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야말로 물어볼게. 너희가 여기서 하는 게 뭐야?”
늘 말끝을 흐리며 부드럽지만 다소 유약한 말투를 사용하던 이진이 차갑게 굳은 목소리를 내자 기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 주헌에게 말을 가로채였던 그였는데, 지금의 목소리는 감히 끼어들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뚜렷하고 분명한 권위가 서려 있었다.
“열심히 사는 애들 방해하는 거? 아니면 위아래 재면서 서열 놀이 하려고 온 거야? 혹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가까지 해 가면서 노력했는데 안 돼서 포기했다는 거창한 변명 거리라도 만드니? 처음부터 떨어지려고 참가한 거야?”
이진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며 선 여섯 명에게 차례로 시선을 맞추었다. 단어 하나를 뱉을 때마다 거친 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다 보니 간간이 억눌린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어조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이진의 태도는 평온해 보였다. 수천 번 외우고 수백 번 뱉어 본 대사를 읊는 연극배우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남이 내 실력을 지적해서 자존심에 상처가 나면 다시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그딴 말이 못 나오도록 연습을 해야지. 당장 눈앞에 있는 입만 틀어막는다고 무슨 변화가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날 알아봐 주길 기다린다는 건 자만이야. 그러 식으로 사연 팔고 관심 구걸해서 데뷔해 봤자 팬들이 너희한테 준 관심은 동정일 뿐 절대 동경으로 변하지 않아. 그게 거지지, 아이돌이니?”
점점 고조되는 목소리에 누군가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물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희가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나는 몰라. 별로 관심도 없어.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각오해. 최소한 너희를 2라운드로 올려 보내 준 사람들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돼.”
이진이 시청자를 언급했을 때 다시 어딘가에서 울음을 참는 듯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전자파 소음이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연습실에 훌쩍임만이 간간히 울렸다. 힘겹게 말을 마친 이진도 이 이상 터져 나오는 격한 호흡을 참기가 힘들었다.
휴게실에서 승현과 말다툼을 한 수준이 아니었다. 모두가 모인 연습실에서 잘난 듯이 훈계를 해 버렸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는 몰라도 이 상황이 방송에 나갈 건 뻔했다.
“……내가 리더로서 부족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다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힘내자.”
이진은 방금 전 기세에 어울리지 않게 속삭이듯 말했다. 대단한 척 말했지만 이진은 자신도 그리 잘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고작 이틀 만에 이런 상황으로까지 흘러오리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안일했다. 이전 팀원들이 모두 능숙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었다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해선 안 됐는데.
이진은 마지막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작은 USB를 꺼내 연습실 구석에 위치한 스탠딩형 스피커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아까 편곡해 놓은 거야. 녹음은 못해서 MR뿐이긴 한데 연습하긴 훨씬 편할 거야. 오늘 좀 더 빨리 못 와서 미안해.”
이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문을 도로 열고 나갔다. 무겁던 발걸음은 연습실에서 멀어질수록 뛸 듯이 빨라졌다. 불안정한 호흡이 정신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애매한 흥분 상태를 겪은 몸은 더 소리 지르고 더 발산하라고 안달을 내는데, 이진의 이성은 이미 자괴감에 침몰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누군가 보는 앞에서 이 감정을 내비쳐선 안 된다는 강박 하나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삼켜 냈다.
“윽…….”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가가 불이라도 붙은 양 뜨겁고 잔뜩 힘을 준 턱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1004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이진은 불 꺼진 방에서 안도와 상실을 느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당연히 다른 팀은 한창 연습 중일 테니 아무도 없는 게 당연했다. 그게 오히려 익숙한데도 고작 며칠 위로하며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익숙해졌다고 이진이 느끼는 외로움의 형체는 더욱 뚜렷해졌다. 이곳에서조차 혼자라는 생각에 결국 참지 못한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었다. 잠깐만 속 시원하게 울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눈물에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이진은 모두가 돌아올 때까지 눈물을 흘릴 만큼 힘이 남아돌지 않았다.
이전에는 이렇게 소리 내서 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눈물은 사치라는 구절은 이진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은 아픔이 아픔인 줄 모르고 지나간다. 여태까지 그렇게 모든 상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물러진 감정이 그의 눈물샘도 같이 무르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끼익, 하고 익숙한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방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드리웠다.
“유이진? 이진이 안에 있어?”
찬우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가 이곳에 왜 나타난 건진 몰라도, 이진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아군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가 이내 쌓였던 서러움이 몰려왔다.
“이진아, 너…… 울어?”
눈물이 방울져 세상이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역광이 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실루엣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진은 자신을 상처 내고 싶어 안달 난 가시 돋힌 말을 듣다가 찬우의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자 더는 설움을 억누르지 못했다.
끝내 커다란 울음을 터트리자 눈앞에 다가온 형상이 망설임 없이 이진을 끌어안고 익숙하게 등을 토닥였다. 눈가가 그의 어깨에 닿아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고 옷으로 바로 흡수됐다. 상체를 빈틈없이 감싼 팔은 이진이 온전히 타인의 무게감과 체온에 기대어 쉴 수 있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 숨겨 둔 슬픔을 누군가에게 드러낸 적이 없는 만큼 이진은 일평생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아 보지도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종종 어머니의 품에 파고들어 눈물을 쏟아 내기도 했지만, 어느 날 무심결에 올려다본 어머니의 얼굴에서 피곤함 외엔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었던 이후부터 이진은 타인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차마 파고들 자리를 찾지 못했을 뿐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진은 그 품에 안겨 한동안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를 슬픔을 쏟아 냈다.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이진을 안은 두 팔은 지치지도 않고 규칙적으로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일 뿐이었다. 흔히 하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덕분에 이진은 마음껏 제 감정에 취할 수 있었다.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무렵, 찬우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진아, 괜찮아?”
그런데 찬우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리지 않고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들렸다. 그제야 이진은 고개를 파묻은 어깨에서 벗어나 한참이나 자신을 안고 있던 이의 면상을 확인했다.
“흑, 넌 뭐야…….”
이진이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어깨를 잔뜩 적실 때까지 그를 안아서 달래던 사람은, 다름 아닌 승현이었다. 이진은 뒤늦게 어쩐지 찬우치고는 손길이 자연스럽고 오두방정을 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승현은 아랑곳 않고 자연스럽게 뒷목을 눌러 이진의 머리를 반대쪽 어깨에 안착시켰다. 그리고 계속 어린애를 달래듯 토닥이길 반복했다. 승현이 숱하게 말하던 그의 어린 동생을 대하듯.
“다들 있어?”
이진이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승현을 밀어 냈을 즈음 미열이 들어왔다. 미열은 어두운 방 안을 지적하지 않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꽤 진정된 듯 보이는 이진의 곁에 승현과 찬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열은 그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우진이가 갑자기 들어와서 너 상태 안 좋다고 잠깐 봐 달라고 했거든. 나랑 승현이 둘 다 올라가긴 좀 그래서…….”
그래서 승현이 찬우를 불렀고, 이진이 괜찮은지 확인한 뒤 연락을 주기로 한 두 사람이 감감무소식이라 기다리다 지친 미열도 올라오게 되었다. 어둠에 가려 카메라에 찍히진 않겠지만 이진은 얼굴에는 아직도 붉은기가 남아 있었다. 옅은 빛에 의지해 얼굴을 확인한 미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미열은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말을 하다 말았다. 숙소 내부 카메라는 아침 기상 장면 외에 사생활을 침범할 만한 장면을 방송으로 내보내진 않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영상을 끊임없이 저장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진이 너,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울어?”
“……누가 우는데?”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느다랗게 쉬어 있었다. 미열은 끄응, 소리를 내며 말을 끌다가 침대 위에 앉은 승현의 발에 한 대 얻어맞고 입을 열었다.
“그냥 다 훌쩍대던데.”
“전부?”
“응.”
뭘 잘했다고 우는 건지는 몰라도 그 소식으로 이진은 눈물로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을 싹 청소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뜬금없어서.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아마 그들도 나름대로 억울한 부분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들 모두 이진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쉼 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진은 그런 것 하나하나를 고려하고 기다려 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너그러운 리더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할지언정 자리 깔고 앉아 그들의 사연을 들어 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시간이 있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진은 자신이 리더감이 아니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하루가 온전히 시작하기도 전에 개인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복도에 간단한 세트를 세워 두고 하던 전과 다르게 제대로 사방이 막힌 공간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진은 아침에는 지난 밤 행동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들이닥칠지 두려워 일어나기가 싫었는데, 막상 자신을 당장이라도 깨질 유리 인형처럼 다루는 제작진을 보자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싶어졌다. 사전에 교육이라도 받은 양 항상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제작진이 마치 길 잃은 어린애를 대하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굴자 그렇게 무력한 기분이 들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에 맞은편에 카메라맨과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방송 작가가 나란히 자리했다. 작가는 어제 촬영한 영상이라며 이진의 손에 태블릿을 쥐여 줬다. 한껏 인상을 쓴 채일이 이진과 같은 배경을 뒤로하고 질문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랑 주헌 씨랑 트러블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진 씨가 말려들었어요.
화면이 바뀌고 주헌의 얼굴이 나왔다. 주헌의 눈가에 마르지 않은 물기가 촉촉했다.
-사실 팀원들 불만이 좀 쌓이긴 했어요.
-누구한테요?
-리더 분한테요.
-어떤 면에서요?
-리더라는 자각이 없으시니까……. 팀에 중심이 잡히지가 않았죠.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착잡한 표정의 태원이었다.
-다 같이 즐겁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죠. 그래도 리더 형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직책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죠, 다들.
이번에는 수원이 나왔다.
-저도 제가 부족한 건 알지만, 잘하는 사람들끼리 전부 결정해 버리는 분위기라서 힘들었어요. 비록 순위가 낮다고 해도 저한테도 응원해 주시는 분이 계신데…….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던 수원은 한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다음으론 우진이 나왔다. 우진은 울지는 않았지만 계속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