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진에게도 타인에게 한없이 물러지던 시기가 있었다.
성장이 채 끝나지 않아 덜 여문 태가 여실히 느껴지던 나이.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피곤한 얼굴이나마 부모님이 어서 오라 맞아 주던 날들. 교복 셔츠를 조이는 넥타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고등학교 1학년.
그 무렵 이진은 유독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반배치 고사 성적이 유난히 잘 나오자 학교 선생님들은 입학부터 이진을 편애했고, 성적에 간섭 한번 않던 부모님도 이진이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진아, 급식 같이 먹을래?’
중학교 3년 내내 시비를 걸던 무리들은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 교실엔 이진을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을 살피며 새로운 친구를 물색하던 학생들은 사춘기의 열병을 온몸으로 겪는 학생들 틈에서 막 개화한 꽃처럼 화려하게 생긴 이진을 보고 홀린 듯 다가왔다.
조용한 이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순진한 아이들을 보며 어쩌면 이번엔 정말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공부 잘하고 번듯하게 잘생긴 교내 유명인의 장래 희망이 가수라는 소문은 금세 교무실을 휩쓸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배부 첫날부터 잃어버리는 음악 교과서를 유독 꼼꼼히 살피는 이진을 눈여겨보시던 음악 선생님은 이진을 불러 소문의 진위를 확인했다.
‘이진이 가수한다고?’
‘네…….’
‘아이돌 막 이런 거냐?’
‘댄스 가수가 목표는 아니지만, 어떻게 데뷔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진의 꿈이 헛바람이 든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님을 분명해지자 선생님은 실용 음악을 전공한 조카에게 부탁해 무료로 입시 강습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첫 레슨 날 이진은 난생 처음으로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치고는 용케도 기본기가 잘 잡혀 있네. 보통은 잘못된 호흡법이나 발성 습관부터 뜯어고쳐야 하는데 딱히 흠잡을 데도 없고 목 관리도 잘 되어 있고……. 무엇보다 타고난 음색이 좋아서 테크닉만 조금 더 익히면 대학은 골라 갈 수 있겠는걸?’
어색한 공기 때문에 주눅 든 이진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한 소절 곡에 이진의 가능성을 알아본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한마디에 이진은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쌓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설움이 단숨에 녹아 사라짐을 느꼈다.
이대로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열일곱, 특별한 나이. 이진의 고난은 하늘로 훌훌 날아가고 그동안의 고생을 보답하듯 걷는 걸음마다 탄탄대로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한 달 레슨비가 300만 원이 넘어가는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선생님은 그 아이들보다 이진이 훨씬 낫다는 말로 이진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고, 미래가 기대된다는 말로 이진으로 하여금 헛된 상상에 부풀도록 만들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대학생이 되더라도 선생님이 곁에 있어 주신다는 뜻일까?
이진은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더 이상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일상을 나누고 마음으로 교감하는 광경이 그려졌다.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만 있다면 이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교복 넥타이나 섞이기 어려운 화제뿐인 교실의 시끄러운 대화들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끝내 이진의 버팀목이 되지 못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버릴지라도 상관없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어른의 관심은 외로움에 헐떡이던 이진에겐 너무도 달았다. 그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 주었고 의지할 수 있었다. 이진의 관심사에도 해박해 사소한 화제에도 대화가 끊이질 않았고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일 땐 전혀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너만의 색을 찾지 못하겠다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감각이 트이기도 하거든. 이진이 너는 소화가 빠르니까 각 장르마다 배울 점을 흡수해서 너만의 개성으로 녹여 낼 수 있을 것 같아. 이번 달부턴 연습곡의 범위를 좀 넓혀 보도록 하자.’
그가 하는 말은 뭐든 옳았다. 이진이 할 대답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없었다. 입지도 않을 체육 대회 반티를 살 수 없다며 끝까지 돈 내기를 거부하고, 매점에 같이 가자는 말에 불편하니까 그만 좀 보채라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던 이진과는 달랐다.
그냥 그렇게,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
“바이러스 감염인 것 같네요. 자세한 건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뭐 큰 병은 아닐 겁니다. 스트레스, 과로, 불균형한 영양 섭취. 이런 생활을 장기간 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죠.”
희미한 목소리가 이진의 깊은 잠을 방해했다. 이진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누운 몸에 닿은 감촉이 낯설었다. 어두운 방 안에 시야를 가리는 커튼과 주거용 건물이 아닌 듯한 천장이 보였다. 커튼 밖으로 어렴풋이 두 인영이 보였다.
“열 내리면 퇴원하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진이 주변을 살피는 사이 공간을 웅웅 울리던 대화가 끝나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내 옅은 빛이 새어 나오던 문이 닫혔다. 커튼 너머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진에게도 익숙한 깊은 한숨이었다.
차라락 조용한 소리를 내며 커튼이 열리고 키가 큰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이진을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났어요?”
당연하게도 그는 선승현이었다. 주변이 어두워 형체가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승현은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진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승현은 선반에서 500ml 페트병을 꺼내 뚜껑을 따서 건넸다. 물은 미지근했지만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감각은 선명했다. 이진이 몇 모금 만에 물을 전부 비우자 승현이 자연스럽게 병을 거둬 갔다.
“형이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차 불렀어요. 응급실에 있다가 이목이 너무 집중되는 것 같아서 우선 남는 병실로 옮겼고요. 그나마 1인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늘 차분하게 말을 골랐던 평소와 다르게 허겁지겁 말을 꺼냈다. 승현이 당황한 상태에서 아직까지 진정하지 못하고 있음이 전해지자 이진은 오히려 차분한 상태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호자한테 연락을 했는데…….”
그가 말을 멈추고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승현이 입을 열었을 때 화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 있었다. 승현이 침울하게 말했다.
“……형이 죽는 줄 알았어요.”
“많이 놀랐어?”
“놀란 것도 놀란 건데.”
승현이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진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것 같았다.
“좀 불안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자기 건강도 못 챙길 줄은 몰랐거든요. 그니까, 형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형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다는 뜻이에요.”
승현의 말이 아프게 들렸다. 승현은 굳은 얼굴로 다시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형이 위태로운 이유를 내가 실수로 알아 버린 것 같아서…….”
아직 생각의 정리가 끝나지 않은 말은 횡설수설하고 두서가 없었지만 이진은 충분히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이진이 부모도 없고 친척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무겁고 부담스러운 정보였다.
승현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했을 거다. 잠깐 남의 집에 신세 좀 지려고 찾아왔더니 집 주인이 혼절하는 바람에 제 손으로 119를 부르고, 연락이 되는 보호자가 없어 스스로 보호자 노릇을 해야만 했을 테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래서 미안해요.”
“아니야. 딱히 비밀도 아니었어.”
조용한 이진의 말에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진은 왼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바라봤다. 제 팔에 달려 있는 의료 용품이 신기했다. 입원도 링거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어색했다. 그리고 곧 병원비가 대체 얼마가 나올지 조금 두려워졌다. 부모님이 종종 대화하시던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의 대부분은 가족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서 병원비 때문에 집안이 폭삭 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진은 그 대화를 엿들으며 절대 아프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형.”
그때 들려온 목소리가 이진의 잡다한 생각을 막았다.
“비밀이 아니면 형 입으로 말해 줄래요? 무작정 추측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승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아요. 나중에 준비가 되면…… 그때 말해 줘요. 그때까지 나는 형에 대해 모르는 거예요.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형이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의 말에 이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승현을 믿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퇴원을 하고 돌아온 집엔 여전히 승현이 함께였다. 승현은 병원비를 본인이 수납하고는 하숙비라 생각하라고 우겨 댔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돈이 아주 많았다. 평소 군것질을 자주 하지 않아 합숙을 하면서 돈 쓰는 일을 자주 볼 일이 없었는데, 근처에 번화가가 있는 이진의 집에서는 아주 돈을 물 쓰듯 했다.
우선 이진이 퇴원한 당일, 승현은 본인이 갈아입을 옷이나 잠옷, 속옷까지 바리바리 사 들고 들어왔다. 그러고도 밥 차리기가 귀찮으면 어플을 통해 곧장 배달을 시켰고, 집 앞 편의점 갈 때 불편하다며 10만 원이 넘는 슬리퍼도 사 왔다. 샤워기 헤드를 필터가 달리고 수압이 높은 비싼 걸로 바꾸기도 했다.
“형, 이거 바꿔도 돼요?”
어둠 속에서 나눈 짧은 대화 이후 승현은 전에 없이 뻔뻔해졌다. 원래 눈치라고는 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진의 살림살이 하나하나 간섭해 대고 마음에 안 드는 가구가 있으면 새로 장만하자며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왜 남의 집 가구에 이렇게 관심이 많아! 물건에 애착 갖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형은 애착 같은 거 안 갖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험하게 쓰지! 식탁이 이게 뭐야. 더러워서 버려야지, 이거!”
승현이 냄비 자국과 라면 국물이 눌러 붙은 식탁을 탕탕 내려치며 말할 때 이진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별로 앞뒤가 맞는 논리는 아니었지만 이진은 그의 말처럼 물건에 큰 애착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 무렵의 물건들은 이사 가기 전 깡그리 정리해 버렸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진의 5천 원짜리 식탁은 10년은 넘게 쓴 물건처럼 더러웠다.
무엇보다 승현이 멋대로 이진의 영역을 침범하는 짓을 허용하지 않으려 잔뜩 방어막을 세워 둬도, 이진이 어디까지의 간섭을 허용하는지 관찰하는 승현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굳건한 방어막은 손 쓸 도리 없이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승현을 밀어내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진은 승현이 멋대로 집 안 이곳저곳을 헤집어 대는 걸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노력이 통한 건지, 이진은 승현의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제법 특별한 위치에 올랐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휴식기가 끝나고 6화가 방영되는 날, 두 사람은 7화 방영과 동시에 풀릴 음원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에 들러야 했다. 당연히도 스튜디오엔 반가운 얼굴들이 여럿 보였고 그 중엔 여행을 갔다던 미열도 있었다.
미열은 녹음 때문에 급하게 여행에서 돌아왔으며 본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그냥 집에 머무를 거라고 말했지만 승현은 그의 집으로 옮겨 가지 않았다. 이진의 눈치로는 미열은 승현이 집에서 쫓겨났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둘이 같이 오냐?”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승현은 이진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이유를 미열에게마저 뭉뚱그레 숨겼다. 승현이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이진도 입을 다물긴 했으나 두 사람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은 이진을 묘하게 들뜨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긴. 이진이 병원 갔다면서. 그래서 네가 또 과보호하려고 나서는 거 아니야?”
미열이 이진을 턱짓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