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형.”
“미안, 미안…….”
이진이 우는소리로 사과했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가해자가 본인이니 미안하긴 한데 당장 눈앞의 고통이 너무 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게 왜 오지랖이야. 그냥 내버려 두지.’ 하고 좀 못된 생각도 들었다.
이진은 양다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끙끙대며 승현을 살피던 중 다시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간 이진이 보지 못했던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승현은 이진이 반항할 새도 없이 다가와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으악!”
침대 위로 퉁 하고 던져진 이진은 머리에 가해진 약간의 충격과 시야가 뒤집힌 혼란에 잠깐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었는데, 승현은 그 틈을 타 이진의 상체를 깔고 앉아 다리를 붙들었다.
“으아악! 하지 마!”
바로 터져 나온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승현은 묵묵히 이진의 발끝을 잡아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힉힉대는 거친 숨소리와 제발 그만해 달라는 비참한 애원이 잠시 들리다가 이내 멎었다. 뚜껑을 반만 열어 요란하게 끓어오르던 탄산수의 기포를 모조리 빼내어 버린 것처럼, 이진의 다리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안타깝게도 다리 주인은 그다지 멀쩡하지 않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경련은 제대로 풀어 주지 않으면 무대 할 때도 위험하니까.”
이진의 발작 같은 몸부림이 멎고 나서도 계속 다리를 주무르던 승현이 만족할 만큼 주물렀는지 몸통 위에서 내려왔다. 잠깐의 소동에 지친 이진이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확실히 저릿한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뭉친 근육을 풀어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진은 내 고통이 끝나고 나니 그제야 갑작스런 소란에 깨어나 응급 처치까지 해 준 승현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승현아…….”
자그마한 부름에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는 왼 뺨을 감싼 채였다.
“형. 저 여기 계속 아픈데 혹시 멍들었어요?”
승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렸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헉 소리를 냈다. 대망의 무대 당일 날, 승현의 광대에 주먹만 한 푸른색 멍이 들어 버렸다.
이진과 승현은 나란히 의무실로 향했다. 한 명은 얼굴에 멍을 매달고, 한 명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절뚝대며 들어오니 당직으로 의무실을 지키던 스태프가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승현과 이진은 차례로 고개를 꾸벅이곤 상대방의 볼과 다리를 가리키며 치료가 필요하다 말했다. 보통 의무실에 찾아오는 사람은 수면제나 진통제를 요구하거나 파스를 얻어 가는 게 전부라 스태프는 허둥대며 구석에 짱 박힌 의자 하나를 내왔다.
“제가 실수로 쳤는데요……. 혹시 고소당하나요?”
의자에 앉아 연고를 바르는 승현의 뒤에 선 이진이 물었다. 그 모습이 무척 심각하고 비장해서 사람이라도 한 명 찌르고 왔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나 말을 하는 본인은 꽤 진지했다.
참가자들을 소품 취급하는 제작진이 ‘계약된 연예인에게 피해를 입혔으니 배상을 하라‘고 나온다면 이진은 자신을 보호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이진은 연예계와 아주 근접한 곳에서 일을 했었기에 건너들은 업계의 황당한 소문들이 많았다. 승현의 성격이 나쁘다는 소문도 업계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사실이라며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저는 형 고소 안 할 건데요.”
“네가 안 해도 방송국에서 고소하면 어떡해.”
“아니, 예전에 무슨 사기 같은 거 당해 봤어요?”
승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소 때문에 광대가 살짝 올라가고 그 위에 발린 연고가 번들댔다. 푸른 멍은 보고만 있어도 아파 보였다.
‘엑스레이 찍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진은 실수로 떨어뜨려 금이 간 비싼 도자기를 쥐듯 승현의 머리를 부여잡고 쓰다듬으며 빨리 나으라는 기원을 보냈다. 갑자기 머리통을 잡힌 승현은 눈을 갸름하게 뜨고 목과 어깨에 힘을 줬다.
“……이대로 꺾어 버리려는 건 아니죠?”
“뭐? 내가 왜!”
“고소를 못 하도록.”
“그럼 빼도 박도 못 하고 살인죄로 잡혀가잖아. 여기 증인……도 계시는데.”
‘얼른 나으라고 빌어 준 건데…….’
승현이 부당한 혐의를 뒤집어씌워 억울해진 이진이 발끈하며 변명했다. 이진의 불안한 눈초리를 받은 스태프는 구급품 상자에서 대형 밴드를 찾다가 흠칫 굳어졌다.
“목을 꺾는다고만 했는데…… 아예 죽여 버릴 작정이었던 거예요? 한 방에 깔끔하게?”
승현은 이진이 울컥하거나 말거나 두려운 시늉을 하며 이진을 놀렸다. 그는 못된 말을 내뱉는 저 목구멍을 정말로 졸라서 막아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두 사람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라면 이 순간 이진은 승현의 목을 조르고 위아래로 흔들며 분노를 표출하고, 이진의 분노를 정통으로 받은 승현은 기침만 두어 번 하고 멀쩡히 돌아올 거다.
‘정말 애니메이션이라면 승현이 뺨에 든 멍도 다음 장면에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형 밴드를 찾은 스텝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푸른 멍을 갈색 밴드로 덮었다. 자세히 보면 주위 피부색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대충 봤을 땐 밴드가 눈에 너무 띄어 저 밑에 가려진 게 무슨 상처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다.
“너 그러니까 진짜 반항아 같다.”
“반항은 형이 했는데 왜 내가 반항아 같아지지.”
“왜, 순정 만화 반항아 남자 주인공이 맨날 거기에 밴드 붙이잖아.”
“만화를 너무 많이 본거 아니에요? 의왼데? 형 만화 좋아해요?”
승현이 뜻밖에 발견한 의외의 구석을 질문했다. 만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어릴 적, 좁은 집 안이 답답해서 청소년 복지 센터를 다녔는데 청소년을 위해 마련된 책장 한편에 꽂힌 만화들을 시간 때우기 위해 읽었을 뿐이었다.
“왜 맨날 거기에 상처를 내고 돌아다니나 했는데, 너 한 번에 나가떨어진 거 보니 알겠다.”
“걔네도 나름 싸움 전문가니까 선 빵을 날릴 위치가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나 보죠.”
이진은 얼굴을 얻어맞고 풀썩 나가떨어진 나약한 승현과 그 직후 자신을 냅다 들어 침대에 내팽개친 무서운 승현을 차례로 떠올렸다. 둘 모두 평소의 태평한 모습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아니 근데, 입으로는 미안하다 해 놓고 속으로는 아닌가 보네.”
“진짜 미안하대도…….”
승현은 의식하지 않아도 눈이 절로 향하는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으나, 장난칠 때가 아닌 평소에는 눈도 반만 뜨고 다니고 맨날 시큰둥해 있어 굳이 꼽자면 얼굴보다는 길쭉한 팔다리나 늘씬하고 탄탄한 몸 쪽이 더 매력적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는 비슷한 체격을 가진 남자들 틈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유달리 몸태가 예뻤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멍청한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고 흉흉한 눈을 잡아먹을 듯이 빛내며 다가오는 그 순간, 이진은 여태까지의 생각을 뒤집어야 했다. 당시에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혼란에 빠진 데다 승현에게 붙잡혀 경련이 난 다리를 마구잡이로 주무름당한 탓에 깊이 생각할 수 없었지만 곱씹어 볼수록 그랬다.
이진은 그때 승현에게 열광하던 팬들이 이 ‘멍청하고, 착하고, 귀찮은’ 자식을 왜, 어떤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으나 격렬하게 요동치며 전신을 마비시킨 감각을 뚜렷이 기억했다.
‘이 자식 밥줄이 그거였구만.’
사람을 매료시키고 홀리게 만드는 능력. 카리스마라고 하던가? 잘은 몰라도 이진은 가지지 못한 힘이었다.
‘부러워라…….’
승현의 얼굴을 관찰하다 넋을 놓고 있었더니 머리와 턱에 붙어 있던 양손이 어느새 내려가 그의 목덜미에 안착해 있었다. 이진은 승현과 자신의 관계에 썩 적절하지 않은 본인 과실의 접촉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르는 척 손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그러고 보니 방금 머리를 덥석 잡았던 것도 적절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과거의 유이진에게 보여 주면 충격받아 졸도할 만한 행동이었다. 아마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갑자기 피어오르는 불편함에 승현에게서 눈을 돌리자 계속해서 구급상자를 정리하던 스태프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구급함을 뒤적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둘을 약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진은 막상 당사자인 승현은 아무렇지 않아도 역시 방금 두 사람의 자세가 남들에겐 이상해 보였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파스 아직 멀었어요?”
승현이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말투로 재촉을 했다. 스텝은 더듬대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 다시 손을 바삐 움직였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승현이 이진의 등을 떠밀어 의자에 앉혔다.
“형, 포인이랑 플렉스가 뭔지 알아요?”
이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닷없이 지식을 뽐내겠다는 건지, 영문 모를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승현은 잘난 척 설교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이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발끝을 쥐고 근육이 당기게끔 앞으로 쭉 잡아 눌렀다.
“이게 포인이고.”
이번엔 발끝을 몸 쪽으로 밀었다.
“이게 플렉스예요.”
승현이 손을 떼고 이진을 보며 말했다.
“포인.”
이진은 어리둥절 발끝에 힘을 줘 멀리 뻗었다.
“플렉스.”
발등과 발목이 직각을 만들도록 잡아당겼다. 안 쓰던 근육들이 찌릿찌릿 자극됐다.
“잘하네.”
승현이 마치 강아지를 칭찬하듯 이진의 발을 쓰다듬었다. 이진은 승현을 발로 찰까 고민하다가 아직 얼굴에 바른 연고도 채 마르기 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참으려 노력했다.
이진은 파스 냄새를 풀풀 풍기며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사소한 일에도 방방대는 우진은 물론이고, 까칠한 채일과 무신경한 태원도 기웃대며 컨디션을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해 주곤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았다.
인터뷰를 요구하며 수시로 따라붙는 카메라에게도 적당히 대꾸를 하고 정신없이 리허설을 마치자 어느덧 본 무대가 코앞이었다.
저번 무대 직전에는 승현과 언성을 높이고 싸웠었는데, 오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마다 승현이 입 모양으로 포인이니 플렉스인지를 뻐끔거려서 반사적으로 스트레칭을 많이 해 버렸다. 이진은 내색은 않았지만 새삼 그 변화가 기꺼웠다.
많은 사건 사고와 고민, 평생 피해 오기만 했던 경험들이 스스로의 다짐, 사람들과의 관계, 사소한 마음가짐을 조금씩 바꿔 지금의 변화를 만들었다.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작은 차이들이었지만,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어느덧 우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되었듯 이진의 깊은 곳에 뿌리내린 부정적인 감정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 보았다.
“형, 청바지 너무 잘 어울린다. 심금을 울리는 청청 패션이라고 기사 하나 뜨겠다!”
우진이 쓸데없는 호들갑을 떨며 이진에게 다가왔다. 옷을 갈아입은 지 몇 시간은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은 그가 관심을 받으려고 이리저리 치대던 초반의 승현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우진은 처음부터 이진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왔었다. 비록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당황시키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관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행동임이 확실했다. 조금은 너그럽게 이해해 줘도 좋았을 터다.
사람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발전하는 동물이다. 이진은 조금 늦었을지언정 이번에는 승현의 경우처럼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