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관객 투표 1위, 700점을 획득한 팀은 바로…… 하늘 너머 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결과적으로 이진의 복고복고 팀은 5등이라는 애매한 등수를 얻었다. 1등은 하늘의 ‘하늘 너머’ 팀이, 2등은 승현의 ‘백전백승’ 팀이, 3등은 찬우의 ‘섹시는 우리 것’ 팀이 차지했고 4등은 제이슨의 ‘힙 업 사운드’ 팀이었다.
이진은 그 미적지근한 결과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평가에 박한 편인 그가 보기에도 상위권에 위치한 팀은 물론이고 그들보다 하위권에 위치한 팀의 퍼포먼스 수준이 자신의 팀보다 몇 배는 더 나았다.
“하늘 너머 팀은 컨셉 소화력, 신선한 무대 연출,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모두 놓치지 않아…….”
하늘은 그토록 원하던 교복 컨셉을 훌륭히 소화했다. 승리를 향한 갈망과 집착이 범벅된 가사로도 용케 풋풋함을 재현했는데, 짝사랑하는 소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아 토라진 소년의 시점을 안무로 녹여 내는 데 성공한 게 승리 요인이었다.
게다가 멤버 중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소소한 화제가 되었던 중국인 참가자 리웨이에게 소녀 역할의 안무를 시키는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덕분에 계속 1대 6으로 쏠려 있던 무게감이 후렴 부분에서 고르게 퍼지면서 주는 무대 구성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리더인 하늘과 신선한 캐릭터를 연기한 리웨이를 제치고 가장 돋보인 건 단연 강지흔이었다. 이진처럼 대부분의 파트를 홀로 부른 건 아니지만, 적절하게 들어간 밝은 애드리브가 컨셉에 비해 다소 음울했던 노래의 색깔을 완벽히 뒤집어 버렸다. 그런 류의 애드리브는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래도 힘들었다. 이진도 무대를 감상하며 지흔을 다시 보게 되었다.
“관객 투표 2등, 600점을 획득할 팀은 바로 백전백승 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승현 팀은 정말 단체로 어디 폭력 서클에라도 가입했다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껄렁한 분위기를 잘 나타냈다. 편곡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검은 목 티와 가죽 재킷의 조합이 원곡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개별 안무로 반항 컨셉을 표현한 것 또한 의외로 관객들에게 먹혔다. 멤버들 실력이 전체적으로 탄탄해 각자 다른 춤을 추더라도 조잡함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그 외에도 따로 연구를 했는지 가사와 찰떡같이 어울렸던 다양한 표정과 미열의 의견을 반영해 중간에 넣은 탐미적인 제스처가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무엇보다 무대 흡입력이 좋았다. 승현의 뺨에 붙은 반창고를 볼 때마다 집중이 흐트러진 이진마저 후반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대를 즐겼을 정도였다.
“백전백승 팀은 무대의 안정성을 떨어트릴지도 모르는 도전을 했음에도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에 비해 섹시는 우리 것 팀의 무대는 안타깝게도 섹시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찬우와 맹연습을 한 덕에 안무의 완성도는 제일 좋았지만, 의상 외에는 경호원이라는 컨셉을 전혀 살리지 못한 게 감점 요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진은 경호원이 경호 대상의 사랑을 원하고 구걸하는 스토리가 있는 무대보다는 지금 같은 깔끔한 무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제이슨의 힙 업 사운드 팀은 원하는 음악 스타일과 맞지 않는 귀여운 동물 귀를 보완하고자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많은 가사를 랩으로 대체하고 안무도 다수 생략했다. 두 팀으로 나뉘어 서로를 마주 보고 으르렁대는 맹수들의 대결처럼 연출했는데 퀄리티도 높고 볼거리가 많아 즐거웠다. 하지만 관객이 바라는 아이돌 무대와는 거리가 있어 점수가 높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다들 이진 팀의 무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복고복고 팀의 5위는 단순한 춤이 예상외로 칼 군무라는 호평을 들은 데다 보컬 대부분을 이진이 소화했기에 가능한 등수였다. 사실 5위권 밑으로는 결정적인 승부수가 없어 무대도 다 고만고만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순위가 발표되고 무대에서 내려가는 길은 참 씁쓸했다. 친구들이 높은 점수를 받고 칭찬을 듣는데도 이진은 진심으로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꾸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억울한 마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음악 방송 출연권은 홈페이지 영상 공개 후 일주일간 진행되는 온라인 투표 점수와 합계해 1등을 차지한 팀이 얻을 수 있다. 심사 점수 10%, 투표 점수 40%가 반영되며, 이 점수에 개인 투표수가 포함되어 이번 라운트 탈락자를 결정짓게 된다.
즉, 1등을 하지 못한 팀도 역전을 노려볼 만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 등수씩 내려갈 때마다 100점씩 점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나마도 3위권 이내나 되어야 꿔 볼 만한 꿈이었다.
이진은 실수 한번 하지 않은 완벽한 무대였다. 후회를 할 수도, 더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하지만 팀 적인 문제는 달랐다. 그의 리더십과 기량이 모자랐던 것뿐 분명 더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그토록 팀원들을 닦달하고, 불안한 심리를 빌미로 반쯤은 협박해 가며 끌고 온 게 고작 여기였다.
“와, 그래도 우리 5등이나 했네!”
“야, 우리 정말 잘했다!”
다른 멤버들은 등수에 만족하는 것 같아 더 답답했다. 이진은 애써 수고했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과연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떻게 고작 이 정도 등수를 가지고 만족을 하지? 분노가 옅게 일렁이다가 그들 딴에도 이것이 최선이었음을 떠올리며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 내쉬는 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어깨는 힘이 빠져 살짝 쳐졌다.
“많이 힘들어?”
인터뷰를 기다리며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우진이 어깨를 주물러 준다고 손을 올렸다. 이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비틀어 손을 쳐 냈다. 명백한 거부에 우진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간지럼 타냐고 물었다.
지호는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다더니 복도 끝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큰 목소리로 깔깔댔고, 채일은 상기된 표정으로 주헌, 태원과 떠들었다. 이진이 모르는 사이에 나름의 유대감을 형성하기라도 한 건지, 그렇게 싸우고도 제법 친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언뜻 보면 수원이 팀 내에서 제일 겉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이진은 무리의 선봉을 맡고 있음에도 그들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 벽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 연신 핸드폰을 두드리는 수원이 보였다. 이진은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불쾌함에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에서 복고복고 팀이 호명되었다.
“아쉽지만 지금 등수에 만족하며 다음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판에 박힌 듯한 대답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은 이진은 옷을 갈아입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어? 벌써 가?”
뒤에서 멤버들이 부르는 것 같았지만 옅은 미소를 입가에 올리고 먼저 가 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몇 주간 닳도록 들락거려 신물이 나는 엘리베이터와 복도를 부리나케 달렸다. 등 뒤로 현관문이 철컥 소리가 나게 닫히고서야 억눌렀던 숨을 편하게 내쉴 수 있었다.
사람이 없는 방 안은 계절상 이미 봄이 되었는데도 어쩐지 찬 기운이 맴돌았다. 불 꺼진 방안을 네모난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부드럽게 비췄다. 햇빛은 방 가운데에 비스듬한 주황빛 사각형을 그리며 머물렀고, 우연히도 이진이 선 곳까진 그 온기가 닿지 않았다.
이진은 그 짧은 순간의 온기마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러워졌다. 그렇다고 햇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빛을 받는 유치한 짓거리는 저지르지 않았다.
오늘 촬영을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참가자 전원에게 일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드디어 이 답답한 생활이 끝이 났으니 기뻐해야 마땅했다. 무대 전까지만 해도 뛸 듯이 기뻤는데 계속 축축 늘어지는 감정과 팔다리는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4등이라도 했으면, 제이슨이라도 이겼으면 기분이 나아졌을까?
이진은 더 생각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짐을 챙겼다. 침대 밑에 넣어 둔 가방을 꺼내 양말이나 수건, 세면도구와 잠옷을 챙겨 넣었다. 가져온 작곡 노트는 머리맡에 두기만 하고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한 채 도로 집어넣었다. 이번 합숙 기간은 애초에 짧았기에 들고 온 짐도 얼마 되지 않았다.
작은 짐 가방을 전부 챙길 때까지, 세 명의 룸메이트 중 단 한 명도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불쑥 느껴지는 외로움을 각각 2등과 3등을 차지한 그들을 향한 경쟁심으로 착각한 이진은 팀 2등, 개인 1등을 한 경험이 있으니 마냥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런데…… 그때는 어땠더라?
승현과 싸우느라 찬우가 방을 나가고,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는 내기에 동참했다. 차라리 저번 라운드에서 신나게 놀았어야 했어야 했는데…… 감히 배부른 줄도 모르고. 자꾸 안으로 향하는 책망을 털어 내며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문을 움켜쥔 채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이진은 그제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다음 라운드에 살아남게 되더라도 인원이 처음의 두 배로 줄어들었으니 아마 숙소는 재배치에 들어갈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익숙한 풍경도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몰랐다. 이 방 안에서 참 여러 일을 겪었고 많은 성장을 했다. 그 모든 것에 여태까지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이상하게도 떠나는 발걸음에 미련이 묻어 나왔다.
정을 붙이고 집착을 가지게 되면 언젠간 상처받는다. 이진은 윈올에 참가하면서 삶의 규칙을 하나하나 재정립하고 있었지만 스며들듯 친해진 것들과의 이별만큼은 여전히 견뎌 내기 힘들었다. 차라리 거리를 두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이 공간을 그리워하는 건지, 함께 추억을 쌓은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건지. 이진의 선을 흐려 놓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책임지지 않고 떠나 버린다.
이진은 자신이 없는 공간에서 저들만의 승리를 만끽하며 하하, 호호 웃고 있을 룸메이트들을 생각하자 속이 타들어 갔다. 더 이상 이진은 그들의 즐거움에 필수 요소가 아닌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든 공간은 마지막 순간, 외로움으로 남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