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8배속 버튼을 누른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열에게서 온 전화에 무심코 시간을 확인한 이진은 누가 자신 몰래 시계를 돌려놓기라도 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사방이 세트장인 예능에 너무 오래 참가한 부작용처럼 언제 어디서든 스태프와 함께 몰래 카메라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진아, 왜 폰 안 봥.
“나 작업하고 있었어.”
-점심은?
“어…… 까먹었네.”
정말 삼시 세 끼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것 하나는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을 만큼 규칙적인 식습관을 가진 이진이지만, 생각에 잠기면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작곡가로서 스튜디오에 입사한 초기에는 종종 끼니를 거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이 이진을 데리고 나가거나 도시락을 사다 주곤 했는데 미열의 물음에 그때 기억이 물씬 샘솟았다.
-그럼 저녁 먹어야겠네. 식당으로 와.
“어…….”
이진은 조금만 더 만지면 마무리되는 작업 화면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감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작업이 모두 그렇듯 한번 흐름이 끊기면 아까까지 잘만 하던 작업을 순식간에 갈아엎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진아, 제발 와 줘……. 선승현이 나 잡아먹을 것 같아. 아까도 너 빼고 점심 먹으러 갔다고 죽일 것처럼 노려봤는데…… 너 점심 걸렀다는 소리 하면 얘가 나 멱살 잡는다, 진짜.
미열이 목소리를 죽이고 소곤댔다. 현재 승현과 함께인 모양이다. 이진은 승현이 극성맞은 부모처럼 자신을 챙기려 드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게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님은 알았다. 성격상 이진처럼 묘하게 겉도는 사람을 챙겨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타입이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30분만 있다가 가도 될까? 나 지금 막바지라서.”
-그래, 그럼. 혼자 작업하는 거야?
“응. 금방 갈게.”
갑자기 생긴 데드라인에 이진은 정신을 한껏 집중해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듣고 수정하고, 다시 듣고 또 수정하는 일의 반복이지만 이 작업이 곡의 디테일을 결정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했다. 특히 이진은 곡을 톱 라인까지만 짜고 넘겨주기만 해 봤지 그 반대의 경우는 스스로 미숙하다 생각했기에 평소보다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결국 미열에게 전화를 한 번 더 받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진은 모두가 바로 들어 볼 수 있도록 MP3로 내보낸 파일을 제작진이 준비해 둔 USB에 복사하고도 혹시 몰라 핸드폰으로도 한 번 더 전송했다. 컨셉에 맞게 수정된 노래로 연습을 하면 다들 더 의욕적이지 않을까, 애써 희망찬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같은 자세로 긴 시간 앉아 있었더니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풀며 식당으로 내려간 이진은 미열, 승현과 함께 식사를 하며 평화로운 기분으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템포가 원곡보다 훨씬 빨라져서 춤을 한 번만 춰도 너무 힘들어.”
“근육이 아직 덜 생겨서 그럴 거예요. 근력 운동도 같이 하면 좋아요.”
“연습할 땐 괜찮은데 노래에 맞춰서 출 때마다 자꾸 빼먹는 동작도 생기고…….”
“찬우한테 배우면 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가서 한번 물어보자.”
마음 편한 사람들과 함께 밥 한 끼 먹은 게 고작인데, 이진은 아침을 괴롭게 만들었던 막막함과 우울함이 조금씩 희석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분명한 호감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받는 위안은 상상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다.
이진은 훗날 자신이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건 모두 오늘의 기억들 덕분일 거라 생각했다.
“광고? 우리 팀은 나랑 승현이가 나가기로 했지. 뭐 우리는 하도 붙어 다니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너희는 좀 애매하긴 하다.”
서로의 등수가 비슷하니 다른 사람에겐 털어놓을 수 없는 말도 속 시원히 내뱉고 조언을 구할 수 있어 좋았다. 저녁 산책 겸 아무도 없는 건물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조용히 말을 꺼내자 두 사람도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이라 쉽게 말이 오갔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림이 제일 잘 나올 것 같은 이우진이랑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김태원이요.”
승현은 친한 사람이 없다면 외모라도 맞추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의견을 냈다. 미열도 내심 동감하는 눈치였다. 이어서 둘은 입을 모아 너무 채일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진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나오는 길에 비해 훨씬 발걸음이 가벼웠으나 이진의 손 글씨로 적힌 ‘칠색찬란’의 글씨가 또렷해질수록 다시 심장은 쿵쾅대고 발 보폭은 저도 모르게 작아졌다. 그는 같이 걷던 승현이나 미열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크게 들이킨 숨을 속으로 삼키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형, 잘 하고 와요.”
승현이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가 떼며 말했다. 살포시 닿았다 떨어진 온기가 이진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너희도 잘 해.”
“이따 보자.”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진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돌렸다. 부디 모두가 싸우지 않고 연습하고 있길.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불안한 상상이 제발 상상에 그치길. 그런 소망을 담아서 문을 열어젖혔다.
“야, 드디어 왔네.”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며 상황을 파악하는 이진의 신경을 가장 먼저 자극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롭게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근원을 찾았다.
“형, 뭐 하다가 이렇게 늦게 왔어? 형이 없으니까 괜히 임채일이 우리한테 신경질 내잖아!”
“왜 이진 형한테 시비야. 동생한테 춤 좀 배우는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해?”
“난 내 스타일이 있어서 그렇게 추겠다는데 강요하는 건 너잖아.”
주헌과 채일이 중앙에서 대치하고, 곤란한 표정을 한 태원과 지호가 각자 팔짱을 낀 채 두 사람 주위에 서 있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수원은 연습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우진은 둘 사이에 껴서 한쪽씩 어깨를 붙들고 싸움을 말리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이진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주헌이 우진의 팔을 뿌리치고 그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억울한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형. 형은 안무 다 외웠어?”
“어? 아직 완벽히는…….”
“봐. 유이진 씨도 채일이 네가 무섭게 가르쳐서 어디로 도망갔다 온 거잖아.”
주헌이 채일에게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다그쳤다. 상냥한 말투 속에 숨은 가시는 이진에게도 날카로운 첨단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진이 형, 형이 리더로서 교통정리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지호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목소리로 이진을 불렀다.
“누가 채일이한테 선생님처럼 굴어도 된다고 한 거야? 우리 아직 안무 수정 단계고 다 같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맞춰야 하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전부 픽스된 것처럼…….”
“그게 싫으면 어젯밤에 뭐라도 적어서 가지고 왔겠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두 손 놓고 있다가 맘에 안 든다고 엎으라고 하면 순순히 들어줄 줄 알았어? 방송이 장난이야?”
채일이 지호의 말에 끼어들었다. 지호와 주헌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어조만은 부드럽게 다듬었지만, 채일은 방송을 운운하면서도 연습실 어딘가에 붙어 있을 카메라는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듯 매섭게 쏘아 댔다. 날 선 일침에 구석에 선 수원이 움찔하고 움츠러들었다.
“우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주헌이 이번엔 우진을 지목했다. 우진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진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해 달라는 구조 요청이었다.
“잠깐만 다들, 너무 날이 섰는데 좀 진정하고…….”
“진정을 시킬 거면 한 시간은 더 전에 오셨어야죠. 진짜 어디 갔었어? 또 룸메들이랑 놀았어? 형…… 솔직히 말해 봐. 우리랑은 급이 안 맞아서 놀기 힘들어?”
주헌이 말을 끊고 빈정댔다. 우회적으로 인기 순위를 언급하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진을 향해 꽂혔다.
“에이, 뭐 말을 그렇게 해?”
지호가 이진을 옹호하는 척 말을 얹었다. 그러자 주헌이 바로 미안하다며 양손을 흔들었다.
“정리하자면 이거야. 채일이가 아무리 춤을 잘 춘다고 해도 리더는 형인데 쟤가 독단적으로 설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형이 지금 제대로 정리 좀 해 줘. 우리 안무랑 포지션을 어떻게 할 건지.”
“포지션은 이미 끝난 얘기잖아!”
“너한테나 끝난 얘기겠지.”
“이야…… 진짜 난장판이다.”
주헌의 말에 채일이 끼어들고 두 사람이 다시 말싸움을 시작하자 팔짱을 낀 채 방관하던 태원이 혼잣말치곤 큰 목소리를 냈다. 허공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왜? 이진 형이 가르쳐 주면 되잖아. 채일이 너, 아까 이진 형은 다 외워서 안 오는 거라면서?”
“외운 거랑 가르쳐 주는 게 같아? 남주헌 너는 전공을 했다는 자식이…….”
“그냥 형이 춰 보면 깔끔하게 끝나는 일 아니야?”
주헌과 지호가 은근히 화살을 이진에게 돌렸다. 이번엔 태원과 수원도 동조하는 눈치였다. 이진은 무의식중에 우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는 이진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래. 형, 보여 줘. 이래 봬도 5등인데 장난 없겠지.”
“형들 진짜 왜 리더 형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태원이 상황을 몰아가는 지호와 주헌을 말리는 듯 말했지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심지어는 채일도 이진이 혼자서 완벽히 연습한 성과를 보여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진은 채일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곡 작업을 하러 간 터라 그 수준에서 큰 발전은 없었다.
여섯 명의 눈동자가 한곳을 향했다. 이진은 그 시선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소멸해도 좋을 것 같았다. 모두가 그에게 한계 이상을 바랐다.
안타깝게도 이진은 모두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고, 모두와 하룻밤 만에 친해지는 친화력도 없었으며, 잠깐 가이드 안무를 본 것만으로 춤을 완벽히 터득할 만한 재능 또한 없었다. 이진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했을 뿐이다.
리더라는 직책을 떠맡았다고 할 수 없던 일을 한순간에 훌륭하게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건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변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진이 부족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 중 누군가는 그 때문에 탈락할지도 몰랐다. 이진은 결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뭐 해. 노래 틀어 줄까?”
주헌이 그의 어깨를 잡아 연습실 중앙으로 끌고 왔다. 이진이 고개를 들어 주헌을 바라봤다. 양아치 같은 행동으로 한순간의 쾌감을 즐기고자 하는 모습이 딱 나이만 먹고 정신은 성장하지 못한 성인의 표본이었다.
이건 화풀이에 불과했다. 한 명의 희생양을 찾고 싶은 유치하고 저속한 심리였고 그들이 공통으로 분노를 퍼부을 만한 대상에 우연히 이진이 걸려든 것뿐이었다.
선망의 대상이자 욕받이 인형이 되는 경험은 이진이 학창시절 내리 질리도록 겪어 온 일이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이들은 열등감을 통해 동류를 확인하고 타인을 배척하며 우월감을 느꼈다.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외모를 가졌으나 방패가 되어 줄 든든한 가족이 없는 이진은 너무도 손쉽게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들이 주로 꼬투리 잡던 건 가난과 분수에 맞지 않는 거창한 꿈이었다.
이진은 평생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말만 들었지 리더로서 적절히 행동하는 방법에 대해선 배운 적이 없었다. 아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실천할 능력이 부족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짓거리엔 충분한 내성이 있었다. 이진은 공격당한다는 생각에 굳어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어떻게든 자신을 깎아 내리려는 저열한 속내를 마주치자 익숙한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