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55화 (55/173)

55화

비슷한 날들이 반복됐다. 내용만 조금씩 다를 뿐 식사와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적어도 열두 시간씩은 반드시 단체로 연습했다.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방까지 찾아가 끌고 나왔다. 안무와 대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나자 남은 건 보컬이었다.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해야 했기에 이진은 팀원들에게 라이브 테크닉을 전수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7일 차, 멘토와 참가자들 앞에서 컨셉 무대를 선보였다.

“컨셉에 따른 밸런스 유지가 잘 되고는 있는데 막상 눈에 띄는 퍼포먼스가 적어 아쉽네요.”

멘토들의 종합 평가였다. 이는 이진도 채일도 잘 아는 문제였지만 도무지 여기서 새로운 파트를 추가할 수가 없었다. 멘토들도 이미 그 점을 이해하고 있는지 컨셉 소화력을 조금 더 키우자는 조언을 했다.

칠색 팔색 팀은 심사 위원 점수 100점 만점에 80점을 받았다. 다른 팀과 비교했을 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점수였다.

“그나저나 유이진 씨가 편곡을 전부 했다고요?”

“아, 네.”

“나쁘지 않은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전문가 수준이에요. 과감한 시도가 아주 좋아요. 노래가 컨셉을 확 잡고 들어가니까 퍼포먼스의 완성도 문제를 커버할 수 있었어요.”

멘토 은범이 내려가려는 팀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 그는 윈올과 비슷한 포맷이나 규모가 작은 오디션 프로들에서도 멘토로 활약한 바 있는 인물로 본디 5인조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으나 몇 년 전 그룹은 해체되었다. 그 후 홀로 살아남아 후배 양성에 힘을 쓰고 있었다.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일주일 뒤 공방 때는 동선 이동이나 군무 파트가 하나하나 잘 맞도록 노력해 보세요. 발끝 딱 맞추고, 손 뻗을 때도 팔 각도, 손가락 모양, 이런 거 하나까지 맞춰 놔야 본 무대 때 그 근처까지 갈 수 있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특히 난 못해, 난 안 될 거야. 이런 마인드 전부 버려야 해요. 안 그럼 ‘아, 얘가 적당히 하는구나, 얘가 죽을 듯이 했구나,’ 무대 할 때  눈에 훤히 보여요. 완벽하게 못하면 죽는다, 이런 생각으로 덤벼요. 그런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

그는 다소 신랄하게 지적하며 평을 마쳤다. 이진이 고개를 돌려 멤버들을 바라봤다. 까마득히 유명한 업계 선배의 일침은 채일이나 이진의 잔소리와는 다르게 충격적이었는지 다들 뻣뻣이 굳은 표정이었다.

“방송이라 좀 자극적이게 말씀하신 걸 거야.”

“좋겠네, 형은. 본인한테 한 말 아닌 거 아니까 태평한 소리나 하고. 오히려 우리 욕해 줘서 속 시원하지?”

주헌의 날카로운 말은 이번에도 이진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진은 마음이 아프다고 뒤돌아 도망칠 만큼 약하지 않았다.

“속 시원해한다고 네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시원하겠어? 우리가 같은 배에 탄 거 아직도 이해 못 해?”

이진 혼자 백날 잘해 봤자 그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그 규칙을 알기에 주헌도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이기만 하고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멘토들의 도움과 전문 인력의 투입하에 일주일간은 본격적인 무대 준비만 했다.

공정성을 위해 이미 준비된 무대에서 많은 것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사소한 타이밍에서부터 손짓, 눈빛의 변화만으로도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진은 멘토와 트레이너가 집중 관리를 시작해 연습이 좀 더 체계적으로 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진은 제작진과 무대 연출적인 논의를 하고, 우진과 프로모션 영상을 찍고, 사소한 개인인터뷰를 하고, 예고편용 촬영을 하고, 연습실로 돌아가 개인 연습을 하는 팀원들을 두고 보컬 파트를 연습했다. 너무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나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1라운드에서 비슷한 일을 겪어 본 덕인지 영혼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순위 발표식과 비하인드 신, 1라운드 음악 방송의 무대 뒤, 합숙 이후 휴식기 동안 주야장천 찍어 댔던 사소한 게임’ 영상들이 편집된 4화가 방영됐다.

공식적으로 참가자들의 4화 본방송의 시청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5화의 예고편만큼은 참가자들의 사기 증진을 위해 다 함께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We are going to start the round2.

검은 화면 위로 음산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2라운드에 여러분이 공연하게 될 곡은 승리를 향한 갈망을 주제로 한 곡입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각 조의 컨셉 무대 영상이 오버랩 됐다. ‘사랑을 갈망해. craving your love.’ 후렴구를 부르는 보컬들의 목소리가 한데 편집되어 합창처럼 들렸다.

-여러분이 이번 무대에서 무엇을 노래하나요?

목소리의 질문에 11명의 리더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며 컨셉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 경호원 컨셉인 찬우는 ‘희생’을, 풋풋한 컨셉인 하늘은 ‘순수’를 말했다.

-어, 얼? 하, 한민족의 얼…….

진지한 표정을 짓던 재규가 순식간에 어벙한 얼굴로 바뀌더니 크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재규는 동양풍 컨셉을 했다. 동물 귀 컨셉을 한 제이슨은 ‘야생’을 노래한다고 대답했는데 영상에서는 뒤에서 대기하던 재규가 “동물 보호!”를 외치고 가는 장면까지 편집되었다.

-제가 이번 무대에서 노래하게 될 것은, 자유입니다.

반항 컨셉인 승현이 그렇게 말하고 볼을 긁적였다.

-추억을 노래합니다.

비록 태어나지 않은 시절의 추억이지만, 이진은 그렇게 답했다. 새 경연곡의 마지막 부분을 편집한 영상을 끝으로 예고편이 종료되었다.

무대 하루 전은 의상을 맞췄다. 맞춤은 아니고 무대 의상 전문 의상실에 방문해 입고 싶은 옷을 고르거나 의상 실장과 코디, 무대 감독과 함께 상의했다.

“이건 어때?”

“천하의 유이진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게 패션 센스일 줄이야.”

이진은 스팽글이 잔뜩 달린 반짝이 정장을 가져왔는데 모두의 야유를 받으며 후보 탈락했다. 최종적으로는 80년대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스타일 유형을 정해 개성을 살린 의상이 채택되었다.

이진과 태원은 셔츠와 청재킷을, 우진은 야구 점퍼를, 채일은 민소매를, 지호는 가죽 재킷을, 수원과 주헌은 스타일이 다른 반팔을 입게 되었다. 코디네이터와 의상 실장이 청바지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각자 어울리는 옷을 입기로 합의를 봤다.

“이진이 형 체크 셔츠 잘 어울린다.”

새빨간 반팔 티 위로 흰 야구 점퍼를 입은 우진이 이진의 붉은 체크 셔츠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이진은 너도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다가 어쩐지 민망해져 입을 다물었다.

“형은 다리가 예뻐서 면바지 핏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청청의 약간 촌스러운 감도 잘 소화할 것 같아서 그것도 보고 싶다.”

“그, 그래?”

우진은 이진이 칭찬을 돌려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고 면바지가 좋을지 청바지가 좋을지에 대해 떠들었다. 이진은 왠지 미안해져 주머니를 뒤적여 초콜릿을 찾았으나 얼마 전 현금을 전부 사용한 이후로 주머니 속이 텅 비어 버렸기에 아무것도 건넬 수 없었다.

의상 세팅을 끝내고 연습실로 돌아왔을 때 연습실 문 어딘가가 달라져 있었다. 이진이 문을 열다 말고 멈추자 뒤를 따라오던 팀원들이 고개를 쭉 빼며 앞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 누가 이랬지?”

우진이 큰 목소리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첫날 이진이 정성스럽게 쓴 칠색찬란 문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웬 종이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새 종이에는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복고복고^^♡]라고 적혀 있었다. 차례로 글씨를 확인한 팀원들이 제각기 요상한 소리를 내며 놀람과 황당함을 표했다.

“누구야?”

“우리 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백미열인가?”

“이게 남의 이름을 막 부르네?”

지호의 추측에 복도를 지나가던 미열이 소리쳤다. 채일과 주헌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뭐…… 이거나 저거나.”

이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가는 바람에 결국 범인은 찾지 못하고 칠색찬란 팀은 복고복고 팀으로 개명되고 말았다.

***

대망의 무대 당일이 밝았다. 어제는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찍 해산해서 이진은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 기분이 좋았다. 뭐, 드디어 이 팀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잠을 설쳤어도 기분은 좋았을 것 같았다.

이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빙글 굴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개운한 머릿속으로는 오늘 아침 동선을 착착 계획하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바닥을 디딘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닿았는지도 몰랐는데…… 그대로 미끄러져 버렸다. 단단한 어딘가에 무릎을 찧고 곧이어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을 허우적대다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밑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어……?”

떨어진 이후에도 다리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골반 아래 다리가 똑바로 달려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진은 더듬더듬 종아리를 만져 봤다. 피부마저 마비됐는지 촉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형?”

요란한 소리에 벌떡 일어난 승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바닥에 주저앉은 이진을 내려다봤다. 승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발끝에서 작은 기포가 터지듯 자글대는 감각이 서서히 몰려왔다. 이진은 멍하니 승현을 올려다보다가 점점 거세지는 자극에 “윽!” 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켜쥐었다. 방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모든 감각이 살아나 아우성쳤다.

“흐윽!”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목구멍까지 올라온 신음이 의지를 배반한 채 새어 나왔다. 그러나 송곳으로 근육 섬유질 한 가닥 한 가닥을 모조리 찔러 대는 고통에, 그나마 소리를 참아 보려던 이성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달아나 버렸다. 바닥에 웅크린 이진에게선 강아지 앓는 소리가 났다.

“쥐났어요?”

승현이 후다닥 다가와 바닥에 널브러진 상체를 부축하더니 이진이 양팔로 감싸 쥔 다리를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끓는 기름에 던져진 튀김처럼 잡힌 부분부터 지글지글 고통이 몰려왔다. 펄쩍 뛰며 비명을 내질렀다.

“건드리지 마!”

“근육을 풀어 줘야…….”

“하, 하지 마!”

이진이 승현의 팔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렸다. 격렬한 거부에 승현은 물러설 틈도 찾지 못하고 주먹에 몇 대 얻어맞았다. 도망가려고 해도 이진이 팔목을 그러쥔 자세로 몸을 굳히고 있어 불가능했다. 딱히 인지하고 한 행동은 아닌지 간절한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형. 형, 잠깐!”

“아, 아아…….”

잠깐 동안 두 사람 모두 원치 않는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승현이 제 손을 잡은 이진의 손을 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이진의 팔꿈치가 승현의 광대를 무자비하게 날렸다.

뻐억! 요란한 소리가 이진의 괴로운 신음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이진은 뺨을 감싸 쥐고 쓰러진 승현을 발견하고서야 꼭 붙든 손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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