렸어도 소리가 잘 들리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던 이진은 이내 자신이 이 집의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 왜 핸드폰을 안 봐!”
십대로 추정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쨍하게 울렸다. 목소리나 말투에서 청소년기 앳됨이 묻어 나왔다.
“왜 소리를 빽빽 질러.”
“아, 진짜! 오빠가 핸드폰을 안 보잖아! 왜 들고 다니냐고 그럼!”
저 여학생도 승현의 가족인 걸까. 이진은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며 방 문 너머에서 웅웅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 몰라! 오빠가 오늘 이진이 오빠 데리고 온다며! 그래 놓고서 핸드폰을…….”
“형 지금 방 안에 있는데. 불러 줘?”
대뜸 튀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이진은 바짝 긴장했다. 승현이 여러 차례 자신의 동생이 이진의 팬임을 언급했으니 이런 경우 그의 이름 모를 여동생이 자신의 팬이라는 결론에 다다라야겠지만, 이진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설마 내가 선승현 싫어하는 거 방송에서 티 났나?’였다. 분기탱천하고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기가 죽었다.
“야, 왜 그걸 이제 말해!”
“소리 좀 그만 질러. 수현이 놀라겠다.”
승현이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왼손에는 오렌지 주스를 잔뜩 담은 유리컵을 들고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승현의 여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 남동생 쪽은 너무 작아 당황스러웠는데 이쪽은 너무 커서 당황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이진이 민망한 낯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동생은 이진을 보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잘 익은 토마토가 돼 버렸다. 생김새도 성격도 승현과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승현이 재벌 새아버지 쪽 딸인가?’
이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승현의 정보를 떠올리며 그들의 관계를 추측했다. 다행히 친남매가 아님에도 둘의 사이는 굉장히 친해 보였다.
“얘가 수빈이에요.”
“아, 그렇구나.”
“선수빈, 인사 안 할 거야?”
동생들에게 꼬박꼬박 인사를 시키는 승현은 마치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인사 대장 같았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빈이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승현은 인사를 듣자마자 문을 닫았다.
“마셔요.”
“고마워.”
잠깐 동안 목이 심하게 말라진 이진은 주스 반 컵을 한 번에 마셨다. 아닌 척 승현의 눈이 컵에 닿았다 떨어지는 걸 이진은 목격하고 말았다. 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확인한 승현이 입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동생들이 형 팬이 됐어요. 그런고로 형은 당분간 저랑 친한 척을 해야 해요.”
승현은 꽤 당당하게 요구했다.
“저는 어차피 형한테 미움받는 신세니 싫다고 하면 계속 귀찮게 굴 거예요.”
“아니야. 싫다고 안 할게.”
그러자 승현이 오히려 당황스런 표정이 되었다.
“의외네요.”
“말했잖아. 적당한 선만 지켜 주면 나도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니까?”
“형 집에서 재워 달라고 조른 것 때문에 완전 아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승현은 이진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긋 웃었다. 이진은 다시 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럼 난 오늘 너랑 친해 보이려고 초대된 거야?”
그렇게 묻자 필요할 때만 말이 많아지는 승현의 입이 꾹 다물렸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진의 마음속에 ‘얘 혹시 입 다물고 시위하는 건가, 아니면 눈 뜨고 자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할 무렵 허공을 맴돌던 승현의 시선이 그에게 와 박혔다. 말하는 폼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아니죠. 고마워서 초대한 거라니까요? 그런데, 수현이랑 수빈이가 형을 너무 좋아해서 생색내고 싶은 마음도 조금?”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는 승현은 조금 미안한 것 같기도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승현아,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이진이 독기 없이 순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현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겠다는 듯이 표정을 관찰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그래요. 형이 무슨 생각인지…….”
이진은 승현이 잘못 이해했다 생각하고 말을 덧붙였다.
“2라운드 시작하기 전에, 내기 잊어버린 거 아니냐고 성질을 긁어 놓더니 동생이 내 팬이라면서 인형을 주질 않나. 병문안 온 척하면서 내 집에 눌러 붙기나 하고. 고마워서 저녁 식사 초대한다면서…… 집에 데리고 와 놓고 동생들이랑 놀아 주라고? 상황이 많이 이상하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