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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57화 (57/173)

57화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이진이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수히 많은 패러디 영상을 양산해 내며 발 연기의 대가로 손꼽히는 모 배우가 온다고 해도 지금의 이진보다는 자연스러운 동작을 구사할 것 같았다.

“형?”

역시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어색한 솜씨로 머리를 쓰다듬어진 우진이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더니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옆에서 채일이 대체 뭐 하고 노는 거냐고 구시렁댔다.

그때 리허설을 막 마친 승현의 팀이 무대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스텝이 그들을 인도하는 방향이 이진 팀이 머무르는 위치와는 조금 멀어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상대 쪽에서도 이쪽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등 아는 체를 했다.

이진은 자연스럽게 승현과 가장 먼저 시선을 교환했다. 저번에 승현이 자신의 질투를 인정한 날로부터 미열이나 찬우를 먼저 보면 자꾸 째려보는 통에 그를 가장 먼저 찾도록 학습되어 버렸다.

그런데 승현은 또 뭐가 불만인지 이진이 가장 먼저 그를 바라보고 눈인사를 했는데도 인상을 팍 찌푸리고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이진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다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더니 뭐라고 뻐끔거렸다.

‘뭐라는 거야?’

이진은 어두운 조명 탓에 입 모양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다리를 들고 포인과 플렉스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승현이 찌푸린 인상을 확 풀고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표정으로만 웃는 게 아닌지 곁에서 나란히 걷던 미열이 그를 돌아봤다. 왜 웃는지는 몰라도 이진은 자신이 승현을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형……. 손, 손.”

우진이 조금 빨개진 얼굴을 하고 이진에게 속삭였다. 이진은 그제야 제 손이 아직도 우진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라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승현과 대화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동작이 자연스러워진 건지 반쯤 어깨동무를 한 상태였다.

“아. 미안해.”

“아니에요!”

민망해진 이진은 하하 웃으며 작은 등을 두 번 토닥이고 팔을 내렸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원치 않게 부끄러운 상황을 자꾸 마주하게 됐다. 이런 것도 자주 마주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건지 전처럼 죽을 만큼 쪽팔리진 않았다.

무대 반대편에서 ‘으쌰, 으쌰’ 하며 다 같이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는 팀이 있었다. 무대 조명을 받은 윌리엄과 찬우의 얼굴이 보였다. 새 팀에서도 윌리엄은 시도 때도 없이 구호를 외치자고 손을 뻗는 모양이었다.

이진은 요 근래 팀원들끼리 식사를 했고, 찬우는 은근히 남의 얘기를 잘 하지 않아서 룸메이트를 제외한 전 팀 멤버들의 근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도 아마 그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목격하자 참 생소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에서 손을 모으고 있던 이진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새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와, 우리도 화이팅할까?”

“미쳤냐?”

우진이 의욕적으로 말했지만 눈만 마주쳐도 한판 뜨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의 손을 한곳으로 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채일의 욕설에 우진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진은 다시금 채일이 정말 아이돌이 하고 싶은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은 시청자에게 보여 주기 식이라도 담합을 다지는 행동을 하지 않나……?’

“와, 슬슬 방청객 분들 들어오시나 보네.”

“벌써?”

“지금 이거 리허설 끝나면 바로 본방이야.”

지호와 주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했다. 태원도 방청객이란 소리에 흥미가 가는지 고개를 쭉 빼고 멀리를 내다봤다. 이진은 화려한 조명을 내뿜는 무대를 올려다봤다. 한때는 평생 오르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이진은 다시 이 자리에 섰다.

멍하니 먼 곳을 보는 이진의 시선을 따라간 채일이 감상에 젖어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네.”

“그러게.”

믿음직스럽진 못해도 이진의 곁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제멋대로에 툭하면 싸우고, 실력은 들쭉날쭉, 연습은 붙잡아 두고 시켜야 시늉이나 하는 정도지만 그들은 어디로 도망가거나 사라지지 않고 서로의 곁을 지켰다.

이진은 지금 끝없이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자신감, 동료애, 소속감.

“대기실로 이동하실게요!”

‘칠색찬란’이었다가 엑스 자를 치고 ‘복고복고’로 새로 적은 팀 팻말을 든 스텝이 손짓을 하며 그들을 불렀다.

대기실에서 진행하는 간단한 인터뷰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본 무대에 오르게 된다. 체감상 길게 느껴졌던 촉박한 준비 기간이 끝나고 2라운드의 막이 올랐다.

***

디스코 사운드가 경쾌하게 흘러나오면 그때부터가 무대 시작이었다.

센터인 채일이 동그랗게 주먹을 쥐고 새끼손가락만 세워 잔을 든 듯한 손동작을 취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짝다리를 짚은 채 건들건들 박자를 타던 그가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이어서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고 마시는 시늉을 하자, 그를 등지고 있던 멤버들이 두 명씩 차례대로 뒤돌며 잔을 쥐고 마시는 동작을 반복했다.

역삼각형 대열을 유지하며 7명이 관중석 쪽으로 세 발짝 똑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 전주에 현대적인 스타일의 EDM이 깔렸다. 마치 클럽 무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멤버들이 각자 다른 동작으로 춤을 추며 대형을 천천히 일렬로 바꾸었다. 이진은 다음 파트를 위해 그 뒤로 숨었다.

“타오를 듯이 커져 가는 갈증.”

왼쪽 셋이 왼편으로 몸을 뉘이고 오른쪽 셋이 오른편으로 몸을 뉘이자 뒤에 숨어 있던 이진이 첫 소절을 내뱉었다. 따분한 표정으로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오며 슬쩍 미소 지었다. 원래는 점프를 하며 강렬한 인상을 심는 부분이었지만, 보컬까지 소화해야 하는 이진의 강력한 주장으로 다리를 슬쩍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 걸로 바뀌었다.

“꺄아악! 유이진!”

무대 앞, 관객석 근처까지 걸어갔을 즈음에 인이어를 뚫고 관객의 고함이 들려왔다. 하이톤의 목소리가 유독 거세게 다가왔다. 이진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다리를 쭉 뻗고 오른팔을 대각선 위로 치켜든 채 손목을 돌려 손가락을 튕겼다. 나머지 여섯 명도 뒤에서 같은 동작을 취했다.

“아무리 삼켜도 충족할 수 없는─”

“craving you, craving love!”

이진은 팔을 내리고 대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그토록 연습했던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으며 지그재그 대형 끝으로 이동하자 제일 앞에 선 지호와 수원이 파트를 넘겨받았다.

“이건 좀 위험해. 모두 알고 있지─”

“so why don’t we drink!”

요즘 트렌드보다는 조금 더 디스코풍에 가까운 음악에 맞춰 군무가 오고 간다. 원 안무를 기본으로 박자를 조금 바꾸고, 동작 사이사이에 골반을 튕기거나 사선으로 박수를 짝짝 치는 작은 변형이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시청자들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안무였다.

“craving juice─!”

주헌이 한 소절이라기도 애매한 한 단어를 외쳤다. 분위기를 띄우는 정도였다. 다시 두 마디 정도가 반복됐을 때쯤 이번에는 태원이 같은 단어를 뱉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내려와. 여기서부터 여기, 여기를 지나 여기까지.”

골반을 튕기는 웨이브를 추면서 손가락 끝을 세워 입술부터 배 중간까지 훑어 내렸다. 다른 팀이라면 몹시 섹시하게 연출할 법한 부분이었지만 발랄한 비트에 어깨를 들썩이니 성적인 코드가 많이 희석돼 귀여운 느낌이 강했다.

“마시고 삼켜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한 번 더 삼켜, 한입에 꿀꺽.”

꿀꺽, 액체를 삼키듯 하늘을 보고 뻗은 목에 고개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도로 뒤로 젖혀지면서 후렴구가 시작된다.

“넌 결코 모르지. 내가 왜 애타하는지. 나의 이 갈망은 꺼트릴 수 없을 거야─”

앞선 경연곡 ‘choose one’과 마찬가지로, 이번 곡도 후렴구에서 거의 한 옥타브가 높아지는 고음을 자랑했다. 이진은 원래 두 명에게 배분된 파트를 홀로 소화하며 무대를 이어 갔다. 이진의 파트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관객석에서 들리는 함성도 더욱 커졌다.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 가슴께로 가져오는 것처럼 두 팔을 모은 뒤 아래로 내리 눌렀다. 이진이 다리를 굽혀 몸을 숙이면 채일이 홀로 서 몸을 쓸어내리며 사랑에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듯 과장스럽게 괴로운 몸짓을 했다. 그러면서도 다리와 어깨는 디스코 박자에 맞춰 좌우로 덩실덩실 흔들렸다.

“until you love me.”

우진이 잠깐 거든 뒤 다시 이진의 파트가 시작됐다.

“네 사랑을 갈망해. craving your love! 조금씩 잠식되어 중독된 내 heart-beating이 들리니.”

이진은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어떻게든 폐를 쥐어짜 노래를 이어 갔다. 관객석의 함성은 이진의 파트가 많다는 반가움에서, 여기까지도 얘 파트냐는 놀라움, 그리고 아직도 안 끝났냐는 경악으로 변해 갔다.

템포가 빠르고 잔 움직임이 많은 무대를 흔들림 없이 소화해 내는 이진의 라이브 실력에 커다란 박수갈채가 따랐다.

“난 오늘도 마신다. this craving juice─!”

“네가 나에게 사랑을 줄 때까지.”

“꺼지지 않아, 나의 이 뜨거운 갈망!”

왼발과 오른발을 빠르게 내딛고 고개를 돌리며 강렬한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답답함을, 무릎을 굽혔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폭발할 듯 포효하는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도약한 높이나 거리는 다소 빠른 디스코 박자에 맞춰야 했기에 짧은 편이었다.

“please stop squeeze me!”

“난 오늘도 마신다. this craving juice.”

마지막에는 처음의 대형으로 돌아가 잔을 들고 무언가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무대를 끝냈다. 암울한 가사와 달리 무대는 마치 오렌지 주스 광고라도 본 것 같은 상큼함을 남겼다.

관객석에서 방청객들이 떠나갈 듯 거대한 환호성을 보냈다. 이진은 모자란 호흡을 보충하려 연신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꺼트리기를 반복했다.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띵하고 울려왔다. 이진이 몸을 위아래로 들썩일 때마다 함성 소리가 커졌다.

“유이진, 멋지다! 이진아, 사랑해!”

아까 공연 중 소리를 질렀던 관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진은 기합이 넘치는 팬의 목소리를 들으며 관객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진을 따라 다른 멤버들도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우진은 소심하게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고, 지호는 손가락을 맞물려 손가락 하트를 보냈다. 방청객들은 그들의 작은 손동작 하나에도 큰 환호를 보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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