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진, 이진 씨한테 너무 미안하고, 킁…….
-뭐가 미안해요?
-도움을 못 줘서……. 저는, 형이 작업실 간 거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찬우 형…… 흐윽, 한테…….
우진의 얼굴이 위아래로 찌그러진다 싶더니 화면이 바뀌고 지호가 나왔다. 지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뒀다.
-우리 모두 데뷔하고 싶은 마음은 같은데 실력이 부족하다고 열정이 부족한 사람 취급받는 건 조금 당황스러웠죠. 사실 저는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연락을 받아서 연습할 정신이 없었거든요.
채일이 다시 나왔다. 채일은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냥 제가 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이진은 아무 표정 없이 팔을 뻗어 작가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그러자 작가가 질문을 시작했다.
“어제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진도 그들처럼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해야 하는 걸까.
질문을 듣는 순간의 반응마저 카메라에 담긴다.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과 침묵하는 몇 초가 이진의 심정을 대변할 터였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지금의 씁쓸한 감정만은 숨길 수 없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당황스러워서…….”
“팀원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요?”
“그것도 잘…….”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 이진의 대답은 계속 회피조였다. 비슷한 내용을 말만 바꾼 질문이 여러 번 이어졌지만 이진은 한결같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지쳐 보이는 표정에 작가는 일부러 질문지에 적힌 공격적인 질문들을 피해 갔다.
인터뷰가 진행되며, 이진은 머릿속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질문의 답을 어렴풋한 형태로나마 붙잡은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팀원들의 영상과 자신을 향한 질문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수위가 다른 문답.
“그럼,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을까요?”
“아뇨. 죄송합니다.”
방을 나서는 이진을 배웅하며 작가가 말을 걸었다.
“이진 씨, 이번 라운드에서는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가정사라도 꺼내요. 지호 씨 봤죠? 사람들은 실력 좋고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해요.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실력이나 노력이 비슷해질 때쯤 되면 느껴질 거예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말에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진은 제 입으로는 절대 불행한 과거를 꺼낼 수 없음을 알았다.
수십 번, 수백 번 누군가에게라도 솔직히 털어놓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그가 겪은 일은 단 한 번도 음성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상처가 너무 깊어서 건드리지도 못했고, 그다음은 습관처럼 외면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단단히 굳어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어느 정도 곁에 있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방송에서 꺼낸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막연히 제작진이 어떻게 해서든 이진의 상처를 헤집고 말거라는 예감은 들었다.
***
연습실에 일찍부터 모두가 모여 있었다. 이진이 오기 전에 미리 얘기라도 된 듯 아무도 어색한 표정으로 웃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진은 일부러 그를 걱정하는 이들을 떼어 놓고 연습실까지 가는 길을 홀로 걸었다. 늘 걷던 복도는 유난히 차갑고 적막했다.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이진을 약하게 만들었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들은 미래가 불투명한 인연이었다. 이대로라면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나약해진 이진은 혼자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 것이다. 어제처럼 그를 위로해 줄 사람들 품으로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처음부터 홀로 나섰다.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들자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이진은 조용히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걸음이 멈추고 나지막한 한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이진은 짧게 안도했다. 다행히 전처럼 세상이 뒤집힐 듯이 어지럽거나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2라운드 무대까지 며칠 안 남았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았어.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중요한 건…….”
천천히 조곤조곤 말을 시작했다. 어제처럼 흥분에 젖어 남을 상처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진의 진심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했을 말이었다.
잘못 꿴 단추를 풀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때 해야만 했던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진이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리고 만다.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모두를 포용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했다.
“단 한 번의 무대라도 후회가 없도록 하자. 미래에 더는 이 길을 걷지 않게 되더라도 이 무대만은 기억 속에 남아 있도록, 미련이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하자.”
가식과 진실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나를 매력적으로 포장하면서 화려한 겉껍데기에 내용물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 정도를 교묘히 찾아내는 것. 혹은 본능적으로 그 경계를 인지하는 것. 이진은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스타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환경은 경계를 극대화하는 장치이며 제작진들은 그 장치를 가장 요령껏 다루는 사람들이다. 참가자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고군분투하는 꼴을 구경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겨 내는 것이 주인공을 만드는 극단적인 길임을 아는 것이다.
그들이 만드는 풍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진은 당장 눈앞의 문젯거리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까의 인터뷰로 당분간 제작진이 그에게 불리한 편집은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아직 팬덤이 온전히 자리 잡지 않은 지금, 상위권 참가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야 팬덤과 참가자 모두의 충성도가 올릴 수 있었다. 이런 간단한 계산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물론 하위권 참가자가 사라지는 방송의 중반부터는 시청률을 위해 먹잇감을 하나 잡아 몰이 사냥하듯 자폭시킬지도 모르고 또 그 먹잇감이 이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는 이 틈을 타 온건한 방법이든 과격한 수단이든 전부 동원해서 팀원들이 자신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어제 간단히 촬영한 건데, 한번 봐 봐.”
채일이 수정된 안무를 촬영한 영상을 가져왔다. 영상은 이진이 작업한 곡에 맞게 조금씩 수정이 들어갔는데 확실히 어울리는 음악이 깔리니 과하거나 어색해 보이던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이진은 컨셉에 따라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던 자신의 음악들을 떠올렸다. 이런 과정을 지켜봤더라면 작곡가라는 직업에 더 정을 붙일 수 있었을까.
이진은 다시금 퍼포머의 길을 걷는 중이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문득 그 시절 자신이 무엇 때문에 모든 경험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는지, 흘려보낸 것들 중에 떠나보내선 안 됐던 소중한 것은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지만.
이진은 영상을 구간별로 나눠 재생하며 팀원 모두가 폼이 그럴싸하게 나올 때까지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찬우가 알려 준 방법이었다. 동작을 아주 섬세하게 쪼개 이해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동작 이해도가 부족해 아무리 천천히 시범을 보여 줘도 나아지지 않던 수원은 아예 팔다리를 직접 잡고 자세를 하나하나 잡아 주자 제법 그럴싸한 춤을 췄다. 항상 구경만 하던 태원이 아예 수원을 전담 마크하면서 시간이 덜 지체되었다. 우진도 한 사람 몫은 해 주었다.
문제는 주헌이었는데, 그는 외우지 못한 동작을 제 마음대로 변형해 좋을 대로 춰 대는 바람에 이를 지적한 채일과 계속 마찰이 있었다. 바로 어제 이러한 태도 때문에 사달이 났었는데도 주헌은 한결같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몇 차례 벌어진 말싸움을 지켜보던 이진은 결국 영상을 멈추고 주헌을 불렀다.
“주헌아, 네 눈에는 그거랑 이게 같은 동작으로 보이니?”
“개선 여지가 있으면…….”
“주헌아.”
다시금 이름이 불린 주헌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진을 살폈다.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온화하지만 찍어 누르는 듯한 말투에 반박할 새가 없었다. 이진이 한 번 더 물었다.
“같은 동작으로 보여?”
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연한 이진의 표정이 반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진은 주헌을 더 자극하지 않고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이진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굳어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움직이자 들키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헌 같은 성격에게는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는 미열의 조언대로 그에게 면박을 줬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잘못을 낱낱이 고해 회개시키는 것과 발밑에 꿇어앉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뭐야? 지호 형 왜 이렇게 금방 늘어?
“내가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
지호는 애초에 연습량이 부족했던 게 문제였는지 강제로 연습에 참여시키자 막힘없이 곧잘 따라왔다. 그는 실력이 느는 것보다는 다 같이 춤을 추는 것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그날 이후 이진은 팀의 집중 관리를 위해 식사도 다 같이 하러 갔고 쉬는 시간도 동시에 가졌다. 연습은 큰 소란 없이 착착 진행됐다. 팀원 개개인이 그의 방식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이 팀이 붕괴하지 않을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각자 눈치껏 협조하고 있었다.
강압에 의해서라도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자 안무 완성도는 고작 하루 연습한 것치고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드디어 안무를 전부 외우고 대형 연습에 들어갈 때, 이진은 감격받아 울고 싶어졌다. 그쯤 됐을 땐 벌써 열두 시간째 연습실에 박혀 쉴 새 없이 움직인 탓에 온몸에 체력이 고갈 나 이진을 비롯한 모두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
“얘들아, 오늘 수고했고 내일도 힘내자. 오늘 들어가서 바로 푹 쉬어.”
“형도 수고하셨어요.”
큰 동선을 숙지시킨 뒤 해산하고 나자 시계는 이진의 평균 취침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어 괴로웠다.
“형, 괜찮아요?”
“응…….”
“많이 힘들면 씻겨 줄까요?”
녹초가 되어 화장실 문을 붙들고 주저앉은 이진을 본 승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나 너무 피곤한데 찝찝해.”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오자 당황한 승현이 말을 버벅거렸다. 그러나 곧 뱉은 말은 지키겠다며 비장한 표정을 하고 일어섰다. 때마침 깨어 있던 미열과 찬우가 베개를 던지지 않았다면 승현은 다음 날 정신을 차린 이진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대신 머리를 대신 말려 주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승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침대에 누운 이진을 홀랑 뒤집어 어깨와 목을 주물러 줬다.
“끄응…….”
“형, 시원해요?”
“으응.”
키만큼이나 큰 손 덕택에 한 번 살을 잡는 면적이 넓어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시원했다. 승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진을 도로 똑바로 눕힌 뒤 이불을 목 위로 덮었다. 연습한 시간 자체는 비슷할 텐데 체력이 남아도는지, 승현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는 미열의 침대 위로도 올라가 마사지 서비스를 베풀었다. 이진은 미열이 낑낑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